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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정 — 인시즌
바닥으로 떨어진 사과 한 알. 누군가는 그걸 보며 지구의 모든 존재를 아래로 끌어당기는 힘을 발견했다지. 바로 여기, 매년 윤기 나는 나무에서 얻은 사과들을 보며 새로운 발견을 해낸 사람이 또 있다. 연희동과 연남동을 오가며 식료품 브랜드 ‘인시즌In Season’을 꾸려온 김현정 대표는 익숙한 제철 식재료의 면면을 고루 관찰하며, 적절한 방식으로 재가공해 우리 곁에 오래 머물 음식을 만든다. 지금을 살아가기 위해, 흘러가는 시간이 두고 가는 의미를 거머쥐기 위해 그는 부지런히 오늘을 살핀다. 우리는 그 덕에 고소하고도 달큰한 오늘의 맛을 음미할 수 있다.
연남동과 연희동을 오가며 ‘인시즌’을 지켜보던 터라 무척 반가워요. 인시즌의 제철 재료 치즈나 시럽, 판나코타 같은 디저트를 좋아하거든요.
어서 오세요. 저도 두 동네를 오갈 때마다 어라운드 사옥 앞을 곧잘 지나다녀서 이렇게 만나게 되니까 반갑네요. 오시는 길은 괜찮던가요? 어제 내린 눈비가 밤사이에 얼었는지 아침에 길이 너무 미끄럽더라고요. 이거 한 잔씩 드세요. 따듯한 레몬머틀티예요. 이른 아침이니까 연하게 우렸어요.
근황을 찾아보니 맛있는 소식이 들렸어요. 마지막으로 예약된 보늬밤파운드를 오늘 새벽까지 만들었다고요.
맞아요. 지금 사실 좀 몽롱한데요(웃음). 매년 가을 찬 바람이 불 즈음, 인시즌에선 보늬밤파운드를 만들어요. 이번 가을은 작년 10월 30일 새벽, 오븐을 켜는 것부터 시작해서 11월 3일에 첫 번째 예약 주문을 받았죠. 세 달 가까이 만들었으니까 한동안의 일상이 레시피 안에 머무는 것과 같은 거예요. 이제는 만들어 둔 보늬밤조림도 끝이 보이고 가을을 지나 다음 스텝으로 향해야 할 때니까 마무리를 지었어요. 새벽 2시 반쯤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후련하더라고요. 비 내음을 느끼며 안개가 자욱한 길을 걸으니 계절 하나를 잘 끝낸 기분이 들었어요. 재료를 다 쓰고 계절을 보내주는 거죠.
걸음이 날아갈 듯 가뿐하게 느껴졌을 것 같아요. 파운드케이크는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요?
보늬밤은 속껍질째 먹는 밤을 말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리틀 포레스트〉 같은 영화에서 조림을 만드는 모습이 사랑받으면서 많이들 아시죠. 먼저 좋은 밤을 골라 껍질을 벗기고 율피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약불에서 30분씩 일곱 번을 끓여야 해요. 밤에서 우러나는 붉은 물이 흐릿해질 때쯤에 설탕과 간장, 럼을 더해서 졸이고 숙성하면 밤에 맛이 들어요. 인시즌에서 오랫동안 함께 일한 친구가 보늬밤조림을 만들어 두면 후숙을 거친 후에 제가 파운드를 만들죠. 하루이틀 사이에 완성되는 건 아니에요.
어떻게 먹어야 가장 맛있는지 궁금해요.
아주 얇게 잘라서 먹는 걸 추천해요. 파운드가 촘촘하고 묵직한 편이라, 얇게 잘라 먹으면 그 밀도감이 훨씬 직접적으로 느껴지거든요. 가을의 파운드는 이제 다 만들었지만 사람들이 먹는 시점까지 생각한다면 아직 계절을 음미할 수 있는 마지막 시기가 이어지고 있어요. 우리도 남은 양을 조금 보관하다가 그분들과 호흡을 맞추기 위해, ‘이때쯤이면 이런 맛이 우러났겠구나.’ 하며 인스타그램에 언급해요. 뭐든 맛있는 건 같이 먹는 게 기분 좋잖아요.
