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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만 있으면

그것만 있으면

그것만 있으면 두 살 꽃님이가 혼자서도 잘 놀 것 같았다. 엄마엄마엄마, 하루 종일 불러대는 아이가 잠시나마 혼자 놀 것 같았다. 아이의 지능 발달에도 좋을 것 같았다. 없는 집이 없는 그것은 바로 국민 장난감 러닝하우스. 하지만 좁아터진 집에 사들이기에는 덩치가 너무 컸다. 고민하길 몇몇 밤. 결국 샀다. 그리고 나는 커피 한 잔의 여유, 나아가 마음 졸이지 않고 화장실에 다녀올 수 있는 여유를 얻었다. 하지만 당황했다. 물론 꽃님이는 불이 반짝이고 소리가 나는 그것을 좋아하긴 했지만, 나에게 여유를 준 것은 러닝하우스가 아니라 러닝하우스가 들어있던 택배 박스였던 것이다.

커다란 박스는 집이 되기도 하고, 자동차가 되기도 하고, 놀이동산에서 산 고장 난 마술봉과 싹둑싹둑 썰기 놀이를 하는 플라스틱 과일 등 꽃님이의 소중한 것들(이라 쓰고 잡동사니라고 읽는다)을 넣은 보물 상자가 되기도 했다. 종이 먼지가 풀풀 날리는 저 덩치 큰 것을 빨리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아이가 저리도 좋아하니 어쩐담. 그림책 《이건 상자가 아니야》를 읽으며 마음을 달랬다. 《이건 상자가 아니야》의 주인공 토끼도 상자와 놀았다. 

“아기 토끼야. 상자 안에서 뭐해?” “이건 상자가 아니야. 이건 자동차라고.” “아기 토끼야. 상자 위에 올라갔네.” “이건 상자가 아니라니깐. 난 지금 높다란 산꼭대기에 올라온 거야.” 

어른들 눈에는 그저 그런 상자 하나가 아기 토끼에겐 우주선도 되고, 산도 되고, 배도 된다. 아하, 상자를 상자로만 생각하는 어른의 고정관념이 부끄럽다. 그래, 꽃님이도 지금 저 너덜너덜 택배 박스로 자기의 창의력을 마음껏 발휘하는 중이야. 집이 조금 더러워져도 참자. 먼지가 날려도, 힘없이 쓰러지는 박스가 위험해 보여도 참자. 참자! 참다못해 이왕 노는 것, 상자를 깨끗하게 포장해주기로 했다. 무슨 무늬를 할지 또 몇 날 밤을 고심하여 파스텔톤 동물무늬 시트지를 고르고, 커터칼과 자까지 사서 낑낑대며 깨끗하게 박스를 포장했다. 짜잔, 꽃님아 보렴. 엄마는 너의 상상력을 존중하는 멋진 엄마란다. 꽃님이는 박스를 보고 오열했다. “엉엉엉. 내 박스 아니야. 나는 동물 싫어.” 그날 이후, 꽃님이는 박스에 흥미를 잃었고, 다시 엄마엄마엄마를 찾기 시작했다. 

어쩌면 꽃님이가 원했던 것은 ‘비밀’이 아니었을까. 자신을 못 미더워하는 엄마가 도와주고 깔끔하게 정리해준, 갖고 놀기 좋은 장난감이 아니라 이게 뭔지 엄마는 절대 모를, 자신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신비한 그것, ‘비밀’.

《이건 상자가 아니야》의 후속편인 《이건 막대가 아니야》도 꽝 내 머리를 울린 책이다. 《이건 상자가 아니야》와 똑같은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다. 이번에는 꼬마 돼지가 막대를 갖고 논다. 어른은 “막대는 위험하니까 조심해서 갖고 놀아.” 주의를 주지만, 꼬마는 번번이 “이건 막대가 아니야”라고 대답한다. 이건 막대가 아니라 용감한 기사가 쓰는 멋진 칼이야. 이건 막대가 아니라 힘센 역도 선수가 들어 올리는 바벨이지. 이건 그림 그리는 붓이라고! 몇 번 대화를 주고받다가 어른이 이번에는 장단을 맞춰준다. “그래. 알았어. 막대 아니라고 쳐. 누가 어린애들 상상력 넘치는 줄 모를까 봐? 나도 동심이 뭔지 아는 사람이라고. 그거 막대 아니야. 자, 그럼 그건 뭔데?” 

《이건 상자가 아니야》는 둘째 꽃봉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원서로 읽었다. 우리말 책에서는 “이건 나의 꿈의 요술 지팡이야”라고 끝났지만, 원서에서는 살짝 마지막 문장이 다르다.
“It’s not a stick! 막대 아니야.”
“그래. 막대 아닌 거 알아. 그러니까, 뭐냐고.”
“It’s my Not-a-Stick. 이건 ‘막대 아니야’야.” 

