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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이 벗겨진 자리에
칠이 벗겨진 자리에
고민이 없어서 고민인 사람
어느 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내 귀를 의심했다. “왜 난 고민이 없나~ 풍부하지 않고 그럭저럭 살아가니 그러겠지만~ 왜 난 고민이 없나~ 나도 같이 괴로워하고 싶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산울림의 ‘왜 난 고민이 없나?’라는 곡이었다. ‘고민이 없어 고민이라니….’ 철딱서니 없는 목소리로 불평하듯 내지르는 보컬이 딱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어릴 때부터 친구들은 나에게 고민이 없어 보인다는 말을 자주 했다. 모든 소년이 어른을 향해 달려가는 이 중요한 시기에 고민이 없어 보인다는 말은 정말 듣고 싶지 않은, 아니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다. 칭찬인 건지, 한심해 보였던 건지, 그들이 어떤 의도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에겐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라는 뜻으로만 들려 어딘가 찔리는 구석이 있었다.
중학교 시절은 하루가 멀다 하고 인간이 진화하는 시기였다. 뒷자리에 앉은 친구들은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졌고, 이제 막 콧수염이 나기 시작한 아이들은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입을 다물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해맑은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심각해 보이는 녀석에게 “너 무슨 고민 있어?” 하고 물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우물 같은 고민이 한두 개 정도는 있어줘야 하는 게 당연한 시기였기에, 그냥 나도 고민이 있는 척, 때때로 밝음을 숨기고 살아가야만 했다. 물론 모두가 겪는 자잘한 고민은 내게도 있었다. ‘쉬는 시간에 숙제를 베낄 것인가, 매점에 갈 것인가?’ ‘성적표를 숨겨놓고 나중에 걸릴 것인가, 스스로 보여주고 빨리 혼날 것인가?’ 매일처럼 반복되던 이 지긋지긋한 고민 속에서도 나는 결코 우수에 찬 눈을 가질 수 없었다.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며 에단 호크처럼 우수에 가득 찬 눈을 가지려면 어느 정도의 시련이 필요한지 가늠할 수 있었다. ‘나도 여드름이 나면 고민이 생기겠지.’ ‘나도 수염이 나면 고민이 생기겠지.’ 이렇게 생각하며 조금 더 성장하기를 기다렸다. 본의 아닌 시련에 슬퍼하는 일이 일어나길 기다렸다. 재수, 삼수, 수능 보는 꿈, 군대, 그리고 군대 가는 꿈…. 다행스럽게도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몇 가지 시련을 만났다. 하지만 우수에 가득 찬 사람, 고뇌하는 사람이 되기엔 상당히 부족한 수준의 시련이었다. 내 몸은 누가 봐도 완전한 어른이 되었기 때문에 내가 어른임을 다른 곳에서 증명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더 이상 활발함을 감추지 않았다. 다 큰 개처럼 활달하게 굴었고, 그럴수록 주변 사람은 더욱 피곤해했고 성가셔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엔 일종의 부재감을 늘 지니고 있었다. 예술을 하는 사람으로서 시련과 고난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느 날 방 안이 붉은색 노을로 불타고 있었다. 노을은 손에 닿는 모든 것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난 그것이 아름다우며, 폭력적이라고 생각했다. 노을의 붉은색은 웬만한 노력으로는 절대 가릴 수 없으며, 덧칠하거나 벗겨낼 수도 없다. 보이는 모든 사물에 스며들어 그것을 자기처럼 만들어버린다. 내가 생각하는 비극의 모습은 이런 것이었다. 불가항력적이고 아름다우며, 모든 것을 지배해버린다. 모든 사람들은 붉은빛 아래서 천천히 익어가고 있다. 운명에 순종하는 사람, 운명에 저항하는 사람 모두 그 자체로서 뜨겁게 빛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의 작품을 보면 기발한 생각이나 복잡한 수식 없이도 빛이 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취미 혹은 자아실현의 도구로 글을 쓰면서 나는 늘 시련의 부재를 겪어왔다. 내 글을 색칠로 비유하자면 노을보다는 벽화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한다. 시련이 없는 사람은 그 자체로서 빛을 발할 수가 없다. 색을 칠하고 또 덧칠하며 언제나 새것인 상태를 유지한다. 창의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유머러스한 상황을 유지한다. 고민이 없는 사람의 눈에서 우수를 찾아볼 수 없는 것처럼, 벽화로 덮인 벽에선 어떤 질감도 느낄 수 없다.
매일 내 방은 이유 없이 붉은색으로 변했다. 어디선가 날아온 빛이 천장을 불그스름하게 물들이면, 몇 분 지나지 않아 내 방은 불이 붙은 것처럼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난 얼마나 둔감한지, 처음 몇 달간은 내 방에서 노을이 지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겨울, 두꺼운 눈 이불이 옆집의 낮은 지붕을 푹신하게 덮어버린 후에야, 비로소 그것이 노을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노을이라고 생각한 붉은빛은 옆집의 주황색 지붕에 반사된 빛이었다. 옆집 주인은 사탕 껍데기처럼 조잡하기 짝이 없는 양철 지붕 위에 붉은색 페인트를 겁나게 처발라놓았다. 그 초라한 지붕에 튕긴 빛이 내 방에 숨어들면 이렇듯 우아한 걸음을 걸었던 것이다.
주인의 허락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빛은 내 방의 모든 것을 만지고 다니며 붉게 물들였다. 하루가 끝나갈 무렵이 되면 지나간 하루에 대한 아쉬움과 뿌듯함이 붉은색으로 밀려왔다. 그리고 완전한 몰입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하찮은 경험일지라도 그것이 다른 사람을 물들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남은 하루를 김밥 꼬투리처럼 대강 매듭짓지 않았다. 내 방의 붉은빛과 함께 오늘을 꼼꼼하고 단단하게 매듭지어 어제로 떠내려 보냈다. 시련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어이 책을 한 권 만들어냈다. 몇 해 전 그렇게 완성한 내 첫 책의 서문엔 이런 문장을 적어 넣었다. ‘매일 내 방을 붉게 물들이는 주황색 지붕에게.’
얼마 전 십여 년째 지나던 골목에서 마음에 드는 벽을 하나 발견했다. 오래전 분홍색 수성페인트를 칠해놓은 콘크리트 벽인데, 시간이 지나 때가 타고 비를 맞으면서 점점 우아한 모양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콘크리트 표면의 실금과 색 바랜 표면이 흡사 사람의 피부조직을 보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패턴을 만들고 있었다. 시련의 부재에도 나름의 질감을 완성한 늙은 벽을 보며 나도 언젠가 저렇게 될 수 있겠지 생각했다.
글·그림 한승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