맞아요. 이외에도 새해를 맞이한 즈음에 만드는 요리가 있을까요?
얼마 전에 금귤 초콜릿을 만들었어요. 그걸 본 분들은 지금 금귤이 제철인가 싶을 텐데, 2-3월이 되어야 나오니까 아직이에요. 저희가 쓴 금귤은 작년에 담근 금귤주에서 건져낸 거죠. 1년 정도 숙성한 술을 이때쯤 마시는데 그 안에 든 금귤을 어떤 식으로든 소진할 수 없을까 고민했어요. 원래 담금주에 들어 있는 원물은 술이 가진 독함을 금세 빨아들이기 때문에 잘 먹지 않지만, 본디 향이 진하고 달큰한 맛을 가진 금귤이라면 알코올의 씁쓸함도 조화롭게 먹을 법하겠다 싶었죠. 적절한 시기에 무언가를 먹으려면 시간을 크게 바라보면서 그 전부터 준비해야 해요. 올해의 금귤 초콜릿을 새해 즈음에 만나게 된 건 작년에 부지런히 담금주를 담은 덕분인 거죠. 초콜릿 한 알을 먹는 그 순간을 위해 잘 준비해 왔다는 증거 같아서 더 맛있었어요.
맛있는 소식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성실하고 부지런한 이야기였네요. 보통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요?
음, 하루의 시작점이란 게 언제일까요?
이런 질문을 한다는 건….
일에 푹 빠져 산다고 생각하셨죠!
(웃음) 밤낮없이 무언가를 하느라 바쁘구나, 생각했어요. 휴식과 일을 크게 구분하지 않는 것처럼요.
재료를 가공식과 식료품으로 만드는 인시즌을 ‘인시즌의 삶By Inseason’이라는 이름으로 바꿔 부르기 시작한 시기가 있어요. 그즈음부터 제 삶이 인시즌의 삶과 같아진 것 같아요. 브랜드를 운영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단순히 제철에 나오는 재료들을 사서 가공하는 일에만 몰두하진 않고요. 좋은 계절이 오면 제 고향인 충주나 제주도 혹은 저 멀리 어느 나라에 이맘때 어떤 재료가 나와 있을까 궁금해져요. 오늘처럼 흐린 날에는 연남동이 어떤 모습일까, 연희동에서는 어떤 느낌을 받을까 늘 생각하게 되고요. 마음속에 분명히 떠오르는 재료가 있다면 밤낮으로 그걸 어떻게 먹어볼지 궁리하는 인시즌의 삶이 재미있어요. 한번은, 같이 일하는 친구가 저한테 취미가 있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취미를 즐길 시간조차 없을 것 같아서요.”라고 하길래 ‘취미’의 의미가 궁금해져서 사전에서 찾아봤죠.
어떤 의미라고 하던가요?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하여 하는 일.”이래요. 푹 숙성된 금귤에 초콜릿을 씌워본 것도, 저쪽 편에 담가둔 식초나 담금주의 상태를 매일 살피는 것도, 팬트리에 채워진 식료품을 확인하고 그중 몇 가지를 요리에 쓰며 기록하는 것도 저에겐 즐기기 위한 행위에 가까워요. 하루 종일 일을 하는 것도 맞지만 한편으로는 취미를 즐기는 도중이기도 한 거죠. 휴식과 일상, 취미와 일을 경계 없이 나아가는 중이에요.
그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는 무얼 해요?
가장 먼저 하는 생각이 뭔 줄 아세요? 오늘 아침에 뭐 먹지(웃음). 아침에 무얼 먹는지에 따라 제 움직임이 달라져요. 집에서 간단한 먹거리를 만들거나 두부를 사러 마트에 가야 하는 경우도 있고,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들고 밖으로 나갈 수도 있잖아요. 오늘은 눈뜨자마자 인시즌으로 와서 따듯한 레몬머틀티를 마시자고 생각했어요.
