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를 고향이라 부르는

소설가 강석경

경주를
고향이라 부르는

소설가 강석경

‘경주는 땅이 비어있는 도시’라 했다. 소설가 강석경의 책에서 읽은 그 표현을 내내 생각하며 능을 걸었다. 그녀는 취재 차 경주에 내려왔다가 이 신비로운 도시에 빠져 삶의 터전을 옮겼다. 왜 경주가 그리 좋은지, 무엇을 좇아 이곳에 왔는지 궁금했다. 황남동의 어느 이름 모를 능 앞에서 그녀를 만났다.

interview
소설가 강석경

본질을 찾아
경주에 오다

누군가를 만나러 경주에 오셨다가 살게 되셨다고요. 어떤 점이 그렇게 좋으셨나요?
토우 제작가이자 지금은 돌아가신 윤경렬 선생님을 만나러 왔었죠. 근 30년 전에 선생님을 만나러 경주에 왔을 때, 어렴풋이 어릴 적 경주에 놀러 와서 석굴암에 걸어갔던 기억이 났어요. 선생님께서 신라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는데, 경주가 한국인의 보고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신라의 역사가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내가 알고 있던 한과 슬픔 같은 것이 아니었어요. 선생님도 신라는 ‘밝음’이라고 하셨죠. 그때 일주일 정도 머물렀어요. 한번은 첨성대 부근을 걷는데, 도심 한가운데에 있는 능 풍경이 압도적이었어요. 보통 고분이나 무덤은 교외나 산에 있는데, 경주는 집만 나서면 천오백 년 전 고분이 보여요. 죽은 자와 산 자가 더불어 있는 땅이라 생각했어요. 천오백 년이란 시간을 거치면서 무덤들이 이지러진 부분도 있어요. 무덤이 아니라 마치 자연의 한 부분 같았죠. 그런 모습들이 근원적으로 느껴졌어요. 생명의 순환을 보여주는 것 같아 크게 감동했죠.

언제 경주로 완전히 내려오신 거예요?
1994년에 왔어요. 처음에는 이렇게 오래 머무르려던 생각이 아니었어요. 좋으니까 잠깐만 있어야지 하는 생각이었죠. 원래 소규모 도시를 좋아해요. 경주는 집 문을 나서면 바로 자연과 마주할 수 있어요. 제게는 자연이 중요해요.

《이 고도를 사랑한다》에서도 자연과 땅, 그런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것에 대해서 주로 쓰셨죠.
사람마다 감흥을 느끼는 부분이 다 다르잖아요. 저는 땅에 굉장히 감동해요. 타고난 거 같아요. 경주에 오기 전, 인도에 다녀왔거든요. 거기서도 압도당했어요. 인도는 가는 데마다 죽음을 봐요. 화장하는 문화잖아요. 지금은 경제가 많이 좋아졌지만, 제가 갈 때만 해도 가난한 나라였어요. 그런데도 항상 기도하고, 죽음을 보면서도 너무나 초연한 인도인들의 모습에서 삶의 본질을 본 것 같았어요. 그런 감동을 준 나라가 세 군데인데, 인도와 경주, 그리스예요. 전부 고대 국가잖아요. 고대와 어우러진 공간에 가면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아요.

“도시의 삶이 나를 허기지게 했다.”고 하셨어요. 뿌리의 고향, 근원인 자연을 찾아 경주로 오신 건가요?
몇 년 전에 한 매체에서 ‘내 고향 산책’이라는 주제로 경주 편을 써달라고 요청이 왔어요. 제 진짜 고향은 아니지만, 경주에서 오래 살았고 제2의 고향이라고 생각하니까요. 그때 제가 그랬어요. 고향은 대구지만, 나는 고향이란 것이 태어난 지역이 아니라 ‘자연’ 같다고요. 어릴 때 제가 대구의 침산동이라는 동네에서 살았는데, 그때가 제일 행복했어요. 그전에는 도심 한가운데에서 지냈는데, 침산동은 공단 지역이었거든요. 주변이 전부 허허벌판에 방천이었어요. 거기서 메뚜기 잡으러 다니면서 놀았어요. 자연 속에 사는 것이 정말 행복했죠. 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전원주택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하잖아요. 인류학적으로, 2백만 년 간 지속된 수렵 채집 시기의 기억이 우리 DNA 안에 누적되어 있대요. 그래서 전원주택의 삶이나 귀향에 자꾸 끌리는 거죠.

