그들의 영화, 그들의 이름

작가로서의 감독들

작가로서의 감독들

그들의 영화, 그들의 이름

언제부턴가 관객들은 영화의 제목보다 감독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작품 해석보다 그들을 해석하는데 더 익숙해 보이기도 한다. 자신의 이름이 영화를 대표하는 수식어가 되어버린 감독들. 그들에 대한 작은 시선을 담아보았다.

박찬욱: 경계를 만들고 허무는 일

철학을 공부한 박찬욱은 영화 속에서 자유에 대한 고민을 낯설게 풀어놓는다. 언제나 그로테스크하지만 때로는 우스우며, 가끔은 이상한 방식으로. 낯설게 다가오는 장면은 어쩐지 익숙하게 느껴지기도 하면서.

그의 영화를 자주 보았다. 마지막 장면이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오르면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늘 같았다. 낯선 배경 속에서 낯선 표정을 짓는 사람들의 얼굴이다. 그의 영화 속 세계에 사는 인물들은 언제나 자기 자신 안에 여러 감정과 싸우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 사이의 경계는 모호해지고 그것을 표현하는 이미지 역시 복합적이다. 가장 인상적인 그의 말을 꼽아보면 이렇다.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숭고한 것과 천박한 것, 슬픈 것과 웃긴 것, 그런 것들이 순수하게 하나의 요소만 취해서는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 《씨네21》 인터뷰 중에서

그는 이렇듯 사람을 말하는 방식으로 상반된 것들의 조화를 택한다. 인물에게 다중적 감정을 부여하고 그 혼란스러운 마음은 생소한 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지하철 안의 거대한 개미, 사람의 얼굴을 한 개의 몸, 일본 말을 하는 한국 사람들이 사는 곳은 또 유럽식이다. 미술에서 말하는 ‘데페이즈망’*의 방식으로 마치 초현실주의 회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친숙한 것들이 모여 새로운 감정을 일으키는 과정의 연속이며 어떤 의미에선 콜라주 방식과도 닮았다. 이렇게 태어난 전혀 다른 무드는 영화 속을 채우고, 박찬욱이라는 감독의 독보적인 개성으로 자리잡은 듯 하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는 살인자로 낙인찍히지만 외모가 뛰어나다는 이유로 선망이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녀는 복수의 도구로 ‘예쁜 총’을 사용한다. 생명을 해치는 총이 어째서 예쁠 수 있단 말인가. 살인자가 어떻게 우상이 된단 말인가. 이런 설정은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박힌 부정적인 현상에 대한 비판으로 보이기도한다. 그의 영화 속에선 우리의 삶 속에서 작아져야 할 것들에 대한 그만의 시선 역시 적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그가 보여주는 잔인하고 공포스러운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웃어버린다. <박쥐>에서는 물에 빠져 죽는 인물을 물침대에서 자게 한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잔인하지만 어쩐지 우습다. 슬프지만 또 무섭다. 이런 설정들의 반복으로 박찬욱의 이미지는 동시에 다수의 감정을 만들기 때문에 어렵고 모호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무척 친절한 방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쩌면 그 이유는 아주 간단 할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의 삶이 슬프기만, 웃기기만, 행복하기만, 불행하기만 하진 않으며 단 하나의 결말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좋은 일과 슬픈 일은 자주 함께하고 절망적인 순간엔 한구석, 작은 희망이 자리하기도한다. 그래서 그만의 표현 방식이 오히려 더 쉽게 다가온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 까. 조심스럽게 단언해 본다.

그렇다면 그가 사람과 사회를 표현하는 방식을 넘어서, 정말로 전하고자 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물론 영화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본 그의 세계 속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을 속박하고 있는 것들에게서 벗어나고자 했다. 아마도 박찬욱은 영화를 통해 ‘자유’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는 듯 하다. 작품마다 여러 각도에서 자유의 의미를 살펴보고있다. 금자의 이야기는 감옥에서 나오는 것부터 시작이며, 오대수는 15년 동안 갇혀 있던 독방에서 어느 날 갑자기 나오게 된다. <아가씨>의 히데코는 자신을 묶어놓던 대저택에서 숙희의 손을 잡고 땅을 떠나, 바다로 나아간다. <박쥐>에서 상현과 태주는 자신들을 가로막는 것들을 넘어 그저 자유롭게 사랑하고 싶었다. 