그 아침을 함께했네요. 연남동 작은 가정집에서 10년간 운영하던 인시즌이 연희동 주민들에게 사랑받는 ‘사러가’ 마트 곁으로 옮겨 왔죠.
연남동 작업실은 온라인 숍만 운영하던 시절부터 머물렀고 틈틈이 문을 열어 레시피 워크숍이나 팝업 판매도 해왔지만 상업적으로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주중에 유동 인구가 적고,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많이 사는 곳이라 이런 식료품을 일상적으로 소비하지 않으시거든요. 제가 홍대나 연남, 연희에서 20년 넘게 살았던 터라 사러가에도 즐겨 가는데요. 그곳에 무엇이 있느냐에 따라 그 곁에 사는 사람들의 끼니가 정해지더라고요. 오늘 좋은 연어를 팔고 있다면 그날 저녁으로 노릇한 연어 구이나 초밥이 식탁에 올라와요. 최근에는 떡 매대가 생겼는데, 떡을 즐겨 먹지 않아도 오가는 길에 보이니까 괜히 한번 둘러보면서 일상에 메뉴 하나가 추가되었죠. 일차적인 식자재를 파는 사러가 곁에 재료를 새롭게 먹는 법을 안내하는 인시즌이 있다면 지금 무엇을 먹어야 되는지 명확하게 와닿을 것 같았어요. 때마침 알맞은 자리가 생겼길래 손님들을 좀더 가까이 만나는 인시즌의 삶을 열기로 하고, 연남동 공간은 이전처럼 작업실로만 쓰고 있어요.
“지금을 살아가는 것”이라는 소개 문장이 인상 깊었는데, 인시즌의 지금을 알려면 무얼 봐야 하나요?
계절마다 문 앞 레터링을 바꾸고 있어요. 앞서 “가을은 무화과와 황금배의 계절”이라는 문장이었다면 지금은 “겨울은 깊은 밤과 노란 유자의 계절”이죠. 인시즌의 이번 겨울은 밤과 유자를 중심으로 디저트와 저장식을 선보이고 있어요. 공간 한편 팬트리를 보면 한쪽에는 유자, 레몬, 하귤 같은 시트러스 계열의 소금과 그걸 활용해 만든 저장식이나 피클을 두었어요. 치즈와 페스토처럼 식사의 기본이 되는 것들도 있고요. 반대편에는 단맛이 두드러지는 시럽과 넥타, 잼, 디저트가 있는데 음식에 ‘킥’을 더해줄 가공식이에요.
소금이나 치즈 같은 익숙한 이름 앞에 유자와 밤, 레몬, 하귤 같은 재료가 붙어서 특별한 쓰임이 있는 건가 싶었어요.
거꾸로 생각하면 저건 그대로 우리가 익숙하게 쓰는 소금이나 치즈예요. 채소를 절일 때나 간을 맞출 때, 잘 구운 고기를 먹을 때 소금을 쓰듯 똑같이 사용하면 돼요. 손님들이 오시면 “이 소금 어떻게 써요?”, “이런 치즈는 어떻게 먹어야 맛있어요?”라고 가장 많이들 물어보세요. 그럼 간단한 설명과 함께 우리가 준비한 식사나 브런치 메뉴를 드셔보라고 권해요. 모두 팬트리에 있는 걸 활용한 거라, 인시즌이 소개하는 지금의 맛이 궁금한 분들께 적절한 답이 되거든요. 이 한 접시서 느껴지는 짠맛이나 단맛, 감칠맛 같은 모든 맛은 바로 저 팬트리 안에서 시작된 거죠.
