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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림―작가
구석구석 눈길 닿는 곳마다 작은 것들이 눈에 들었다. 집안 모든 곳이 쓸모를 가진 작은 물건의 천국이었다. 이건 귀엽고, 저건 멋지고, 그건 근사하고…. ‘깨알 같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작은 것들을 위한 방. 가느다란 샤프심부터 무언가 담겨 있었을 비닐봉지까지 그녀의 방에선 모두 문구가 된다. “내가 문구라고 부르면 문구인 거지요!” 뭐든 문구로 탈바꿈할 수 있는 그녀는 문구가 취미라 말하지만, 어쩌면 특기인 건 아닐까. 작은 것에게 곁을 내주는 사람, 작은 것의 쓸모를 발견하는 데 특히 능통한 사람, 문구인 김규림을 만났다.
“문구의 안경을 끼고 보면 세상에 문구가 아닌 게 없어요.”
“전자 제품이 아무리 발달해도 문구가 설 자리는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문구인 김규림’을 소개해주세요.
안녕하세요, 제품 기획자, 마케터로 활동해온 김규림입니다. 그리고 《아무튼, 문구》를 쓴 문구인이죠(웃음). 기획자나 마케터처럼, 그 포지션에서 활동하면 어떤 사람이든 불릴 수 있는 명칭보다는 이왕이면 저를 표현할 타이틀을 갖고 싶었어요. 그러던 중에 문구 회사 홈페이지에서 “안녕하세요, 문구인 여러분!”이라는 문장을 보게 됐고 보자마자 ‘이거다!’ 싶었죠. 조금 간지럽기도 하지만, 괜스레 사명감이 드는 명칭이어서 사용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듣는 사람은 문구인이라는 말을 낯설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맞아요. 다들 ‘문구인이 뭐야?’ 하더라고요. 문구인으로 소개한 지 2년이 다 되어가는데 친구들은 지금도 우주인도 아니고 문구인이 뭐냐면서 놀리기도 해요(웃음). 그래도 활자로 쓰면 한자 병기가 가능하니까 텍스트로 소개해야 할 때 주로 사용하고 있어요. 사실 입 밖으로 자기소개를 할 일이 많진 않으니까요.
기습 질문! 가장 최근에 산 문구는?
바로 어제 산 노트요. 1년간 베트남 파견을 마치고 엊그제 귀국했는데, 오랜만에 온 서울이니까 그동안 놓친 문구 트렌드를 다 봐야겠다는 마음으로 제가 자주 다니던 문구점부터 훑어봤거든요. 그러다 편집숍 플라잉 타이거Flying Tiger Copenhagen에서 커버가 코듀로이인 노트를 발견했어요. 계절과 잘 맞는 예쁜 노트를 저렴하게 구입해서 온종일 기분이 좋았죠.
‘내가 문구라고 부르면 문구인 거지요’라는 문장이 참 좋았어요. 문구에 정해진 틀이 없다는 것 같기도 하고, 누구나 문구인이 될 수 있다는 뜻 같기도 했죠.
예전에 문구라고 불린 것들은 문방사우文房四友를 뜻하는 말이어서 그 경계가 서예에 국한돼 있었어요. 하지만 요새는 스티커나 그걸 담는 파우치, 심지어 아이패드나 공구도 문구라고 부르잖아요. 저는 뭔가를 기억하거나 창작하는 데 필요한 것들은 다 문구라고 생각해요. 더 나아가서는 책상에 놓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문구처럼 보이죠. 개인적으로는 영감을 주는 모든 것, ‘나도 이런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까지 문구로 취급해요. 매일 보는 달력이라든지, 보면 기분 좋아지는 엽서, 그 외에도 영감을 주는 거라면 뭐든지요.
문구는 아니지만 문구처럼 쓰는 물건도 궁금해요.
빈티지 제품을 좋아해서 을지로에 있는 방산시장에 자주 가는데, 이번에 호두과자 봉투 백 장을 2천 원에 사 왔거든요. 그 안에 물건을 담기도 하고, 친구에게 선물할 때 포장지 대용으로 곧잘 사용하고 있어요. 요새는 인테리어에 관심 있는 사람이 많아져서 다이소 같은 데만 가도 예쁜 소품이 많아요. 디자인이 예쁜 행주 집게를 종이 집게로 쓰거나 책상에 오브제로 두기도 하죠. 가게에서 받은 포장지나 비닐봉지도 벽에 붙여놓으면 멋진 포스터처럼 보여요. 문구의 안경을 끼고 보면 세상에 문구가 아닌 게 없거든요.
