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리 육개장을 먹으며 생각한 것

뜻밖의 다정함

넷플릭스 〈흑백요리사〉에서 어느 셰프가 말했다. “주방에서 셰프보다 더 높은 게 있어요. 재료죠.” 그렇지, 재료지. 언제나 가장 높은 건 재료다.

고사리 육개장

서울이나 부산 등 접근성이 좋은 도시에 살 땐 잘 느끼지 못했다가 제주 섬에 살며 체감한 것 중 하나는, 음식은 결국 재료라는 사실이다. 제주도는 한반도 가장 남쪽에 있어 평균 기온이 높은 반면, 바람이 강하고 돌이 많아 농사를 짓기 척박한 환경이다. 물이 잘 빠지는 토양이라 논농사도 잘 안된다. 이건 따로 찾아보지 않아도 제주도에서 조금만 살아보면 알게 되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이 거친 땅 위에서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살아왔다. 여행객은 제주의 식재료를 그저 특산물 중 하나로 여기겠지만 이 지역에서 재료는 생존의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종종 어떤 제주 음식을 먹을 때면, 제주의 과거와 현재를 통째로 먹는 기분이 든다. 

제주 곳곳에서 흔하게 나는 재료를 활용해 일상적으로 먹는 현지 음식이면서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음식은 고사리 육개장이다. 제주에서 살기 전에도 육개장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드라마에서 장례식장 장면이 나오면, ‘아 육개장 맛있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제주에서 파는 고사리 육개장도 당연히 그 비슷한 음식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10여 년 전 제주에서 처음 먹어본 고사리 육개장은 그동안 흔히 먹던 붉은빛 얼큰한 국물이 아닌 진한 회색의 걸쭉한 음식이었다. 칙칙한 회색빛 음식이라니, 이게 정말 맛이 있을까, 하나도 기대되지 않았는데, 한 숟가락 먹고 눈이 똥그래졌다. 이게 뭐라고? 메뉴판을 다시 살펴봤다. 

돼지고기와 고사리를 각각 푹 삶은 뒤, 돼지고기는 찢고 고사리는 으깨 고춧가루 등 양념을 넣고 버무린 다음 돼지 잡뼈로 오래 우려낸 육수에 넣고 함께 끓이다 메밀가루를 추가해 걸쭉하게 만드는 것이 제주만의 육개장이다. 회색빛이 나는 건 메밀 때문이다. 고사리도 돼지고기도 모두 잘게 찢고 으깬 뒤 오래 끓여 식감이 부드럽다. 무엇이 고기인지 고사리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씹을 필요도 없이 죽처럼 술술 넘어간다. 나는 육개장 따로 밥 따로 먹다가, 절반쯤 남았을 때 밥을 넣고 말아 먹는 걸 좋아한다. 밥이 들어갔을 때 국이 조금 더 걸쭉해지는데, 그러면 ‘말았다’기보다 ‘비볐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은 모양새가 된다. 밥알과 고사리와 돼지고기가 한데 어우러진 맛이 또 일품이다. 뚝배기를 기울여 마지막 한 숟가락까지 싹싹 긁어 먹는다. 아, 맛 좋다. 잘 먹었습니다.

메밀과 고사리

이효석 소설 〈메밀꽃 필 무렵〉 때문인가 대부분 ‘메밀’의 주 생산지가 강원도인 줄 알지만, 사실 메밀이 가장 많이 나는 곳은 제주도로 전국 메밀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기후의 영향을 받지 않고, 어떤 환경의 땅에서나 재배가 가능해 대표적인 구황작물로 꼽히는 메밀은 척박한 제주 땅에서도 잘 자라 주었다. 덕분에 이곳에는 메밀을 활용한 음식이 많다. 얇게 부친 메밀전병에 간을 한 무를 넣고 만 빙떡은 제주 향토 음식으로, 요즘은 제주의 시장 곳곳에서 길거리 음식으로 판매한다. 무, 미역 등에 메밀가루를 넣고 푹 끓인 메밀 조배기는 산모들이 아이를 낳고 나서 먹는 음식이었다고 한다. 몸국이나 접짝뼈국 등 메밀을 넣어 뭉근하게 끓인 국도 흔하게 먹는다. 이처럼 메밀은 오래전부터 제주 사람들의 배를 든든하게 채워준 고마운 식재료다. 게다가 메밀은 봄과 가을 농사가 가능해 일 년에 두 번이나 수확할 수 있다. 

고사리는 더 고맙다. 제주에선 매년 4월이면 아무 땅에서나 고사리가 매일매일 끝도 없이 새로 난다. 사실 아무 데서나 자라는 건 아니고, 주로 제주 중산간 곶자왈 근처 습한 들판에서 난다. 고사리가 고마운 이유는, 사 먹지 않아도 내가 직접 들판에서 꺾어 먹을 수 있는 식재료 중 하나라는 점이다. 땅도 필요 없다. 부자고 가난하고 나이가 많고 적고 상관없이 봄이면 누구나 산으로 들로 고사리를 꺾으러 나간다. 모두가 똑같이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주머니가 커다란 앞치마를 두르고 들판에서 허리를 숙이고 가시덤불 사이로 손을 넣어 고사리를 꺾는다. 땅이 없는 사람도 땅을 많이 가진 사람도 똑같이 허리를 숙인 만큼 고사리를 집으로 가져간다. 분명 어제 다 꺾었는데, 다음 날 가면 다시 우후죽순 고사리가 자라있다. 마법 같다. 하나하나 꺾다 보면 어느새 가방에 고사리가 가득하다. 보통 한바탕 삶은 다음 햇볕에 말려 일 년 내내 저장해두는데, 제주 사람들은 주로 말리지 않고 삶은 채로 소분해 냉동실에 보관해서 먹는다.