그만의 표현 방식인 ‘낯설게 하기’ 역시 알을 깨고 나아가는 일에 속한다. 전혀 다른 것들이 모여 서로의 경계를 풀고 넘나든다. 자유를 간절히 희망하는 사람들과 그들에게 꼭 맞는 표현 방식을 박찬욱은 알고 있었다. 경계를 만들고 허무는 과정. 그가 연출하는 이 순간들은 언제나 잔인하게, 가끔은 우습게, 또 감동적으로 스크린 속에 펼쳐지고 있다.

*데페이즈망 추방하는 것이란 뜻으로 초현실주의에서 쓰는 말이다. 일상적인 관계에서 사물을 추방하는 것으로 있어서는 안될 곳에 물건이 있는 표현을 의미한다.

#명장면 기억하기

금자는 근식에게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말한다. 그녀의 과거는 무척이나 잔인하지만 그 어떤 때보다 지극히 일상적인 말투로 고백한다.

S# 과거를 말하는 금자 | 금자의 방 | 아침

금자의 침대에 누워 있는 근식. 금자는 일어나 마시던 물을 작은 화분에 주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잔혹한 과거를 말하기 시작하는 금자.

금자: 세상엔 좋은 유괴하고 나쁜 유괴가 있다고 그랬어, 백 선생이.
근식: 예?
금자: 아이를 잘 데리고 있다가 건강하게 돌려주는 건 좋은 유괴랬어. 어차피 부잣집이니까 몸값 조금 뜯어내도 망하는 거 아니고 며칠 속이 타겠지만 감동적으로 다시 만나면 더 화목한 가정이 된다 했어. 그래 놓고 원모를 죽였어 백 선생이. 애가 자꾸 우니까 5분만 더 울면 죽여버리겠다고 겁을 줬어. 그리고 정말 죽였어. 살았으면 딱 지금 네 나이였을 텐데 죽였어. 근데 경찰이 목격자를 찾아냈어. 내가 원모 데리고 목욕탕 간 걸 봤대. 어느 날 시장에 다녀왔더니 딸애가 없었어.

금자는 덤덤히 이어가던 말을 잠시 멈춘다. 눈을 감고 깊은 심호흡을 한 후 다시 말을 이어간다.

금자: 백한상한테서 전화가 왔지. 내가 다 뒤집어쓰고 자수하지 않으면 내 딸도 죽는다고. 그러니까, 유괴범이 유괴범 아이를 유괴한 거야. 

당황한 근식의 표정.

금자: (근식을 보며) 재밌지? 재밌잖아.

<친절한 금자씨>(Sympathy For Lady Vengeance), 감독 박찬욱

이창동 : 고통을 볼 수 있는 사람

이창동의 영화는 보기가 힘들다. 영화 속 아픈 사람들이 우리와 너무 닮아서, 마음이 먹먹해 지며 목에서부터 어떤 것이 탁 하고 걸린다. 영화를 보고 나면 맨 처음엔 아프다는 생각을, 조금 지난 후엔 어떤 부끄러움을, 그리고 완전히 시간이 흐르면 그의 다음 영화를 볼 준비를 마친다.

그는 살아 있는 사람을 만든다. 글 속에, 영상 속에,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등장인물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눈을 뜨고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사람을 그려낸다. 이상한 말이지만, 이창동의 영화를 볼 때는 영화를 본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지금 바로 내 옆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경험한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그래서 힘들고, 그래서 고통이다.