다소 개인적인 견해지만 문구 하면 두 가지 취향이 떠올라요. 귀엽고 아기자기하거나 고급스럽고 심플한 종류죠. 보통은 둘 중 하나를 선호하는데, 문구인답게 양쪽을 다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아무튼, 문구》를 쓰면서 제 취향을 깨달았어요. 원고를 쓰기 위해 책상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됐거든요. 어릴 때부터 귀여운 걸 좋아해서 제 취향은 무조건 아기자기한 쪽인 줄 알았는데, 가만 보니 오랫동안 책상을 차지하고 있는 건 가죽과 황동처럼 소재가 좋은 것이거나 클래식이라 불리는 거더라고요. 화려하고 팬시한 제품, 특히 눈코입이 달린 제품은 지금도 열심히 사들이지만, 오래 마음 붙일 단단한 제품도 꾸준히 찾는 걸 보면 역시 제 취향은 두 가지가 공존하는 것 같아요. 어느 한 쪽만 좋아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최근에는 문구 제작의 장벽이 낮아졌어요. 소량의 문구를 직접 제작해서 판매하는 사람도 많아졌고요.
저는 스타일 면에서 조악한 제품을 좋아하지 않아요. 훌륭한 제품인데 프린트가 엉망이어서 가치가 떨어진다거나… 그럼 좀 속상하죠. 그런데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나온 훌륭한 제품들도 그런 과정을 거쳤을 테니 의미가 있겠단 생각도 들어요. 이렇게 다양한 문구가 쏟아져 나온다면 사람들도 문구를 보는 눈이 점점 높아질 테고, 결국 더 좋은 문구가 나올 거라는 기대도 생겨요. 비전문가의 제품을 보면서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지?’ 할 때도 많기 때문에 응원하고 싶어지죠.
취미가 직업이 되는 건 꿈이자 독이라고 하던데, 문구 기획자로 일하는 건 어땠어요?
어릴 때부터 문구를 좋아했기 때문에 문구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어요. 근데 산업디자인학과에 진학하고 보니 디자인은 저랑 잘 맞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더 좋은 문구가 나오도록 도와주고 아이디어를 내는 직업을 선택하게 됐어요. 물론 아직도 디자이너가 되면 어땠을까 생각하기도 하는데요. 작은 실수가 나오면 기획한 저도 마음이 아프지만 함께 일한 디자이너들은 훨씬 크게 괴로워하더라고요. 역시 저는 아이디어를 내고 새로운 걸 기획하는 게 좀더 잘 맞는 것 같아요.
여러 이유로 실현되지 못한 아이디어도 있을 것 같아요.
만들어보고 싶어도 국내엔 제작할 수 있는 업체가 없어서 만들 수 없는 물건도 있었고, 꽤 오래 근무했던 일터인 ‘배민문방구’의 특성상 카피가 무조건 필요한데 넣을 만한 글귀가 없어서 발전시키지 못한 기획도 있었어요. 아직 시도하지 않은 아이디어도 수두룩한데 투두리스트to-do list에 가득 적어놓고 계속 기회를 엿보고 있죠.
1년간 머문 베트남에서의 문구 생활은 어땠나요?
문구를 좋아한다고 생각해왔지만, 그 깊이를 깨달은 건 이번 해외 파견 때였어요. 베트남에서 첫 주를 보내고 이상하게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한국에 있을 땐 일요일이면 하루 마무리로 늘 문구점에 다녀왔어요. 어떤 게 새로 나왔나 훑어보면서 자극을 받곤 했는데, 그걸 못 한다고 생각하니 1년 동안 무슨 낙으로 살아야 하나 걱정되더라고요. 게다가 베트남은 문구 불모지라고 불린다는데…. 좌절했죠. 그러다 문득, 베트남에도 학생이 있는데 어떻게 문구가 없겠느냔 생각이 들었어요. 가까운 데 있는 건축 대학, 도매시장 같은 델 무작정 가보니까 지금까지 봐오던 거랑은 스타일이 다른 문구 제품이 꽤나 많이 보였어요. 형광 색상을 전면에 뿌린 제품 같은 거요. 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웠죠.