영어에서는 이렇게 하이픈으로 단어들을 이어서 하나의 단어로 만들곤 한다. ‘It’s not a stick.’은 ‘이건 막대가 아니야.’라는 뜻이지만, ‘It’s my Not-a-Stick.’은 “이건 내 ‘막대 아니야.’라고 해.” 이 뜻이다. 그러니까, 아이는 막대가 아니라고 말대꾸를 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기의 소중한 것을 소개해주고, 같이 놀자고 한 것이다. “It’s my Not-a-Stick. 이건 내 ‘막대 아니야’야. 뭐든지 내 상상대로 되는 요술 지팡이 같은 거야.”

아이의 말을 이해하는 척 할 게 아니라 진심으로 믿기. 진심으로 받아들이기. 그날 아이에게 영어를 가르치느라 골랐던 책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이 밖에도 그림책이 육아책이 되고, 내 삶의 지침서가 되는 경우는 많다. 2016년 칼데콧 상을 받은 케빈 헹크스의 《조금만 기다려 봐》도 그랬다. 창가에 장난감 다섯이 쪼르륵 모여서 창밖을 보고 있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중이다. 점박이 올빼미는 달을 기다리고, 우산을 쓴 꼬마 돼지는 비를 기다리고, 썰매를 탄 강아지는 눈을 기다리고, 연을 든 아기 곰은 바람을 기다린다. 별토끼는? 그저 창밖을 바라보는 것이 좋다. 그러다 새로운 장난감이 나타난다. 바로 마트료시카 고양이. 마트료시카는 인형 안에 인형이 들어있고, 인형을 열면 그 안에 더 작은 인형이 또 들어있는 러시아 전통 인형이다. 고양이는 네 마리 아기 고양이를 더 품고 있었고, 다들 사랑스러운 아기 고양이들을 보고 웃음 짓는다. 이제 창가의 인형은 모두 열이 되었다. 다 같이 또 창밖을 보면서 기다린다. ‘또 무언가 두근두근 재미있고 행복한 일이 일어나기를.’ 끝.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뭐 어쩌라고? 도대체 얘네는 뭘 기다리는 거야? 눈이 와도 스스로는 꼼짝도 하지 못하는 장난감들인 주제에, 눈을 왜 기다리는 거지? 그림이 예쁘긴 하지만, 평소 케빈 헹크스의 다른 책처럼 유머러스하거나 기발한 것도 아닌데, 이 책이 왜 칼데콧 상을 받은 거지? 그러다 깨달았다. 아. 내가, 그냥 기다리는 마음을 잊어버렸구나. 그저 창밖을 보면서 이 생각 저 생각, 무언가 오지 않아도 상관없이 그저 멍하니, 그러나 싱긋 웃음이 나는 그 여유를 잊어버리고 사는구나. 이 장난감 친구들은 눈이 왔으면 그 눈 속에서 뛰어놀고 썰매를 타고 뭔가를 해서, 온몸으로 ‘소유’해야 비로소 만족하는 나와 다르구나…. 그저 눈을 기다리고, 바라보고, 꿈꾸는 그것만으로도 행복하구나…. 마지막 장면, 창밖으로 너무나 아름다운 장면이 펼쳐지지만, 그렇게 아름다운 나비가 날고 꽃이 피지 않았더라도 이 아이들은 행복했겠구나….
꽃봉이는 처음부터 이 책을 좋아했다. 어느 날 창밖을 보는 꽃봉이에게 물었다. “뭐해?” “기다리는 중이야.” “뭘 기다려?” “몰라. 그냥 기다리는 거야.” 기다리는 꽃봉이는 충분히 행복해 보였다. 부럽다. 어린이.

《이건 상자가 아니야》, 《이건 막대가 아니야》
앙트아네트 포티스 | 베틀북

어른은 아이들의 상상력을 흉내조차 낼 수 없다. 단순한 상자와 막대로 아이들은 드넓은 세상을 만들어낸다. 아이들의 상상 속에서 단순한 선이 입체가 되고, 우주로 확장되는 것을 보며 어른들은 감탄할밖에! 그 상상력을 해치지 않도록 조심할밖에!

앙트아네트 포티스는 《이건 상자가 아니야》로 닥터 수스 상을 받았다. 닥터 수스 상은 읽기를 배우는 단계에서 읽기 좋은 책, 즉 문장이 쉽고 그림과 잘 어울리며 새로운 단어를 익히기 좋은 책에게 주는 상이다. 우리말 책, 영어 책 모두 읽기를 시작한 아이들에게 강력 추천한다.

《조금만 기다려 봐》
케빈 헹크스 | 비룡소

케빈 헹크스는 《내 사랑 뿌뿌》, 《달을 먹은 아기 고양이》에 이어 《조금만 기다려 봐》로 세 번째 칼데콧 상을 받았다. 특히 《조금만 기다려 봐》는 아이와 어른 모두의 마음을 움직인다. 아마 거의 특별한 사건이 없는 이 책이 지루하기만 하다면, 당신은 너무 바쁜 생활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찾아오지 않더라도 설레고 즐거울 수 있다는 삶의 비밀은 느긋함 없이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팔자 편한 소리 하고 있네.” 싶더라도 아이에겐 그 느긋함을 꼭 느끼게 해주자.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지만, 느긋함이야말로 창의력과 두뇌 발달에 꼭 필요한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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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김현지

글 전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