가공식 중 ‘넥타’도 새롭게 느껴졌어요. 원물을 적당히 묽게 만든 주스처럼 보이는데 우유에 넣어도, 치즈나 빵 위에 뿌려 먹어도 맛있었거든요.
혹시… ‘복숭아 넥타’ 들어보셨어요? 어린 분들은 아마 모르실 거예요. 저보다도 위 세대들은 옛날에 펭귄이라는 회사에서 만든 복숭아맛 캔 음료를 즐겨 먹었다고 해요. 어머니들이 병문안 갈 때 사 가는 음료라 한다면 어떤 느낌인지 아시겠죠? 넥타가 사전적 의미로는 ‘꿀’을 말하지만, 원물을 잘라 설탕에 재워서 그대로 먹는 걸 말해요. 자두나 살구, 복숭아처럼 큰 씨앗이 가운데 있는 핵과는 과육이 실타래처럼 풀리는 특징이 있어서 그걸 최대한 부드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도록 가공하는 법이죠. 설명할 때는 잼과 시럽 중간 정도의 물기와 당도라고 하는데, 원물이 그대로 들어가 있으니까 본디 맛이 충실하고 활용도가 높은 편이에요. 다만 보관력은 떨어지기 때문에 단기간에 드셔야 해요.
그러고 보니 재료 하나에 다양한 가공법을 쓰고 있네요. 한 가지 재료로 치즈와 넥타를, 다른 재료와 섞어 또 다른 치즈를 만들거나 시럽이나 소금으로도 만들잖아요.
매번 식사를 위해 열 가지 재료를 살 수는 없잖아요. 한 가지 재료를 열 가지 방법으로 먹는 게 제게는 중요한 삶의 방식이에요. 저기 팬트리에 있는 단호박 피클 보이세요? 얼마 전엔 이 피클을 어떻게 먹어볼까 생각하다가, 피클액이랑 살짝 갈아서 메인 메뉴에 소스처럼 곁들였어요. 다음 날엔 거기다가 삶은 병아리콩을 넣고 함께 갈았더니 후무스가 되었고요. 피클을 다 먹고 남은 액은 드레싱으로도 좋고 소면을 삶아서 적셔 먹으면 정말 맛있어요. 그런데 모두가 이런 삶을 살긴 힘들죠. 분주한 일상을 사느라 새롭게 먹을 방법을 고민할 시간도 부족하고, 요리에 소질이나 흥미가 없는 경우도 있고요. 그렇게 할 수 없는 부분을 채워주는 게 우리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피클 하나에도 이렇게나 많은 쓰임이 있네요. ‘오병이어五餠二魚’라고 하던가요? 갑자기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였다는 이야기가 떠오르네요. 대표님이라면… 가능할 것 같아요(웃음).
어머나, 그런가요(웃음)? 이렇다 보니까 더더욱 우리에게 같은 계절은 없어요. 주요한 소재는 같아도 저와 인시즌의 삶이 보여주는 결과들은 그때의 생각을 따라 매번 달라져요.
식재료를 다루는 일이나 나의 끼니를 챙기는 행위를 본래부터 친근하게 여겼는지 궁금해져요.
그렇진 않아요. 대학 시절, 혼자 서울로 올라와 자취할 때부터 관심이 생겼어요. 그때 나의 삶에서 요리를 안 할 수는 없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매번 새로운 음식점을 찾을 수가 없다 보니 한 동네에 오래 살면 먹는 음식이 늘 비슷해요. 그리고 사 먹는 음식의 한계치는 명확하니까 계속 소비적인 식사를 하기보단 무엇이라도 만들어 먹어야겠다고 생각했죠. 과일이나 야채를 조금씩 사서 샐러드를 해 먹거나 끼니를 간단히 챙겨 먹곤 했어요. 디저트는 그다지 선호하는 편은 아니었고요.
미식, 과식, 소식이나 절식… 먹는 유형을 구분하는 말이 참 많은데 대표님은 어디에 가까운가요?