특히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요?
도매시장에 널려 있던 대왕 집게요. 조그마한 게 커지거나 커다란 게 미니어처로 나오면 재밌잖아요. 제 손보다도 큰 사이즈인데, 쓰레기통에 쓰레기봉투 고정할 때 쓴다더라고요. 하나에 오백 원이었는데, 두 개를 사서 책상에 오브제처럼 두고 있어요. 베트남의 문구 시장은 우리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유럽이나 일본 문구점과는 다른 재미가 있었어요. 제조업이 발달한 나라여서 갓 만든 다른 나라 문구를 보는 일도 많았고요. 미국에서 사온 컴포지션 노트에 왜 ‘Made in Vietnam’이 적혀 있었는지 알겠더라고요. 갓 만들어진 팔딱팔딱 뛰는 문구들을 보고 온 거죠.
여행지에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문구점 방문이라고요. 세계의 문구점 이야기도 궁금해요.
도시마다 다른 문구점 분위기를 느끼는 게 참 재밌어요. 해외가 아니라 한국, 아니 서울만 봐도 문구점 느낌이 많이 달라요. 전 세계 문구를 선보이는 포인트오브뷰 같은 고급스러운 문구점이 있는 반면, 종로 쪽에 가면 승진문구, 방산시장처럼 생활에 밀접한 문구류를 판매하는 곳도 있거든요. 여전히 수기를 고집하는 가게 사장님들을 위해 영수증과 세금계산서 같은 걸 파는 가게죠. 저는 문구점이란 이름을 공유하면서도 분위기와 내용은 완전히 다른 가게들을 왔다 갔다 하는 게 좋아요. 문구의 범주가 이토록 넓다는 걸 실감할 때마다 흥미로워요. 건축 대학 앞에선 컴퍼스나 삼각자가 보편적인 문구일 테고, 회사 앞에선 사무용품이 일반적인 문구일 테니까요. 그래서 질리지 않고 좋아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역시 문구는 취미생활로 안성맞춤이에요(웃음).
듣고 보니 해외의 문방구 못지않게 흥미롭네요. 요새는 오래된 문방구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어서 그 편차가 희미해지는 것 같기도 해요.
《아무튼, 문구》를 쓰면서 어릴 때 다니던 문구점에 가봤는데, 문을 닫아서 무척 아쉬웠던 기억이 있어요. 그런 경험을 통해 오래된 문구점이 사라지기 전에 쌓여 있는 재고를 건져 올리는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해외에 있다 와서인지 한국의 고전 문구가 유난히 애틋해 보이더라고요. 엊그제는 옛날 로고가 박혀 있는 연필과 사인펜을 다스째 들여오기도 했어요(웃음). 한국에 돌아오면 꼭 해보고 싶던 일 중 하나가 기차 여행으로 무턱대고 지방의 학교 앞 문방구를 찾아가서 옛날 로고가 박혀 있는 문구를 잔뜩 모으는 거였어요. 사라져가는 것들에게 마지막 축제를 열어주고 싶거든요.
지금 우리가 쓰는 물건도 훗날에는 오래된 문구가 되겠죠. 특히 기억에 남는 오래된 문구가 있나요?
최근에 한 문구점에서, 양지사에서 나온 텔북Tel-Book을 봤어요. 제가 본 건 아코디언처럼 펼쳐지는 형식이었는데, 커버를 자석으로 ‘딱!’ 붙여서 여닫는 게 재밌었죠. 옛날엔 전화번호를 손으로 써서 기록했잖아요. 요즘 친구들이 텔북을 보면 뜬금없다고 생각할 것 같더라고요(웃음).
문구에는 시간과 문화가 스며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문화적으로 충격적인 문구도 있을 법한데….