저도 초등학교 때 경주에 수학여행을 왔었는데, 그때는 별 감흥이 없었어요. 그런데 이번에 내려와 능 옆을 걷는데, 느껴지는 것이 많더라고요.
능을 걷다 보면 능선이 매우 부드러운 걸 알 수 있어요. 전설에 의하면 한 풍수가가 왕건을 위해 신라를 망하게 하기 위해 ‘봉황둥지같이 생긴 경주 서울에 둥글둥글한 큰 알을 많이 만들라’고 했대요. 봉황대를 보면 정말 알처럼 생겼잖아요.

어떻게 보면 여성의 몸 같기도 해요.
맞아요. 대릉원 안에 있는 한 능은 정말 여성의 엉덩이 같아요. 신비하고 관능적이죠. 대릉원 돌담길 따라 걷기 시작하면 바로 보여요. 예전에는 담도 없었고 큰 능뿐만 아니라 작은 능들도 많았다는데, 작은 능들은 정비를 위해 다 밀어버렸대요. 윤경렬 선생님은 너무 안타까워서 울었다고 하더라고요. 자연과 어우러지게 놔두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인데 말이죠. 크고 작은 능이 함께 있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대로 잘 보존이 되어야 할 텐데요.
안타까운 현실이죠. 제가 사랑하는 곳 중 하나가 월성이에요. 조선시대부터 반월성이라고 부른 것은 지형이 반달처럼 생겼다고 해서예요. 거기에 월정교란 다리가 있어요. 왕궁이니까 왕과 왕족들이 걸어 다닌 다리로, 주춧돌을 발굴해서 복원한다고 다시 만들기 시작했죠. 월성 규모에 맞지 않게 거대한 연극세트처럼 세우고 거기다 2층 형태로 만든 거예요. 어이가 없어요. 《삼국유사》에 원효대사가 문천교에서 떨어져 요석공주와 만나게 된 사연이 나오는데, 잘못 놓인 현대건물로 우리는 고대의 신화와 역사적 상상력을 잃어버렸어요.

경주를 사랑하는 만큼 안타까움도 많이 느껴질 것 같아요.
더는 경주가 망가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소중한 문화재를 관광자원으로 개발하려는 시 행정에 화가 나요. 황룡사 옆에도 신축 건물이 있어요. 황룡사 역사문화관이라고. 황룡사에서 발굴한 것을 거기서 전시한다고 지은 것인데, 중국 건물 같기도 해요. 실제 발굴품을 전시하는 것도 아니고 모형을 전시 한다는데 그럴 거면 왜 그런 건물을 짓는지 모르겠어요. 한 후배는 그 옆으로 지나가기도 싫대요. 경주는 손을 대면 망치는 것 같아요. 유적지는 그대로 잘 보존해야 하는데, 자꾸 해치고 없애고 바꾸고 있어요. 마음이 아파요.

비어있으면서
가득한 곳

신라 역사를 다 알고 계실 것 같아요. 따로 공부하신 건가요?
자연스럽게 역사에 관심이 생겨서 공부하게 됐어요. 신라 능을 전공한 역사학자였던 이근직 교수를 만난 것이 큰 영향을 미쳤어요. 제가 처음 경주에 왔을 때, 일요일마다 그분이 유적 답사를 해서 따라다녔거든요. 뛰어난 역사학자였어요.

《능으로 가는 길》은 경주의 능에 얽힌 역사를 풀어낸 책인가요? 역사와 에세이가 같이 있어서 읽기가 좀 더 수월한 거 같아요. 사실 역사가 접하기 쉬운 학문은 아니잖아요.
능으로 보는 신라의 역사에 관한 책이에요. 책을 보면서 능들을 네 번이나 다녀왔다고 한 사람도 있어요. 그럴 때 보람을 느끼죠. 나를 통해서, 내가 매개체가 되어서 경주를 알아가는 사람들이 있구나, 하고요.

