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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재료의 산책
재료의 산책
요나가 차려준 식탁은 한없이 간소하고 하염없이 깊었다. 속이 빨간 무를 생으로 맛보며 그 알싸함에 눈이 살짝 커졌고 뭉근하게 늘어진 양파를 씹으며 달콤함에 고갤 몇 번쯤 끄덕였다. 혀의 구석구석을 건드리는, 이토록 맛에 충실한 친구들이라니. 어쩌면 모든 건 자연에 가까울 때 진짜 모습을 내보이는지도 모른다. 특별한 비법이 필요 없다는 걸 아는 게 가장 특별한 비법이 아닐까? 그저 굽고 끓이는 것만으로 제철 채소의 참맛을 잔뜩 끌어올린 오늘의 한 상처럼, 언제나의 요나처럼.
햇감자와 햇양파와
햇완두콩을 굽고 끓이다
“팬에 기름을 두르고 으깬 마늘을 올려요. 약불에서 향을 내다가 준비 한 채소들을 넣고 약간 노릇하게 구워줍니다. 소금, 후추도 뿌리고요. 너무 타지 않게 조심하면서 굽다가 다시마 불린 물과 완두콩을 넣고 보글보글 끓이면 완성이에요. 허브를 같이 넣으면 향이 좋아요.”
《어라운드》에서 <재료의 산책>을 연재한 게 벌써 4년 전 일이네요. 그간 어떻게 지냈나요?
별일 없이 잘 지냈어요. 연재를 끝내고 글로 다 하지 못한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어서 ‘재료의 산책’이란 이름으로 팝업 식당을 시작했고, 채소 요리로 이러저러한 일을 하면서 지냈죠. 지금은 홍은동에 공간을 두고 비정기적인 팝업 식당과 요리 관련 워크숍을 비롯해서 크고 작은 일들을 해나가고 있어요. 행사가 없는 날엔 개인 작업실로 사용하고 있고요.
<재료의 산책>은 연재가 끝난 지금도 많은 독자들에게 회자되고 있어요. 처음 연재하던 때를 기억하나요?
그럼요. 요리가 아니어도 좋으니 하고 싶은 걸 하란 말에 고민이 많았거든요. 본격적인 요리 꼭지보다는 에세이와 레시피 중간의 무언가를 떠올렸어요. 책을 스르르 넘겼을 때 다른 기사들과 잘 어우러지는 꼭지이길 바랐고, 제철 재료로 계절감이 드러나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죠. 재료의 산책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건 지금이 어떤 계절인지, 이 계절엔 어떤 재료들이 나오는지였던 것 같아요. 말하자면… 계절 알림 꼭지?
연재의 연장처럼 꾸준히 제철 채소 요리로 활동하고 있는데, 최근엔 환경 문제로 제철 재료라는 말이 무색해진 것 같아요.
시간이 흐를수록 제철 재료의 의미는 점점 더 퇴색될 거예요. 우리나라만 해도 남쪽에선 열대 과일이 나고, 앞으론 더워서 못 살 것 같단 생각이 들 정도로 기온이 높아졌잖아요. 노지 재배를 하는 농가도 많지 않고요. 하지만 제철 음식의 첫걸음은 제철 재료가 제때 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 계절엔 뭐가 나는지 알려고 하는 마음 같아요. 물론 제철 재료가 제때 난다면 좋겠지만, 당장 바꿀 수는 없으니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는 게 중요한 거죠. ‘호박은 이맘때가 제일 맛있는 것 같아.’ 하고 내가 먹는 재료를 의식하는 것. 그러다 보면 마음에 채소 달력이 하나 생길 거예요.
환경 문제에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을 텐데요. 요새 가장 많이 생각하는 이슈는 무엇인가요?
날이 갈수록 환경에 대한 관심은 점점 더 커지는데, 어제는 바다 오염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어요. 바다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오염되고 있어서 아마 천일염도 곧 사라지거나 귀해질 거래요. 사람들이 계속 일회용 플라스틱을 사용한다면 그것들이 썩지 않고 바다에 쌓이면서 소금에도 걸러낼 수 없는 미세 플라스틱이 남아 있게 될 테니까요. 그런 소금을 먹고 살면 우리 몸도 빠르게 망가지겠죠? 하지만 소금 말고도 이미 악화된 자원이 수없이 많아요. 저는 요리라는 수단으로 그런 문제에 계속 질문을 던지고 싶어요. 비관적인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이 지구가 그리 오래 버텨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하지만 우린 이런 시대에 살고 있고 지구는 신호를 보내오니까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을 하면서 그다음으로 넘어가보려고요.