가장 마지막으로 본 그의 영화는 최근작 <버닝>이다. 영화가 끝나고 한 평론가(평론가의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다)의 짧은 해석을 듣고 잠깐 문답 시간을 가졌다. 그는 이창동 감독의 제자였다고 했다. 그리고 수업 시간에 그가 한 말을 전해주었다. 그중 가장 마음에 남는 말은 “이창동 선생님은 영화 속에 자신의 감정을 담으려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자연히 그의 지난 영화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마음이 혼란스러워졌다. 어떻게 하면 그런 감정을 가질 수 있을까. 정확히 말하면, 어떻게 그 마음을 그대로 표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보이지 않는 감정을 현실감으로서 이야기한다. 어떤 비유나 감춤도 없이 그대로 보여준다. 그는 어째서 영화 속 아픈 사람들의 마음을 그리도 남김없이 표현할 수 있는 것일까.

그의 영화를 처음 본 날을 기억한다. <오아시스>였다. 보는 내내 마음이 먹먹해져 몇 번이나 보기를 멈추어야 하나 생각했다. 이제 그만 멈추려고 마음 먹었을 때, 공주가 종두에게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리고 나는 몰려오는 이 먹먹함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영화는 종두의 첫 등장으로 시작한다. 추운 겨울날 이제 막 출소한 종두는 여름 반팔셔츠를 입고있는데, 겨울 코트를 입은 사람들 사이에 유난히 어울리지 못한다. 공주는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거울을 벽에 비추며, 생기는 빛을 움직여 본다. 몸이 불편한 공주의 빛은 이리저리 움직이며 흔들린다. 그녀는 홀로 시간을 보내는 방법으로 빛을 선택했지만 이것마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이렇게 보이는 빛의 설정은 <버닝>에서 혜미가 말하는 남산 타워의 빛과도 닮았다. 공주와 혜미는 아주 잠깐 동안만 스치는 빛을 소중히 생각하지만 이들은 잡히지도 않으며 금방 사라진다. 감독인 그가 빛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흐려져가는 희망이 아닐까.

끝내 종두와 공주의 사랑은 폭력으로 인해 좌절됐다. 그들은 그저 다른 사람들 속에 섞여 사랑을 나누며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었을 뿐인데 편협적인 시선이 그 모든 바람을 맘대로 지워버렸다. 이런 지점은 <밀양>에서도 이어진다. 유괴범의 손에 아이를 잃은 신애는 고통 속에 살아가지만 종교로 삶을 이어가려 애써본다. 마침내 큰 결정을 내려 유괴범의 죄를 용서하고자 그를 찾아갔을 때, 그는 이미 자신이 하늘에게 용서 받았다 말한다. 

그녀가 허락하지 않았는데 그 누가 먼저 용서한단 말인가. 왜 사람들은 자꾸만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며 속단하려 드는 것일까. 이창동은 영화 속에서 그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뿐만 아니라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도 풀어야할 과제를 남긴다. 그는 우리가 다른 이의 감정을 정말로 이해할 수 있느냐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오아시스>를 다 보고 나서 내가 부끄러움을 느낀 이유는 폭력적인 시선을 던지는 저 사람들과 나 자신이 무엇이 다른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신애가 자신을 버리는 행동을 했을 때 나는 정말 그녀를 이해했는가 하며 자문하기도 했다. 나는 아마도 아직 그들을 다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부끄러운 마음을 가졌던 이유다.

그의 영화 속에선 언제나 아픈 사람들이 살고있다. 몸이 아프든 마음이 아프든 그들은 항상 시련 속을 걷는다. 이창동은 영화를 통해 고통을 보는 여러 시선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일까. <시>에서 손자의 죄를 목격한 할머니 미자, <버닝>에서 혜미가 사라진 이유를 벤에게서만 찾으려는 종수, <박하사탕>에서 자신의 삶을 후회하는 영호. 미자는 자신의 고통을 마주 하고 종수는 회피하려 든다. 영호는 지난 후회를 인정하기 싫어 다시 돌아가려 한다.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들을 그는 어째서 자꾸만 들춰내는 것일까. 분명한 것은 그가 지난 삶, 자신이 가지던 감정들을 영화에 쏟아내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소설가로서 한국의 분단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과 교사시절 ‘시’에 대한 그만의 고민, 문화부장관으로서 사회의 어두운 문제점들을 보던 그는 그때 느꼈던 감정을 모두 영화 속에 기록 하고 있다. 슬픔을 정면으로 볼 수 있는 것. 자신에게 결여된 부분을 인정할 수 있는 마음. 그는 자신이 만든 영화 속 사람에게 아픔을 주기 전에 먼저 자신의 고통과 마주했을 것이다. 그 과정 속에서 깨달은 가치를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리고 그 가치는 어떤 것일까. 어쩌면 공주와 혜미가 보던 빛과, 미자가 쓴 시와 같이 아름다운 것들의 일종 일지도 모른다.