요리가 그랬듯 원래부터 음식을 즐기는 사람도 아니었거든요.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만 먹으면 충분하다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인시즌의 삶을 살면서부터는 무엇 하나 먹을 때도 어떻게 하면 더 맛있게 먹을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고민하니까 완전히 달라졌어요. 맛있게 먹는 법을 터득하면서 자연스레 식사량도 늘고 먹는 일도 재미있게 느껴져요. 새로운 표현을 지어 보자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식’이라고 할까요?
디자인을 공부하던 대학원 시절, 졸업 논문에서부터 인시즌이 시작된 거라고 들었는데요. 좀더 자세히 듣고 싶어요.
브랜드를 기획하고 성장시키는 방법에 관한 논문을 써야 했는데, 가까운 주변에서 소재를 찾아보고 싶었어요. 제 고향인 충주에서는 사과가 유명해요. 친척들이 사과 농원을 하셔서 때가 되면 집에 한가득 도착하니까 어릴 때부터 사과를 되게 익숙하게 여기면서 자랐거든요. 그런데 서울로 대학을 온 후 마트에 가니까 과일을 개당 가격으로 파는 거예요. 너무 놀랐어요. 흔하게 바라보던 사과가 여기서는 다르게 소비된다는 사실을 그제야 체감했죠. 농촌에서 잘 자란 제철 먹거리를 도시에서 소비하는 방법에 대해 논문을 쓰기로 결정하고 당시 동업자와 함께 인시즌의 기틀을 잡았어요. 같은 기획으로 창업공모전에 참여해서 대상을 받았고, 그 상금으로 인시즌을 시작한 거예요.
때가 되면 농원에서 한아름 도착하던 사과 맛은 어땠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고향의 사과가 여기서 사 먹는 것보다 특별하게 더 맛있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사러가 마트에서 파는 사과 엄청 맛있거든요(웃음). 그런데 농원에 직접 가서 보고 먹으면 더 맛있게 느껴져요. 그건 재료보다도 환경이 주는 힘이에요. 나한테 한 알을 내어준 사과나무가 눈앞에 있고, 그 나무를 애지중지하며 키운 사람이 곁에 있는 그 공기와 공간에서 받는 에너지는 평범한 사과 한 알을 훨씬 달게 만들어 주거든요. 내가 먹는 게 어디서 온 건지 알게 되었으니까요. 물론 지금 같은 시대에 모두가 그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알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만 아주 살짝이라도, 식재료의 제철과 나고 자란 환경을 살짝이라도 경험해 본다면 분명히 맛이 다를 거예요.
지금까지 이야기를 듣다 보니, 대표님에게 식재료는 시야를 넓혀준 계기이자 영감의 원천 같아요.
맞아요. 요리를 어떤 셰프님이나 학교를 다니며 얻은 지식으로 해온 게 아니라 재료를 향한 저만의 관찰과 기록에서부터 시작했어요. 2011년에 인시즌을 시작했으니까 올해로 15년이 되었는데, 맨 처음 떠올린 가공식이 사과잼이었거든요. 어릴 때부터 늘 풍족하던 사과로 만든 엄마의 잼을 먹으며 자랐지만 잼이라는 가공식품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다 보니, 만드는 법을 배워야겠다는 생각보다 ‘그렇다면 맛있는 잼은 뭘까? 내가 생각하는 적절한 잼은 뭘까?’라는 생각을 먼저 했어요. 호기심에서 시작된 질문으로 한 가지 가공 방식을 이해했다면 이것저것 재료를 대입해 보며 나만이 보여줄 수 있는 레시피에 대해 공부한 기간이 길어요. 15년 중 10년은 그런 과정을 거듭하는, 나만의 팬트리를 채워가는 시간이었어요.
음식에는 다른 이를 생각하는 마음이 섞일 때가 있잖아요. 먹는 사람을 떠올리면서 한다면요. 인시즌의 요리 중에 그런 게 있을까요?