마음이 착잡해졌는데 오늘의 요리를 보니 기분이 전환되네요. 요나 씨의 요리는 꼭 채소로 그리는 그림 같아요. 플레이팅에 영향을 준 사람이나 요리가 있었나요?
아무래도 어린 시절에 보고 자란 것들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특히 엄마에게서요. 엄마가 그릇에 관심이 많고 플레이팅하는 것도 좋아하시거든요. 집에선 뭘 먹든 대충 늘어놓고 먹는 법이 없었어요. 과자를 먹더라도 꼭 그릇에 가지런히 담아서 먹어야 했죠. 귀찮다고 포장만 뜯어서 대충 먹거나 반찬통째 놓고 먹으면 큰일이 났어요(웃음). 항상 신경 써서 식탁을 차리는 엄마를 보고 자랐기 때문에 음식을 어떻게 놓을 건지 한 번 더 생각하며 지내게 된 것 같아요.
주방엔 양면적인 모습이 있는 것 같아요. 따뜻하지만 한편으론 위험하다는 점에서요.
세상에 위험하지 않은 요리는 없어요. 그래서 제 손은 항상 엉망이죠. 조심한다고 하는데도 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나요. 슬라이서로 모과를 썰다가 손가락 살점이 덩어리째 날아가서 응급실에 간 적도 있거든요. 사고는 주로 피곤할 때 일어나기 때문에 늘 컨디션 조절이 중요해요. 요리사의 기분은 음식과 공간에 고스란히 깃드는 법이라서 더욱 주의해야 하죠. 그래서 저는 제 몸과 마음을 정돈하기 위해 매일 집에서 30분씩 요가를 하고 있어요. 요가 하기 힘들 정도로 피곤할 땐 멍하니 있는 시간이라도 가지려고 해요. 마음이 안정되고 컨디션이 좋아야만 사람들에게 시끄럽지 않은 음식을 내어드릴 수 있거든요.
‘시끄럽지 않은 음식’은 어떤 음식들인가요?
지금 먹고 있는 이런 거요(웃음). 오늘 메뉴에서 제가 한 가장 중요한 일은 이 계절에 가장 맛이 좋은 제철 채소를 모으는 거였어요. 그 외엔 특별히 한 게 없죠. 재료 자체가 훌륭하기 때문에 다른 걸 더하지 않아도 멋진 요리가 되거든요. 저는 재료의 성격을 죽이지 않는 요리로 제철 채소의 맛을 알리고 싶어요. 요리하는 데 정답은 없지만 적어도 저는, 요리를 잘한다는 말을 듣기보단 ‘지금은 이런 채소가 맛있어요. 지금은 이런 친구들이 자라는 계절이에요.’라는 말을 건네고 싶어요.
혹시 처음 요리한 날을 기억하나요?
어릴 때부터 해온 일이라 잘 기억나지 않지만 일본에서 처음 일한 건 생각나요. 도쿄에서 미대를 다닐 때 처음 한 아르바이트가 식당이었는데 주방장이 저를 보자마자 이런 말을 했어요. “너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거다.” 중대한 역할이 저에게 주어진 것 같아 사명감이 생겼고, 그게 어쩐지 뿌듯했어요. 그의 말을 기억하면서 요리할 때마다 약간의 긴장감을 가지려고 해요. 치명적인 독을 제거하지 않아서, 상한 재료를 써서, 위생에 소홀히 해서… 잠깐의 부주의로도 큰 사고가 생길 수 있다는 걸 늘 염두에 두죠.
일본 생활에서 영향받은 부분이 많은 것 같아요.