#명장면 기억하기

영호와 순임은 오래전 서로의 첫사랑이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재회한다. 영호는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고, 순임은 영호가 여전하다고 말해준다.

S# 영호와 순임 | 식당 | 낮

어색하게 앉아 있는 두 사람. 순임은 영호를 바라보고 있지만 영호는 시선을 피한다. 손수건을 두 손으로 꼭 들고 있는 순임. 영호는 금방이라도 일어설 것처럼 몸을 돌리고 있다. 긴 정적 후에 순임이 영호의 눈치를 보며 말을 꺼낸다.

순임: 나 요새 고향 집에 내려가 있어요.
영호: (조금 따지듯이) 나 여기 있는지 어떻게 알았어요?
순임: 영호 씨 고향 집에 내려갔었거든요.
영호: 왜요?

당황한 듯하지만 말을 이어가려 애쓰는 순임. 영호는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순임 : 너무 소식이 없어서요. 그래서 예전에 영호 씨가 다니던 회사에 가서 주소를 알아냈거든요. (손수건을 만지작거리다 한 손으로 옷깃을 정리한다.) 영호 씨 고향에 식구들이 영호 씨가 왜 경찰이 됐는지 모르겠대요.

순임의 말을 듣다가 또다시 시선을 피하며 바닥을 보는 영호. 고개를 들어 소리치듯 말한다.

영호: 마실 것 좀 주세요.

순임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다시 태연한 척 말을 이어간다.

순임: 나 영호 씨 군대 있었을 때 면회도 갔었는데…. 나 근데 면회 안 시켜줘서 그냥 갔어요. 면회 간 거 몰랐죠?

영호는 점점 순임을 바라보기가 어려워지는 듯 시선을 자꾸만 피한다. 잠깐의 정적 후, 망설이던 순임이 자신이 들고 있던 손수건을 흘긋 보다 말한다.

순임: 손이요. 영호 씨 손이요. 

영호는 순임의 눈을 보지 못하고 시선은 아래로 향한 채 작은 소리로 말한다.

영호: 내 손이 왜요.
순임: 아까부터 영호 씨가 아니라 딴 사람 같았는데, 손 보니까 영호 씨 맞네요. 영호 씨 손 특이 하잖아요. 뭉툭하고 좀 못생겼는데 참 착하게 보이는 손. 나 맨 처음 영호 씨 만났을 때, 그때 영호 씨 손보고 이런 손 가진 사람이니까 마음이 참 착하겠다. 그렇게 생각했었거든요.

영호, 허탈하게 웃으며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본다.

<박하사탕>(Peppermint Candy), 감독 이창동

왕가위: 흐릿한 시간이 선명해지는 과정

가깝게 보이는 얼굴, 그리고 더 가까운 손. 그 속엔 언제나 흔들리는 사람이 있다. 그는 늘 인물을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카메라와 그들 사이엔 흐릿한 막이 씌어 있다. 갈팡질팡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언젠가 들은 이 말을 기억한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찍히는 사람을 정말로 사랑해야 한다.’ 이 문장을 생각하면 왕가위가 떠오르고 그의 영화 속 이미지가 스쳐지나간다. 그는 사람과 현상을 화면에 담을 때 우리의 눈을 적절히 가린다. 홍콩이라는 배경 때문일까. 늘 혼란스러움을 인물에 담아 흐린 효과를 사용해 그것을 표현한다. 무언가를 그대로 보여주는 방식보다는 여러 현상이 겹친 우회적 이미지를 선택한다. 이는 <중경삼림>에서 그대로 표현된다. 이 영화에선 ‘스텝프린팅’이라는 촬영 기법을 자주 목격할 수 있는데, 이 촬영 방식은 영화 속 인물들을 마구 흐트러뜨리며 관객을 혼란스럽게 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흐리게 보이는 인물을 쫓아 함께 도망치게 만든다. 의외인 것은 그의 영화 속, 흔들리는 사람들이 무척이나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인물들이 무언가를 기다리며 그리워하는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그 아름다움은 항상 유지된다. 사실 나는 왕가위의 영화가 미적으로 뛰어난 영화 중 단연 최고가 아닐까 생각한다. 