올해 태국에 갔을 때 좋은 의미로 충격받은 문구가 있었어요. 군데군데 물방울 같은 게 튀어 있는 스티커를 보게 됐는데, ‘이 물방울은 뭐지?’ 하고 들여다보니 사람이 스티커에 그러데이션 페인팅한 흔적이더라고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하얀색 동그라미 스티커에 직접 하나하나 그러데이션을 입힌 거죠. 짧은 순간이었지만 반성도 참 많이 하게 됐어요. 문구는 찍혀 나오는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수작업으로 이렇게 멋진 제품을 만들 수도 있구나 싶었죠. 그 자리에서 200개를 주문하면서 수작업으로 대량 작업은 좀 어렵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너무 좋아하면서 할인도 해주겠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수작업은 아니지만 직접 노트를 만들기도 했어요. 용지부터 표지, 판형, 제본 방식까지 선택지가 많아서 고민했을 것 같아요.
1천 부나 되는 노트를 박스째 받은 날이 생생해요. 검수한다고 침대에 쫙 펼쳐놓고 그 위에 누워선 ‘나의 행복은 여기 있다.’고 생각했죠(웃음). 마지막까지 고민한 건 내지 매수였어요. 저는 필기할 때 보통 사인펜을 사용하기 때문에 뒷장에 비치는 얇은 종이는 선호하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원하는 용지 중 제일 두꺼운 120그램짜리를 선택하고, 실제본으로 제작하려 했거든요. 80매를 제작하겠다고 했더니 사장님이 실제본은 40매 정도가 제일 예쁘다며 말리시더라고요. 끝까지 “10매만 줄이는 거 어때?” 하고 권하셨지만 80매로 제작했고, 문제없이 나와서 만족스러웠어요. 둥글둥글한 게 꽤 귀엽거든요.
《아무튼, 문구》에서는 문구 브랜드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어요. 평소에 문구 브랜드에 관해 공부도 하는 편인가요?
궁금한 걸 못 참아서 조금만 궁금해도 찾아보는 게 습관이 되어 얕은 지식이 쌓인 정도예요. 개중엔 문구 관련 서적에서 얻은 정보도 있고요. 문구에 관한 책이 나오면 꼭 읽어보는데, 문구를 깊게 파고든 《궁극의 문구》나 《문구의 과학》 같은 책을 보면 감탄하게 돼요. 얕게나마 지식을 얻어갈 수 있게 해준 데 감사하기도 하고요. 최근 읽은 책 중엔 《만년필 탐심》이 특히 기억에 남아요. 만년필 모델만 보고도 ‘이건 박목월 시인이 썼던 모델’ 하고 바로 아는 걸 보면서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지인의 문구에서 영감을 얻기도 하나요?
어릴 때부터 문구 관련 커뮤니티를 자주 들여다봤는데, 요새는 해시태그를 많이 찾아보고 있어요. 몰스킨이나 미도리 같은 유명 브랜드의 해시태그를 검색하면 사람들이 실제로 활용하는 걸 볼 수 있거든요. 일반인 중에서도 마니아가 많아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게 되죠. 똑같은 노트인데도 어떤 사람은 연필로 스케치하는 노트를 만들고 어떤 사람은 콜라주 작업으로 구성하기도 해요. ‘이렇게까지 활용할 수 있는 거 아세요?’ 하고 자랑하듯 올려놓는 코멘트도 어찌나 귀여운지, 이런 게 바로 문구가 주는 재미 아닐까요.
문구를 살 때 특히 선호하는 브랜드가 있어요?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브랜드보다 외형이에요. 필기감은 너무 좋은데 디자인이 제 스타일이 아니라면 안 사거든요. 심이 굵은 펜도 좋아하는데요. 얇은 심으로 쓰면 악필인 게 금방 들통나서 굵은 심을 주로 쓰고 있어요. 노트는 유선보다 무선, 내지는 백색보다 미색, 얇은 종이보단 두꺼운 종이를 좋아하죠. 세세하게 놓고 보면 나름대로 기준은 있지만 절대적으로 좋아하는 걸 정해두지는 않아요.
일반적으로 문구를 좋아하면 필기도 좋아하던데 학창 시절엔 어땠어요?
필기하고 싶어서 공부하는 정도였어요. 그 당시에 좋아하는 아이돌이나 캐릭터가 인쇄된 ‘펜 띠’라는 게 유행했는데요. 열심히 오려서는 ‘동방신기 영웅재중 아내’ 같은 멘트를 적어 펜마다 돌돌 두르기도 했고…(웃음). 공부를 시작하기 전엔 꼭 비장하게 필기구 풀세트를 책상에 펼쳐놓곤 했어요. 쓸데없이 필기구만 잔뜩 갖고 다녀서 필통이 항상 터질 듯이 무거웠죠.