재료 소진

〈흑백요리사〉에서 셰프가 “주방에서 셰프보다 더 높은 게 있어요. 재료죠.”라고 말하고 메뉴를 정하기 전에 재료부터 챙겨 올 때, 저 셰프 참 영리하네, 깔깔 웃다가 생각했다. 어쩌면 글쓰기에서도 작가보다 더 높은 건 재료일지 모르겠다고. 웃음이 쏙 들어간다. 웃을 일이 아니다. 재료가 좋은 글이 가장 좋다. 그래서 자주 생각한다. 에세이는 인생에 딱 한 번, 한 번이면 족할지도 모른다. 조승리 작가의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와 이순자 작가의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 고경애 작가의 《그날은 그렇게 왔다》 같은 책들을 읽다 보면 그런 생각은 확신이 된다. 미천한 경험을 다닥다닥 긁어서 여러 권의 에세이로 나눠 낸 나는 이미 글렀다. 

10년 넘게 에세이를 썼다. 첫 책은 남미 여행기였다. 이어 제주도 이주민 인터뷰집을 출간했고, 바르셀로나 생활기를 썼고, 최근에는 제주의 마을에 대한 책을 냈다. 모두 내가 두 발로 딛고 사는 곳에서 몸으로 부딪치고 경험한 것들을 기반으로 한 글이다. 물론 책이 되지 않은 글이 훨씬 더 많다. 10년 동안 쉬지 않고 글을 쓰는 동안 언제부턴가 밖에 나가서 걷는 시간보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훨씬 길어졌다. 새로운 재료 없이 있는 재료로 글을 써야 하는 일이 많아졌단 얘기다. 

그럴 줄 알고 어느 한 때 뚜벅뚜벅 두 발로 걸어 구해둔 풍성한 재료들을 햇볕에 바싹 말리고 소분해 꽁꽁 얼려두었다. 말린 건 잘 불려 쓰고 얼린 건 잘 녹여 썼다. 가끔은 녹은 걸 다시 얼려 모른 척 또 쓰기도 하고, 조금 남은 것에 물을 부어 오래 다시 끓이기도 했다. 

어떤 재료는 오래 묵혀도 쓸 만했다. 묵을수록 좋은 것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재료는 신선한 게 좋다. 무엇에 좋냐면, 그 재료로 글을 쓰는 나한테 좋다. 그렇지만 늘 신선한 재료를 구할 수 있는 건 아니어서 대체로 저장해 둔 재료들로 그냥저냥 먹고 살았다.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그런데 가끔 물린다. 하지만 내 글의 셰프는 나라서, 셰프를 바꿀 순 없다. 그렇다면 재료를 바꿔야 새로운 요리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재료는 어디서 팔지? 셰프는 재료를 돈을 주고 살 수 있지만, 작가는 재료를 돈 주고도 살 수 없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하면 길을 잃어버린 아이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비 온 다음 날 여기저기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있는 고사리처럼, 척박한 들판에서 거침없이 피는 메밀꽃처럼 할 이야기가 많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식재료가 넘쳐나는 재래시장 같던 하루도 떠올린다. 이러다 한 글자도 더 쓰지 못하면 어쩌지. 다시 나가 멀리까지 걸어볼까? 하지만 집엔 열 살이 훌쩍 넘은 고양이가 있는걸. 매일매일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해야 할 일도 많은걸. 그렇다면 오래 묵은 딱지를 떼야 하나. 하지만 딱지를 떼다 피가 날까 봐 주저한다. 피가 그치지 않을 수도 있으니 그건 안 될 것 같다. 혹시나 얼려두고 잊은 재료는 없나 냉장고를 수도 없이 열었다 닫는다.

다음 요리

재료가 소진되었다며 기가 죽어 있던 나에게 누군가 자기는 매일 똑같은 걸 먹어도 집밥이 좋다고 말해주었다. 제주 사람들은 메밀과 무로 빙떡이라는 슴슴하지만 놀라운 음식을 만들고, 국에 메밀가루를 풀어 포만감을 준다. 제주에서 흔한 재료를 넣고 끓인 고사리 육개장은 여행객들이 줄 서서 사 먹는 특별한 음식이 되었다. 재료를 구하러 떠날 수 없다면, 나의 조리법을 바꿀 수밖에. 그래서 뭘 하고 있냐면, 조금 느닷없는 결론이지만, 요즘 나는 글쓰기 공부를 하고 있다. 돌아보니 한 번도 따로 글쓰기를 배운 적이 없었다. 내가 배운 모든 글쓰기는 읽기에서 왔다. 그래서 처음으로 돌아가 생전 읽어보지 않던 분야의 책을 읽는다. 그리고 써본 적 없는 방식으로 글 쓰는 연습을 하고 있다. 셰프를 바꿀 순 없지만 칼날을 더 날카롭게 갈 순 있다. 써보지 않은 재료를 활용해 보는 용기도 낼 수 있고, 재료에 대해 더 깊게 이해한 뒤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은 조리법으로 요리를 해볼 수도 있다. 그러다 보면 냉동실 속에 방치된 재료를 살려낼 방법을 찾을지도 모른다. 척박한 나의 땅에서 끝끝내 이야기를 키워낸다면 좋겠다. 아주 오래 걸릴지도 모르지만,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지. 그리고 혹여 글이 되지 않더라도, 상관없단 생각이 든다. 중요한 건 글이 아니라 나라는 재료니까. 오늘도 도서관에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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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정다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