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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머릿수는 여행을 하는 방식의 수와 같다. 저마다의 취향과 원하는 날씨, 그리고 마음 한편에 숨겨둔 낭만이 다르기 때문이다. 순간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이유로 여행의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롭다.
풍경을 담는 아침 산책
당신과 친해지는 시간
늦잠을 자고 일어나 잠이 덜 깬 부스스한 얼굴로 문밖을 나선다. 아침 산책은 낯선 공간과 맨얼굴을 마주하며 나만의 방식으로 조용한 인사를 나누는 시간이다. 여행은 물론이고 한창 캠핑을 다닐 때도 다음 날 아침이면 꼭 산책을 나섰다. 목적 없이 타박타박 걸으며 주위를 바라보고 있자면, 낯선 곳이 한결 친근하게 느껴지고 어느새 긴장이 풀린다. 관계를 맺는 것이 느릿한 나한테는 공간과도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아침 산책은 여행의 달뜬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풍경을 내 안에 담을 수 있는 시간이라서 자연스레 조그만 노트를 꺼내 그림으로 남기기도 한다. 대개 그런 것은 대단한 풍경이 아니라 나에게만 특별한 감정을 자아내는 것들이라 조용한 아침 산책 시간의 잔잔한 모습을 보여준다. 게다가 운이 좋으면 동네의 작은 카페를 발견해서 기분 좋은 모닝커피로 하루를 시작할 수도 있다. 제주도에 내려와 살이를 한 지 1년 남짓 된 지금은 처음처럼 자주 산책을 다니진 않지만, 우리 집에 놀러 온 친구들은 반강제로 아침 산책에 끌려나간다. 말하지 않아도 좋은 순간을 공유하고 싶달까. 주로 내가 사랑하는 협재에서 금능으로 가는 종려나무 숲길이나 선인장이 가득한 바닷길로 향한다. 여러 번 다닌 길이었어도 친구와 함께 걷는 길은 매번 조금씩 다르게 다가와 기억하고 싶은 조각으로 남는다.
한차연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 잠시 제주에 내려와 살면서 주변의 것들을 조용하고 느리게 그려나가고 있다.
그곳의 시장
권태와의 조우
나는 때로 발 없는 새가 되어 한참을 날았다. 머무를 곳을 잃고 떠나는 자의 마음이란 그렇다. 맛난 먹이와 맑은 물 앞에 내려앉아 한숨 돌리는 것, 그러한 것을 여행이라 믿었다. 도망치듯 떠나 오래된 시장을 걸었다. 여행은 새로운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나의 도피가 누군가의 일상임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시장 골목을 가득 채운 치열한 하루의 일부가 되고 싶었다. 나의 하루와 그들의 하루가 다르지 않다는 것. 그것만이 위로가 되었다. 일상과 여행이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된 후의 여정은 슬프도록 아름다웠다. 지친 날개를 접고 두 발로 서서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있지 않은 하늘과 어둠과 태양을 만끽했다. 평범하고 보편적인 하루를 보내며 행복을 소리 내어 말했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이 곧 여행이 된다. 더 정확히는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의 일상이 곧 여행이 된다. 나의 일상은 누군가의 여행이 된다. 온갖 숨이 뒤엉켜 떠다니고, 비린내와 떡볶이 냄새가 버무려진 시장의 축축한 바닥 위에 그 비밀이 있다. 행복과 자유는 주변에 만연해있다. 우리는 단지 선택하면 된다.
이경원 노래 짓는 사람. 뉴클리어스 밴드에서 건반을 연주하고 있다.
어느 건물의 창문을 찍는 일
창문을 들여다보는 사람
옆집 살던 친구의 방을 유난히 자주 들락거리던 때가 있었다. 한 소년이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내용의 학습만화책을 발견한 뒤였다. 몸은 책상 아래의 좁고 그늘진 자리에 머물러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언젠가 소년처럼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게 될 테니. 그리고 이십 년이 지났다. 나는 기대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원망과 비관으로 스스로를 무장한 채 인생 첫 배낭여행을 나섰다. 마음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칠까 몸을 사렸고 어떤 날은 길조차 묻지 않았다. 터키와 시리아, 체코, 프랑스를 거쳐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자랑할 만한 현지인 친구도 멋진 기념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여행은 그런 것이었다. 대신 수천 장의 사진이 보관되어 있었다. 한 장씩 살펴보니 유독 창문을 담은 컷이 많다. 달리는 버스의 창문, 반딧불처럼 저 혼자 밝은 시골집의 창문, 불야성인 빌딩의 촘촘한 창문. 소년에게서 귀동냥했던 미지의 나라. 그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이란 대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염탐하고 싶었다. 나는 이전의 나보다 조금 더 너그러워졌지만, 기대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런 사람이 여행책방을 열었다. 책은 내색하지 않으면서도 누군가의 인생을 염탐하기에 제격이었으므로. 그러고 보면 나는 책과 창문을 들여다보길 좋아하는 사람인 셈이다.
송은정 서울의 낡은 골목에서 여행책방 <일단멈춤>을 운영한다.