학창 시절에도 문구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학생이었군요.
네. 수능이 딱 끝나고 서랍장을 열었는데 펜만 몇천 자루가 와르르 쏟아지더라고요. 근데, 놀랍게도 그걸 다 모아서 중고나라에 팔았어요. 30만 원어치를 3만 원에 처분하고…. 그때가 저의 유일한 문구 비수기였어요. 대학생 땐 공부를 멀리하고 놀기만 했는데, 그 영향인 것 같기도 해요. 물론 그 잠깐이 지난 뒤엔 다시 모으기 시작해서 집에 이렇게 꽉 들어찰 만큼이 됐죠.
《아무튼, 문구》를 읽으면서 제 취향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기도 했어요. 없어도 좋고, 천천히 찾아도 상관없다는 마음이 들어 위로받기도 했고요.
저도 아무튼 시리즈를 보면서 용기를 얻은 적이 많아요. 시리즈 제목이 ‘아무튼, ○○’잖아요. 이 사람은 ○○에 대해 얼마나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길래 이런 책을 썼을까 싶은 마음으로 펼쳐보곤 했는데, 책을 읽다 보면 ‘뭐야! 나도 이만큼은 하는데!’ 싶더라고요. 그렇지만 그 소재로 저한테 책을 쓰라고 한다면 저는 때려죽여도 못 할 거예요. 아무튼 시리즈를 읽으면서 ‘좋아하는 것에 대해 밤새도록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참 멋있다.’는 생각을 자주 했어요.
어느덧 그런 멋있는 사람이 되었네요!
무라카미 하루키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가운데 ‘인간’은 가장 잘 드러난다.”고 했는데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좋아하는 것이 뚜렷한 사람들과 지내면서 제대로 좋아하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위축되던 시기가 있었어요. 관심 있는 건 많지만 취향이라고 내세울 만한 게 없는 기분이었죠. 힙합을 좋아해서 힙합 가수들이 얼굴을 다 알 정도로 파고들던 사람도 있었고, 달리기를 좋아해서 포틀랜드까지 가서 달리던 선배도 있었는데 그게 참 부럽더라고요. 그러다 문구인이란 단어를 만나고서 저를 표현할 무엇이 생긴 것 같아 뛸 듯이 기뻤어요. 곰곰 생각해보면, 저는 언제나 문구를 좋아해왔는데 그걸 관통할 단어를 찾지 못해서 좌절했던 것 같아요. 저를 표현할 말이 없다는 데 조급해지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언젠가 생길 텐데 없으면 어때 싶더라고요. 설령 나중에라도 없으면 또 어때요. 급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취향이자 취미인 문구로 책까지 쓴 셈인데 기분이 어땠어요?
노트에 썼던 그림일기를 독립출판으로 선보인 《도쿄규림일기》가 제 첫 책이었는데, 실물을 보고 ‘이게 된다고?’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어요. 사람들에게 제 일기가 읽히고 이렇게 써봐야겠다는 맘이 들도록 했다는 게 재밌게 느껴졌고요. 누군가 써오던 기록물이 지금까지 남아 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주는 것처럼, 꾸준한 제 기록들이 나중에 뭔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상상만으로도 기뻐요.
미래엔 문구점 주인이 되고 싶다는 꿈을 밝히기도 했죠.
문구점 이름도, 로고도 일찌감치 만들어놨어요. 머릿속에서 상상한 제 문구점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그만 공간에 차분한 원목 가구가 채워진 모습이에요. 저희 집이 좀 카오스 상태인데요(웃음). 그래도 “이거 어딨어?” 하면 저는 바로 찾을 수 있는 것처럼, 손님들이 어디에 뭐가 있는지 모를 정도로 혼잡하지만 “이런 건 없나요?” 하면 “그건 여깄죠.” 하면서 냉큼 알려줄 수 있는 문구점이면 좋겠어요.
먼 미래가 아니라 곧 만나볼 수도 있을 것도 같아요.