계절마다 인시즌의 식료품이나 음식을 하나의 박스로 조합해서 손님들에게 판매하고 있어요. 곳간에 그 계절을 날 식량을 채우는 느낌으로요. ‘12월의 박스’에는 유자화이트초콜릿과 유자연어소보로, 바질 페스토 등을 담았는데 엄마를 떠올리면서 준비한 거예요. 어느 날, 엄마랑 통화하는데 갑자기 요리가 하기 싫대요. 손주 돌봐주시던 것도 올해부터는 못 하겠다면서요. 이유를 물으니 나이가 들면서 손에 힘이 점점 빠지니까 재료를 집거나 칼질 하는 게 어렵고, 손주에게 밥을 해줘야 하는데 어린아이에게 맞춰 식단을 만드는 게 너무 힘들다는 거예요. 오늘 당신이 무얼 먹을지도 모르겠는데 이 아이가 뭘 좋아하는지는 더 어렵다면서요. 그 이야기를 듣고 엄마의 가벼운 한 끼를 챙길 만한 것들로 상자를 채우기 시작했죠. 페스토는 한 숟갈 듬뿍 퍼서 밥에 비벼 먹거나 빵에 발라 먹기 좋고, 연어를 잘게 부셔둔 소보로는 달걀프라이에 넣거나 마찬가지로 밥 위에 얹으면 맛있어요. 달달한 게 당길 때는 크래커에 초콜릿만 발라 먹어도 충분하고요. 엄마뿐 아니라 끼니를 챙길 에너지를 잃은 사람들이 보다 간편하고 편안한 시간을 누리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어요.
생각해 보면 우리는 상대의 끼니를 챙기며 마음을 표현하는 것 같아요. 밥 잘 먹고 다니냐며 묻는 말엔 상대의 안부를 확인하는 마음을 담고, 보고 싶은 사람에게는 꼭 식사 한번 하자고 말하잖아요.
그러게요. 생각해 보니까 정말 많네.
심지어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면서 말린다는 말도 있어요! 왜 그럴까 이유를 생각해 본 적 있나요?
인시즌에서 같이 일하는 친구들이 저보다 열 살은 어린데, 어느 날은 제가 그 친구들을 볼 때마다 “밥 먹었어?”라고 물어본다는 걸 깨달았어요. 옛날에는 그런 말 잘 하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친구들만 보면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거예요. 이유를 생각해 보니까, 오늘 하루에 무얼 하든 밥도 안 먹었으면 안 되지 않나 싶은 거였어요. 다른 건 제쳐두고 일단 끼니를 먼저 챙기자는 마음이요. 우리는 먹으면서 힘을 얻잖아요. 끼니를 잊지 않고 챙겨 먹는 순간이 한 사람에게 주어진 하루의 시작점이라고 늘 느껴요. 다들 그래서 묻는 게 아닐까요?
상대가 하루를 무탈하게 보내길 바라는 애정에서 비롯된 거네요. 문득 대표님에게 좋은 식사란 무엇인지 묻고 싶어져요.
저는 식사 이야기를 할 때 ‘적절하다’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요. 자신의 면면을 살피고 그때마다 필요한 것을 적절히 처방하는 게 저한테는 충분한 식사예요. 적절하다는 걸 따지려면 여러 조건이 있고 그건 꽤 개인적인 요소일 텐데요. 제철이나 식사 시간 외에도 날씨와 오늘의 일과, 기분 같은 것도 될 수 있어요. 어떤 장소인지도 마찬가지고요.
평소 식습관도 중요할 것 같아요.