냄새, 시선 그리고 소리
여행을 온전히 기억하는 방법
냄새는 언제나 기억보다 강하다. 작은 소리 하나조차 예민하게 반응한다. 볕을 쫓아 뛰어다니는 고양이처럼 빛을 찾아다녔다. 작열하는 태양에 벌겋게 달아오른 사람들, 시야를 가리던 매캐한 먼지와 아프게 코를 찌르던 지린내, 별이 쏟아지던 사막의 밤하늘, 거리를 가득 메운 낯선 자동차 소음들, 혹은 숨이 멎어버릴 것만 같던 짙은 고요함(그것은 진공 상태이거나 무음의 공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을 기억한다. 동공으로 사진을 찍고, 귀를 열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 일련의 동물적 감각에 충실한 여행은 언제나 멋들어지게 찍은 DSLR의 그것보다 진하고 걸쭉하다. 의도된 아름다움은 의미가 없다. 박제된 아름다움이다. 박제된 모든 것들엔 생명이 없다. 쉽게 가질 수 있지만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때 그 순간에 충분히, 그리고 온전히 몰입해야 얻을 수 있고 그때 그 순간이 아니면 두 번 다시 내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은 다 그런 법이다. 가질 수 없으므로 더 아름답고 간절해지는 것이다. 오늘도 나는 낯선 곳에서 습관처럼 숨을 깊게 들이쉰다. 동물적 감각을 곧추세우기 위해서. 순간에서 영원으로 기억하기 위해서.
홍유진 여행 작가. 여행을 테마로 한 책을 주로 썼다. 저서로 《보통날의 여행》, 《무작정 따라하기 오사카·교토》 등이 있다.
서점을 찾는 일
침묵의 위로
어릴 적 책장 옆에서 동화책을 외우던 나는, 자연스레 국문학을 전공했고 운이 좋게 글로 돈을 버는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글’을 쓴다고 하기엔 일의 8할을 글쓰기 외 다른 것들로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상 심리로 서점이나 도서관을 자주 찾게 됐다. 마감만 끝나면 비행기를 타고 훌쩍 떠나는 습관 덕에, 해외 어느 이름 모를 서점에 넋을 놓고 앉아 있거나, 열혈 학도들 사이에 끼어 앉아 공부하듯 해외 패션 매거진을 보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휴대폰을 잠시도 내려놓지 못하고 쉴 새 없이 말을 해야 하는 나에게 모두가 약속한 듯한 의도적인 침묵은, 잠시나마 내게 환기의 시간이 되어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입사 후 처음으로 떠났던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서 만난 낡은 서점, 방콕과 싱가포르 쇼핑몰에서 만난 도서관들, 1년의 대학생활을 보내고 잊지 못해 몇 번이고 다시 찾아간 시애틀 워싱턴대학교의 중앙도서관, 포틀랜드의 독립서점, 화려한 뉴욕의 1평짜리 서점들, 건너갈 때마다 캐리어 한가득 채워 돌아오는 일본의 매거진 서점들까지. 셀 수 없이 다양한 곳을 다녀왔지만 책방의 고요가 주는 위로는 모두가 같았다. 그리고 아마, 이 편안한 공기는 10년, 2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겠지. 아직은 용기가 없어 상상만으로 그치지만, 꼬부랑 할머니가 되었을 때쯤엔, 헬싱키의 어느 골목에서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 서점을 열고 싶다. 비록 1평일지라도, 마음은 100평만큼 따뜻할 것 같다.
황보선 매일 일탈을 꿈꾸는 매거진 《쎄씨》의 피처 에디터이다.
동화책 수집하기
어른이 모험하는 세계
나는 어렸을 적 엄마로부터 동화책 선물을 자주 받았다. 낱권인 선물의 맨 앞장에는 나중에 이 책을 다 읽으면 어떤 이야기인지 엄마에게 꼭 들려 달라는 편지가 쓰여 있었다. 그래서 유치원 가기 전, 엄마가 내 머리를 묶어줄 때 동화책 이야기를 조각조각 들려주었는데 나는 그 시간을 몹시 사랑했다. 물론 어떤 이유를 붙이지 않아도 동화책은 늘 사랑스럽지만. 그렇게 어른이 되어 홀로 여행을 하는 나는 그 나라의 언어로 만들어진 동화책들을 산다. 어떤 이야기인지 알 수 없는 것이 한탄스러울 때가 있지만 잘 그려진 그림으로 이야기를 유추하는 재미도 나름대로 쏠쏠하다. 이야기에 덧붙이는 이야기가 가진 힘이 그렇다. 이 책을 읽을 아이들을 생각하며 작가들이 궁리하고 탐험했을 세계와 모험은 그렇게 내게 오고, 나의 것이 되었다가, 나만의 이야기로 변한다. 그중에서 내가 가장 아끼는 것은 런던의 작은 책방에서 산 것인데 엄마를 찾는 새끼 악어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책 한 권이 말해주는 이야기에 내가 이 책을 만나게 된 이야기를 더해 가두는 것은 일종의 여행을 기록하는 작업이다. 그렇게 내 책장에는 나의 여행들이 꽂혀있다.
이자연 어라운드 에디터. 얼마 전 술집에서 춤춰도 되냐는 물음을 던졌다가 주인장께 아주 정중히 거절당했다.
에디터 이자연
글 한차연 이경원 송은정 홍유진 황보선 이자연 사진 안가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