저는 제가 금방 질리는 타입인 걸 너무 잘 알고 있거든요. 그래서 당장 이루어질 일이라곤 생각하지 않아요. 아마 문구로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본 다음이 아닐까요? 우선은 팝업스토어로 경험해보는 것도 재밌겠다고 생각해요. 문구점은 문구점인데 본격적인 문구점은 아니고, 결국 문구점 같지 않은 문구점인 거죠. 먼 훗날 제 문구점을 차릴 결심이 생기기까지 문구라는 건 저의 안전한 취미이자 떠올렸을 때 마냥 기쁘기만 한 영역으로 남겨두고 싶어요. 아직은 문구로 스트레스받고 싶진 않거든요.
전자 제품이 문구의 자릴 대신하면서 문구가 사라지진 않을지 걱정스럽기도 해요.
제가 초등학생 때부터 종이책이 사라질 거란 얘기는 있었지만 그런 예상은 보란 듯이 깨지고 있어요. 문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공부와 일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문구는 계속해서 사용될 거라고 봐요. 결국 누구나 문구에 향수가 있을 수밖에 없고, 사라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단적인 예로 모나미의 153 모델이 새로운 에디션으로 출시됐을 때 다들 반가워했잖아요. 누구나 153을 사용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 경험에서 비롯된 향수라고 생각해요. 결국 훗날에도 우린 또 다른 문구를 사용하며 추억하고 있겠죠. 아무리 전자 제품이 발달해도 문구가 설 자리는 충분할 거예요.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해요. 문구로 또 어떤 재밌는 일을 선보일 계획인가요?
매번 문구, 문구 하고 있지만, 저는 문구뿐 아니라 사물 자체에 관심이 많아요. 최근에는 문구에서 뻗어 나간 새로운 콘텐츠에 관심이 가더라고요. 가령, 나이키가 컴포지션 노트를 소재로 신발을 만든 것처럼요. 운동화 표면엔 컴포지션 노트 커버인 마블 패턴을 입히고 신발의 혀 부분엔 컴포지션 노트 내지로 디자인한 제품이었는데, 그런 시도 자체가 너무 좋았어요. 문구가 다른 분야와 컬래버레이션 해서 새로운 걸 만들어내는 데 매력을 느낀 거죠. 저 역시 문구 기획자라고 문구만 만들 필요는 없겠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문구의 무언가를 패턴으로 한 옷이라든지 특정한 책이나 노트만을 위한 가방 등 그 가능성은 무궁무진해요. 그렇게 만들어진 물건이라면 신발이든 가방이든 문구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요? 지류나 필기구도 재미있지만, 문구에 뿌리를 두고 더 멀리 뻗어 나갈 방법을 고민하고 싶어요. 언제나 만들고 싶은 건 너무 많으니까요!
베트남 로컬 브랜드 | 나무 볼펜
“베트남 로컬 브랜드에서 자체 제작한 나무 볼펜이에요. 함께 나이 들어갈 이 멋진 볼펜을 보면 기분이 좋아져요. 형태가 단순하고 소재가 좋으면 오래오래 사용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올해는 특히 가죽과 나무 소재에 빠져 있었죠. 황동과 호두나무로 만들어진 이 볼펜의 숨은 매력은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리필 심이 딱 맞는다는 거예요.”
펜텔 | 사인펜
“두꺼운 필기구를 선호하는 편인데, 그림을 그리거나 글 쓸 때는 항상 이 사인펜만 사용해요. 사용 빈도만 보면 몇 해째 압도적인 1등 같아요.”
모나미 | 빈티지 볼펜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어야 보배라고, 웬만하면 구입한 문구는 전부 사용한다는 주의인데요. 이 오래된 모나미 볼펜은 포장지를 뜯지 않고 두는 게 더 빛나는 느낌이라 새것 상태로 보관하고 있어요. 그야말로 쓸데는 없지만 매일 보면서 흐뭇해하고 있으니 이것도 쓸모라고 할 수 있으려나요?”
Galen Leather | 라이팅 박스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의 라이팅 박스Writing Box에서 모티프를 얻어 체코 브랜드에서 제작한 문구 상자예요. 아끼는 문구를 정리해놓고 한눈에 보기 좋아요. 책상 위에 펼쳐놓으면 보고만 있어도 흐뭇하죠. 그야말로 문구인을 위한 최고의 제품이 아닐까 싶어요. 만일 외딴섬에서 홀로 살아가야 한다면 여기에 좋아하는 문구부터 담을 거예요.”
에디터 이주연
포토그래퍼 Hae R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