그럼요. 한 가지 에피소드가 떠올랐어요. 이젠 저도 혼자 산 기간이 훨씬 길다 보니 엄마가 해준 밥이 그리움처럼 느껴지는데요. 고등학교 때까지 그 밥을 먹었지만 대학에 가고 또 인시즌을 이끌면서 제 식단은 굉장히 달라졌어요. 엄마가 준비한 식사는 늘 맛있고 그립고 먹는 순간 행복하지만 때로는 소화가 정말 안돼요(웃음). 그건 엄마의 마음이 나쁘거나 내가 무심해서가 아니라 이미 서로의 삶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죠. 평소에는 한두 끼만 챙기면서 명절에는 하루 세 번, 부모님이 한가득 만들어 준 식사를 먹으면 속이 불편할 수밖에 없는데 그럼 연남동 작업실에 돌아와서 커피 한 잔 내려 마셔요. 그때 속이 딱 풀리거든요. 그리고 또 후회하죠. 아, 엄마가 호박전 더 싸준다고 할 때 말리지 말걸, 그거 정말 맛있는데 하면서.
속이 풀리니까 더 먹을 걸 아쉬워지는 그 맘, 정말 잘 알아요(웃음). 인시즌은 지금을 말하는 브랜드잖아요. 대표님에게 놓치기 싫은 지금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브랜드의 입을 빌려 “지금을 살아가는 것”이라 말한 건 딱 그 시점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에요. 과거부터 현재 그리고 앞으로 흘러가는 시간에 대해 충실한 마음가짐을 말한 거죠. 얼마 전에 인상 깊게 본 말이 떠오르는데, 정확하진 않아서 예로 들어볼게요. 어떤 사람이 젊은 날에 파리를 가보지 못한 게 너무나 후회되는데, 그 이유가 당장이라도 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이제는 더 이상 가고 싶지 않기 때문이래요. 지금의 내가 아니라 그때의 나만이 만들 수 있는 의미가 있다는 거죠. 그 순간에만 가능한 걸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 않아요. 지금 저희가 마신 이 차도 오늘 먹는 것과 내일 먹는 게 꽤 다를 테고, 차를 마시는 저부터도 자고 나면 변할 수 있어요. 모든 것이 계속 변하는 와중에 그걸 전부 붙잡아야 된다는 욕심이 아니라, 최소한 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건 꼭 거머쥐면 좋겠어요.
그래서 어젯밤 파운드를 다 만들었을 때 기분 좋은 후련함을 느꼈나 봐요. 앞으로 인시즌의 부엌에서 바라는 모습이 있다면요?
사실 처음부터 생각하고 있는 바람이 하나 있는데요. 어느 나라, 어느 곳에 가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게 인시즌을 통해 궁극적으로 얻고 싶은 결과예요. 어디에나 재료는 있고 먹는다는 행위도 있고, 사람 사는 건 크게 다르지 않잖아요. 먹는 행위에서부터 사람의 삶은 시작되고요. 그래서 인시즌을 함께 지키는 친구들에게 슬쩍슬쩍 물어봐요. “평생 나랑 일해줄래?”
잠깐만요. 그건 프러포즈 아닌가요?
어딜 가든 제가 잼이라도 만들어서 파머스 마켓에서 팔 수 있다고 꼬드기는 거예요(웃음). 그것뿐이겠어요? 아프리카에 가면 사탕수수를 베어다가 요리해 먹고, 알래스카에 가면 낚시로 물고기 잡아다가 염장을 해보면 되죠! 인시즌을 한다는 건 죽을 때까지 어디 가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큰 무기를 얻은 것과도 같아요. 어느 날, 이곳에서의 일과는 끝날지도 모르잖아요. 하지만 인시즌의 삶은 멈추지 않을 거예요. 훗날 어딘가에 떨어져서 어떠한 환경을 마주하더라도, 결국 내가 살아낼 삶의 모습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앞으로의 인시즌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네요. 다른 계절보다 겨울에는 비교적 식재료가 빈약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맘때 즐겨 쓰는 재료는 뭘까요?