왕가위는 역사적으로 홍콩이라는 나라가 아팠던 시간들과 그 불안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일관되게 비추는 듯하다. 영화 속 사람들을 자주 홍콩으로 불러내며 견디기 힘든 시간들을 버텨내라 한다. 하지만 그가 늘 혼란과 엇갈림을 말하며, 우리가 슬퍼하기만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해피투게더>에서 아휘는 떠나간 보영을 그리워하며 소원을 담아야 하는 녹음기에 울음을 쏟아낸다. 아르헨티나 배경 속에서 홍콩의 이미지를 품고 있는 아휘와 그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시끄러운 음악 속에서 춤을 추고 있다. 그가 녹음기에 담고 싶었던 소원은 무엇이었을까. 이 장면을 보던 내가 슬펐던 이유는 지나간 헤어짐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꼭 연인과의 헤어짐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의 헤어짐들은 언제나 힘겨웠지만 아휘의 울음은 너무 아름답고 이 장면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내게 안심을 준다. 아픔의 과정이 감사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헤어짐으로 인해 생긴 것들이 이렇게 아름답게 비춰질 수 있다면 앞으로는 조금 더 성숙하게 이겨나갈 수 있지 않을까. 왕가위는 나에게 단 몇 분의 시간으로 소중한 가치를 주었다. 그는 영화 속 흐리게 보이는 사람들을 통해 우리들의 감정을 조금 더 선명하게 만드는 것이다.

왕가위 영화의 제목들에서 한가지 일관성을 발견했다. <아비정전>은 ‘아비의 일대기’라는 뜻으로 아비가 살았던 시간들을 말한다. <해피투게더>는 사실 <춘광사설>이라는 원제로 ‘구름 사이로 잠깐 비치는 봄 햇살’이라는 슬픈 뜻을 가지고 있다. <화양연화>는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라는 뜻이다. <동사서독>의 영어 원제는 ‘시간이 남긴 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쯤이면 우리는 가장 큰 공통점을 발견 할 수 있다. 그것은 ‘시간’이다.

왕가위가 말하는 시간은 인물의 감정에 따라 상대적으로 흘러간다. <아비정전>에서 아비와 수리진의 시간이 그렇다. 수리진의 시간은 아비를 그리워하며 느리게 흐르고, 반면 아비의 시간은 너무 빠른 끝을 맞이해 그 사이의 시간은 아주 짧다. 대부분 그의 영화에서 인물들이 자꾸만 엇갈리는 이유는 다르게 흐르는 시간들 때문이다. 다른 측면에서도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중경삼림>에서는 통조림의 유통기한을 사랑하는 시간에 비유해 풀어냈다. <화양연화>에서는 시간의 반복성에 대한 의미를 볼 수 있다. 초와 리첸은 영화의 시작에 처음 만나고 그 사이에 헤어지며, 마지막엔 또다시 마주쳤다 곧바로 헤어진다. 영화는 끝이 났지만 그들의 시간은 계속 해서 이어질 듯한 여운을 남긴다. 제목처럼 가장 아름다운 시간은 언젠가 돌아올 것이다. 왕가위가 시간을 매번 다르게 묘사하며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의외로 이것을 설명해주는 것은 그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공간’들이다. 리첸과 차우가 자주 스치는 곳은 계단이며 이곳은 어딘가로 가고 또 어딘가에 도착하는 과정의 공간이다. <아비정전>에서 아비는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기차에서 보내는데 기차 역시 계단과 같은 과정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일관성을 가진다. 왕가위는 인물에게 시간을 말하게 하고 그들이 존재하는 공간에서 의미를 확대시켜 나간다. 시간은 과정이며 우리는 그 사이를 매 순간 살아간다. 그리고 아비는 말한다. 인생은, 시간은 너무도 짧다고. 이제 우리는 정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 짧은 사이에 어떤 감정을 느끼며 살아야 할지를.

