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꿈, 그 사이에서

대전 하면 과학, 과학 하면 ‘엑스포’ 그리고 ‘KAIST’···.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말들에 얽힌, 오래된 흔적을 따라간다. 그 끝에 마주한 건 다름 아닌 꿈이다.

대전엑스포 93’, 가슴 부푼 시절의 기록

“대전엑스포는 인류의 행복을 위한 지구촌 가족들의 지혜와 마음을 한데 모았습니다. 바로 인류 전체의 축전입니다.”
ㅡ 김영삼, 〈대전엑스포 93’ 개회선언문〉 중에서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여전히 개발도상국으로 분류되던 시기, 한국은 88 서울올림픽을 발판 삼아 세계에서 더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선진국으로의 도약을 꿈꿨다. 미래를 향한 설렘과 도전 의식은 1993년 대전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에도 흘러들었다. 1889년 파리만국박람회에 갓과 가마를 출품했던 변방의 작은 나라가, 이제는 전 인류를 한자리에 불러오게 된 것이다.
엑스포는 인류의 지난 성취를 돌아보고 다가올 가능성을 엿보는 축제였다. 당시 대전엑스포 93’의 주제는 ‘새로운 도약으로의 길’. 지난 30년의 경제 발전을 기념하면서, 21세기 선진국으로 나아가겠다는 포부가 담겼다. 박람회장 곳곳은 그에 걸맞은 장면으로 가득했다. 선로 위에 떠 있는 자기부상열차와 무공해 전기자동차는 전국 학교에서 모여든 밀레니얼 세대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각국은 국제관에서 자국의 기술과 문화를 보여주었고, 국내외 기업들은 기업관을 통해 미래를 향한 동력을 선보였다.
엑스포가 한국에서 개최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한국은 큰 자신감을 얻었고, 대전은 여러 도시 기반 시설을 새롭게 정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1천만 명이 넘는 방문객이 대전에 다녀간 그 시절, 도시는 다가올 날에 대한 낙관적 미소로 가득했다.

우주에서 온 아기 요정

대전엑스포가 많은 이들에게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까닭은 엑스포의 상징, 아마 ‘꿈돌이’ 덕분일 것이다. 88 서울올림픽 마스코트를 디자인한 한국 디자인 1세대 거장 김현의 손에서 탄생한 이 노랗고 귀여운 생물체는, 사실 백조자리 ‘감필라고 행성’에서 온 아기 도깨비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 그리고 꿈과 희망이라는 키워드를 한국적으로 풀어내기에 요술을 부리는 도깨비만큼 적절한 소재도 없었던 것이다. 세계인을 초청하는 자리라는 점을 감안해 도깨비는 아기 요정이라는 표현으로 정제되었고, 별 더듬이와 몸을 감싼 타원형 띠로 미래적인 분위기를 완성했다.
엑스포 폐막과 함께 잠시 추억 속으로 사라졌던 꿈돌이는 2020년, 최고의 마스코트를 가리는 서바이벌 예능 〈내 꿈은 라이언〉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93년도의 낙관을 기억하는 세대와 그 시절의 유산을 멋지게 여기는 세대가 모두 호응한 결과였다. 대전시는 이를 기회 삼아 마스코트에 새로운 서사를 더했다. 이제 꿈돌이는 아내 ‘꿈순이’와 함께 다둥이 가족을 이룬 ‘꿈씨 패밀리’의 가장이 되어 대전 곳곳을 밝힌다. 대전역에서 얼마 멀지 않은 거리에 자리한 ‘꿈돌이 하우스’에서는 굿즈를 만날 수 있고, 꿈돌이 라면부터 호두과자, 성심당과의 협업으로 마들렌까지 탄생했다. 꿈돌이를 활용한 대전시의 귀엽고 성실한 시도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안녕, 내 이름은 꿈돌이야. 여러분은 지구라는 행성에서 살지? 나는 감필라고 행성에서 살아. 하지만 내가 사는 감필라고 행성은 주로 사막으로 되어 있어. 그래서 모래는 얼마든지 있지만 물은 아주 귀하지. 그리고, 지구에는 해가 하나밖에 없지? 감필라고에는 해가 두 개나 있어. 하나는 노란색, 하나는 파란색이야. 노란 해가 조금 더 크지. 저녁놀 속에 보이는 두 해는 너무, 너무 예뻐!”
ㅡ 박석재, 《꿈돌이의 모험》 중에서