2월은 조금 애매하게 느낄 만해요. 한겨울에 만든 걸 소비하면서 식재료가 풍성하게 나오는 3월을 기다리는 시기잖아요. 갈무리의 달과도 같죠. 인시즌에선 생강으로 만든 저장식을 정리하기 위해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먹거리를 준비해요. 생강이 갓 나올 때쯤 만든 진저 시럽으로 그래놀라와 진저 쿠키를, 잼으로 호두 정과를 만들어요. 저장식을 꾸리는 데 쓰인 생강은 편으로 썬 후 초콜릿을 입히는데요. 2월에 제주 농가에서 레몬이 올라오면 레몬 제스트를 초콜릿 위에 살짝 뿌려요. 그간의 세월들을 넘어오며 만든 두 계절과 두 재료의 절묘한 만남이에요. 꼭 드시러 오세요.
약속할게요. 오늘 대화에 앞서 요리 한 가지를 부탁했는데요. 그것도 간단하게 설명해 주실래요?
여러 가지 먹거리를 한 접시에 담아낸 ‘바이 인시즌 플레이트’를 고르셨죠? 다양한 저장식을 한꺼번에 맛볼 수 있는 든든한 메뉴라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데요. 접시 중앙에는 유자 치즈를 듬뿍 퍼서 덜어두고 홀그레인 머스터드와 레몬 소금으로 담근 당근 라페, 루바브 피클을 올린 문어 세비체를 접시에 담아요. 문어를 초절임한 세비체에는 황금배로 만든 배유자잼을 넣었는데 새콤한 피클과 함께 입맛을 돋우죠. 거기다 하귤간장소스에 조린 닭 안심과 앤초비를 넣어 만든 타프나드에 구운 감자, 하귤 소금으로 구운 파프리카를 쿠스쿠스와 곁들일게요.
인시즌의 계절로 채워진 한 그릇이네요. 고소하고 달큰하면서도 새콤할 것 같아서 듣기만 해도 군침이 돌아요.
도토리와 메밀로 만든 토르티야를 곁들여 드릴 테니 재료 몇 가지를 얹어 꼭 싸 먹어보세요. 그럼 요리를 시작해 볼까요?
1. 진저 시럽
국내산 생강으로 만든 시럽입니다. 생강은 고유의 알싸한 매운맛으로 먹는 이의 체온을 따듯하게 올려줘요. 인시즌의 진저 시럽은 첨가물을 일체 넣지 않고 사탕수수 본연의 풍미가 살아 있는 비정제 설탕을 넣어 진하게 끓여낸답니다. 음료로 마시거나 베이킹, 요리에 적절히 더하면 좋아요.
2. 단호박 피클
피클은 늘 사랑받는 곁들임 저장식입니다. 특히 뜨끈한 국물과 따듯한 음식을 마주하는 지금의 계절이라면 시원하면서도 상큼한 피클은 맛의 균형을 맞추기에 좋은 도구가 되어줘요. 특별한 향신료로 맛을 낸 단호박 피클은 카나페나 파스타에도, 화이트 와인이나 맥주에 곁들이기에도 더할 나위 없이 좋답니다.
3. 레몬 소금
레몬을 껍질째 소금에 절인 뒤 일정 시간 숙성해 통째로 갈아 쓰는 이 조미료는 시트러스 향을 가득 담아 독특한 감칠맛을 품고 있습니다. 고기의 밑간용으로 쓴다면 간을 맞추는 것과 동시에 잡내를 잡아주기도 해요. 신선한 제철 재료에 가볍게 소금만 더해도 충분히 훌륭한 요리가 완성된답니다.
4. 유자 치즈
숨겨진 노란 맛의 즐거움을 담은 시트러스 치즈입니다. 도화지 같은 맛이기에 시럽이나 잼을 곁들어도 충분히 맛있어요. 인시즌의 치즈가 처음이라면, 첫 입은 치즈만 먹어보면서 고유한 풍미를 느껴보시길 바라요. 그 다음엔 빵이나 통밀 씨앗 크래커에 듬뿍 얹어 먹는 걸 추천할게요.
에디터 이명주
포토그래퍼 최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