#명장면 기억하기

아비는 매일 오후 3시, 매표소에서 일하는 수리진을 찾아간다. 자신이 그녀의 꿈에 나올 거라며 이야기하는 등 수리진의 마음을 흔들어놨다. 그리고 오늘 오후 3시. 역시 그는 매표소 앞에 서 있다.

S# 수리진을 찾아온 아비 | 매표소 | 약 오후 3시

터벅터벅 걸어가는 아비. 마침내 수리진이 있는 매표소에 도착했다. 그녀는 열심히 청소를 하다 아비를 발견한 후 애써 의식하지 않는 척 계속 하던 일을 한다. 아비는 당당하게 말을 건다.

아비: 오늘은 좀 달라 보이는데.
수리진: 뭐가요. 달라 보일 것 하나도 없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비: 그런데 왜 귀가 빨갛죠?

수리진, 당황한 듯 하던 일을 멈추고 아비에게 따지는 말투로 말한다.

수리진: 대체 뭘 원하죠?
아비: 그냥 친해지고 싶어서 그래요.
수리진: 내가 왜요?

아비, 수리진에게 가까이 다가가 자신의 시계를 보여주며 말한다. 이제 둘의 거리는 매우 가깝다.
아비: 1분만 내 시계를 봐요.

수리진: (화를 내며) 내가 왜요.
아비: 그냥 잠깐만 봐요.

수리진은 긴장한 듯하다. 그리고 그의 시계를 본다. 시계는 이제 막 3시를 가리킨다.

수리진: 시간 다 됐어요. 뭐죠?
아비: 오늘이 언제죠?
수리진: 16일.
아비: 16일… 4월 16일…. 1960년 4월 16일 3시 1분 전, 당신과 여기 같이 있고 당신 덕분에 난 이 순간을 기억하겠어요. 이제부터 우린 친구예요. 우린 1분을 함께 했고 이건 지울 수 없어요. 이미 지나간 과거니까. 내일 또 올게요.

<아비정전>(Days Of Being Wild), 감독 왕가위

그들을 다시 만나는 법: 작가 감독들의 음악과 책

박찬욱이 듣는 소리

박찬욱의 영화는 음악도 유명하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꼭 그 안의 소리들을 다시 듣고 싶어진다. [박쥐 OST] 트랙을 살펴보면 트로트 장르의 음악도 삽입되어 있다. 뱀파이어라는 영화의 소재와 상반된 트로트의 무드가 오히려 재미를 더해준다. [아가씨 OST]에는 숙희와 히데코의 목소리가 그대로 담겨있다. 앨범을 모두 들었을 땐 그의 영화 속 이미지들이 머리 속을 채운다.

이창동의 영화, 그 이전

그는 영화감독 이전에 여러 직업을 거쳤다. 그중엔 소설가도 있다. 그가 하는 진실에 대한 고민을 더 알고 싶다면 단편 소설집 《녹천에는 똥이 많다》를 보면 좋다. 어쩌면 영화보다도 더 생생한 이미지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 같다. 또 <버닝>은 영화로 만들어지기 전에 먼저 소설로 존재했다. 그 이야기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집 《반딧불이》에서 ‘헛간을 태우다’를 보면 알 수 있다.

왕가위의 아름다운 사람들

그는 영화 속 사람들을 만들고 화면에 담기 전에, 먼저 배우를 사랑하는 것부터 시작한다고 했다. 진짜로 사랑한다면 사람을 그토록 아름답게 담을 수 있는 것일까.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왕가위의 영화는 언제나 아름답다. 그만의 미학은 《왕가위》라는 책에서 자세히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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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김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