그럼요. 혼자 지내면서 스스로 밥을 해 먹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고, 식습관이 바뀐 것도 일본에서였거든요. 저는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자극적인 음식을 좋아했어요. 아귀찜이나 떡볶이 같은 걸 먹을 땐 제일 매운 옵션을 골랐고, 국이나 찌개에도 소금을 왕창 넣어 먹곤 했죠. 위염이 심해서 자극적인 걸 먹으면 데굴데굴 구르는데도 약을 먹어가며 그런 음식들을 즐겼어요. 그런데 일본엔 자극적인 음식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간이 약하고 재료 자체에 집중하는 요리가 많아서 자연스럽게 부담스럽지 않은 음식을 먹으며 지내게 됐어요. 그런데 의외로 그런 음식이 입에 잘 맞더라고요. 그렇게 2-3년을 일본 음식에 길들고 나니 한국에 와서도 자극적인 음식은 못 먹겠더라고요. 신기한 건 미각이 좀더 예민해졌다는 거예요. 자극적인 음식으로 마비되었던 혀의 감각이 이제야 제자리를 찾은 것 같아요. 무엇보다 속이 편하니 마음도 편해졌어요.
섭식장애를 겪었다고 밝히기도 했죠. 그땐 요리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 당시엔 요리가 좀 무서웠어요. 그래서 피하기도 했고요. 엄마를 붙잡고 사람은 왜 밥을 먹어야 하느냐며 울고 그랬는데, 어느 순간 이걸 극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부터 왜 먹어야 하는지,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를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그런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먹는 것에 대해 깊게 생각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저는 섭식장애가 결핍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일본에 갔을 때도 완치되지 않은 상태여서 감정 기복이 크고, 종종 무기력해지기도 했죠. 아르바이트 갈 시간이 되었는데도 상태가 좋지 않아서 ‘가서 잘할 수 있을까?’ 걱정한 적도 많아요. 그래도 마음을 다잡고 식당에 가면, 그곳엔 좋은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들과 대화하고 함께 밥을 먹으면 제가 하던 고민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곤 했죠. 그런 날들이 반복되면서 루틴으로 자리 잡고 나니 제 상태가 어느덧 괜찮아져 있더라고요. 그때 앞으로는 요리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혔어요.
지난한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더 신중하게 요리하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요나 씨의 요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기를 바라나요?
저는 식사가 먹는 순간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팝업 식당 재료의 산책을 이야기하자면, 예약하신 분들은 메뉴를 미리 정하지 않는단 특징 때문에 예약 당일, 혹은 그 전날부터 어떤 음식이 나올까 궁금해할 거예요. 여기까지 걸어서 오는 분도 있고, 버스나 자전거를 타고 오는 분도 있겠죠. 이 주변에 펼쳐진 홍제천을 산책하다 오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저는 그 모든 시간이 식사에 포함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공간을 꾸릴 때도 주변 분위기와 풍경을 충분히 고려해서 결정했어요. 저는 손님들이 여기서 경험한 것들을 오래도록 곱씹길 바라요.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일들, 그러니까 음식을 정성껏 준비하고, 템포가 느린 노래를 고르고, 재료가 궁금해지는 플레이팅을 구상하는 일들을 해요. 제가 정성을 들이는 만큼 손님들도 이 시간을 음미해 주실 거라 믿거든요.
그 마음은 분명히 사람들에게 가닿을 거예요. 앞으로는 또 어떤 모양의 식탁으로 만나볼 수 있을까요?
제 일이지만 계속 바뀌어서 어떤 걸 하게 될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동일본대지진과 이번 코로나19를 겪으면서 목표를 정하는 게 큰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닫기도 했고요. 언제나 가지지도, 버리지도 못해서 꽉 잡고 있던 것들이 있는데 자연이 만든 고비 앞에선 아무것도 아닌 듯 스르르 놓게 되더라고요. 나에게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알게 되는 이런 시간이 어쩌면 모두에게 필요 했던 건 아닐까 싶어요. 제가 차리는 식탁은 앞으로 어떤 요리를 배우고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 같아요. 어쩌다 고기 예찬자가 되어 스테이크 하우스나 치킨집을 하게 될지도 모르고, 요리가 아닌 다른 걸 하게 될 수도 있겠죠.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싶어요. 저는 그저, 지금 이 자리에서 제가 해야 할 것들을 고민하면서 주변 사람들이 잘 지내기 위해 필요한 게 무엇인지 계속해서 살펴보려고요.
에디터 이주연
포토그래퍼 이종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