KAIST, 과학의 불모지에서 피어난 희망

“모든 개발도상국은 경제 발전의 원동력을 과학기술에서 찾는다.”
ㅡ 정근모, 〈한국과학원 설립에 관한 조사보고서〉

1969년, 뉴욕공과대학교 교수였던 정근모 박사는 자신의 논문을 품고 미국국제개발처의 문을 두드렸다. 내용은 이러했다. 한국의 우수한 과학기술 인재들이 해외로 유출되어 국가 성장이 저해되고 있고, 이를 막기 위해 수준 높은 연구 교육 기관을 설립해야 한다는 것. 촉망받던 젊은 과학자가 고국의 현실을 담은 문서를 이국의 기관에 건넨 이유는, 미국의 선진 과학 정책을 보고 배우며 가난한 조국을 변화시키겠다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국제개발처 처장 존 해너John Hanner는 취임사에서 “개발도상국에게 물고기를 주는 대신 낚시 방법을 가르칠 것이다.”라고 밝힌 적이 있었다. 정근모 박사는 여기서 기회를 포착했고, 그의 제안을 흥미롭게 여긴 존 해너 처장은 논문을 사업계획서로 발전시켜 볼 것을 제안했다. 이 제안은 훗날 ‘터만 보고서’로 결실을 맺었고, 미국국제개발처의 원조로 서울 홍릉에 ‘한국과학원KAIS’이 세워지는 배경이 된다. 훗날 이곳은 국내 최초 이공계 연구중심 대학 KAIST로 발전한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공업화를 추진하던 한국에서 한국과학원의 설립은 희망의 작은 불꽃이 되었다. 이공계 인재들이 국내에 터를 잡고 연구를 이어가자 산업 현장에서도 활기가 돌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후 1980년대 KAIST는 대전 유성구 대덕연구단지에 있던 ‘한국과학기술대학KIT’과 통합되었고, 1990년대 홍릉에 있던 기반을 완전히 대전으로 옮기면서 세계적인 연구 대학으로 거듭난다.

KAIST는 특히 컴퓨터와 인공지능 분야에서 세계가 주목하는 성과를 거두며 미래의 새로운 모습을 그려가고 있다. 그 눈부신 성취의 시작이, 이제 막 ‘과학 한국’을 꿈꾸기 시작한 작은 나라와 이를 믿었던 사람들에게서 비롯되었다니. 학교가 지나온 50년의 시간이 새삼 뭉클하게 다가온다.
학교가 우뚝 선 대덕연구단지는 과거 복숭아와 포도밭이 가득한 땅이었다. 정부 주도로 대전 유성구 일대에 연구소, 교육 기관이 모여들었고, 그 흐름 속에 터를 옮긴 KAIST는 대덕연구단지의 수많은 연구소와 기업을 잇고 있다. 이제 KAIST는 교육 기관을 넘어 대전을 ‘과학 수도’로 지탱하는 상징으로 기억된다. 대학로의 일상을 가만히 그려본다. 캠퍼스 안에서 이족보행 로봇을 매만지는 학생들의 모습부터, 어은동 창업가 거리에서 새로운 내일을 만들어가는 졸업생들의 분주한 걸음까지. 반복된 실패 속에서 끝내 해답을 찾아내고자 하는 연구원들의 열정도 그곳에 깃들어 있다. 마음껏 상상하고 연구할 수 있도록 닦아온 터전 위에서, KAIST의 시간은 미래를 향해 흐르고 있다.

최초로 기억되는 KAIST의 순간들

1982년

국내 최초 인터넷 SDN 구축

먼 이국으로 전자우편을 보내고, 어디서든 메신저를 주고받는 일상의 뿌리는 40년 전 KAIST의 연구실에 있다. KAIST가 한국 최초로 인터넷 네트워크를 만들기 전, 컴퓨터는 그 기계 안에서만 작동하는 계산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SDN이 구축되면서 멀리 떨어진 컴퓨터들이 거대한 그물망처럼 연결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한국은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독자적인 인터넷 기술을 확보할 수 있었다.

1992년

한국 인공위성 시대 시작

KAIST 인공위성연구소가 영국 서리대학교와 협력하여 국내 최초 인공위성 우리별 1호 발사에 성공했다. 국내에서 누구도 인공위성에 대해 알지 못하던 시절, 영국에 건너간 젊은 공학도들이 이룬 성과였다. 우리별 1호는 지구 표면을 촬영하거나 지구와 교신하는 등 임무를 수행했다. 이듬해 우리별 2호가, 1999년에는 우리별 3호가 제작됐다.

2004년

휴머노이드 로봇 탄생

‘휴보HUBO’는 KAIST 오준호 교수팀이 개발한 우리나라 최초의 이족보행 휴머노이드 로봇이다. 사람과 악수를 하고, 계단을 오르며, 문을 여는 등의 동작을 할 수 있던 휴보는 10년간 비약적 발전을 거듭했다. 그 결과 2015년, 재난 상황을 가정해 로봇의 한계를 시험하는 세계 최고 권위의 대회에서 NASA와 MIT 등 명망 높은 팀들을 제치고 1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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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차의진

자료 제공 대전광역시, 대전관광공사, KA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