어느 초파일에 분황사에서 탑돌이를 하며 캄캄한 황룡사지를 등으로 밝혀 경을 외우며 목탑지를 돌아다니셨다고요.
그때 황룡사지를 다 돌면서 경을 외웠는데 정말 좋았어요. 그런 게 경주다운 거 같아요. 절의 주지 스님이 바뀌면서 지금은 하지 않아요. 서운한 마음이죠. 불국사는 매년 해요. 요즘에는 절도 물질화되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책에 “땅이 비어있다”라는 표현이 몇 번 나와요. 비어있는 땅이란 어떤 건가요?
비어있는 유적지에 서는 것은 인위적인 껍질을 깨고 천 년 전 시간 속에서 자신의 원형에 다가서는 것이에요. 일상의 갈등에서 비켜나 나의 한가운데로, 근원으로 돌아가는 순간인 거죠. 그것이 경주가 우리의 정신적 고향으로서 존재하는 이유이며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해요. 경주는 비어있으면서 가득한 곳이에요. 비어있음으로써 나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거죠. 능이나 황룡사지를 걷다 보면 나와 대면할 수가 있어요. 몇 년 전 경주에 온 대학생들에게 저녁식사 후 자유 시간을 줬어요. 학생들이 능을 거닐 줄 알았죠. 그런데 능 주변에 앉아서 게임을 하더라고요. 안타까웠죠. 현재에서 가장 가까운 것이 조선, 다음이 고려, 또 통일신라예요. 통일신라 안에는 삼국이 다 들어있어요. 이렇게 거슬러가면 우리의 원형이 나오는 거예요. 그런 근원지에선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비어있음으로 자신과 만나는 시간, 어렵지만 꼭 경험해보고 싶어요.
경주는 비어있어야 경주다운데, 사람들은 자꾸 채우려고 해요. 아까 말한 월성에 신라궁궐을 짓는다고 해요. 한옥 형식이 될 테지만, 어쨌든 현대건축물이잖아요. 굳이 거기에 지어야 하는 걸까요? 제발 그대로 놔뒀으면 좋겠어요. 관광을 위해서 유적을 파괴하고 생경한 건물을 짓고 하면 안되겠죠. 유네스코에 편지라도 쓰고 싶어요. 세계문화유산으로서 잘 보존하고 훼손하지 말게 해달라고요.

저희도 얼마 전 ‘미니멀리즘’을 주제로 비워내는 삶에 대해서 다룬 적이 있어요.
세계적으로 비워내는 것이 화두잖아요. 단순화되는 것이요. 단순화시키니 머리가 한결 시원하지 않아요? 승려들이 선禪을 하잖아요. 그게 사실은 복잡한 머릿속을 비워내는 거예요. 자신을 돌아보는 행위죠. 현대인은 머릿속이 온통 생각으로 차 있는데, 근원으로부터 멀어져요. 돈이 본질은 아니잖아요. 비본질적인 걸 비워내는 거죠. 저는 태어난 이유를 인도 여행을 하고 알았어요. 아, 내가 깨닫기 위해서 사는구나, 하고요. 인도 여행에서 본질을 봤다고 했잖아요.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때 많이 깨우쳤어요. 인도에서는 자연이 모든 것을 가르쳐주는 것 같아요.

경주의 ‘깊이’는 오랜 시간 품고 있는 역사에서 나오는 것 같아요.
경주터미널 앞에 서천이란 강이 있어요. 언젠가 무열왕릉에 가기 전, 강가를 걸었어요. 걷다가 돌밭에 앉아서 우연히 돌을 주웠는데, 돌에 잔금이 많고 꼭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 같았죠. 청동기 시대 때 원시인이 그린 그림처럼요. 그래서 같이 간 역사학자도 정말 그렇게 보인다면서 신기해했죠. 경주는 발길 닿는 곳마다 역사를 느낄 수 있어요.

영감을 얻는
고도에서의 삶

경주의 겨울을 특히 좋아하신다고요.
나무에 잎이 무성할 때도 아름답지만, 전 나뭇잎이 떨어진 나무도 본질만 남은 것 같아서 좋아요. 특히 겨울철 메타세쿼이아를 보면 영웅같이 하늘로 뻗어있어요. 집에서 가까운 ‘프리쉐이드’ 카페 바로 맞은편에 이름 모를 능이 있고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몇 그루 있어요. 그 풍경을 좋아해요. 잎이 무성할 때는 그냥 큰 나무라고 생각되는데, 겨울이 되고 잎이 떨어진 메타세쿼이아를 보면 본 면목이 드러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능도 금빛으로 보여요. 도시마다 색이 있잖아요. 바랜 금빛이 경주의 색인 것 같아요.

경주에서 가장 좋아하는 산책길은 어디인가요?
월성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모두 좋아요. 지금은 원래의 월성을 잃어버린 것 같아서 가기가 싫어요. 요즘에는 집 부근의 능 주변이나 무열왕릉을 걸어요. 칠불암 가는 길도 좋아해요. 서출지에서 삼층석탑을 지나 칠불암까지 가는 길이 있는데, 5월쯤 가면 때죽나무가 흰 꽃을 피워서 정말 예뻐요.

경주에서 머문 동네 중 어느 곳이 가장 좋으셨나요?
황남동이랑 산림환경연구소 부근에서 살았어요. 제가 생각했을 때 가장 아름다운 동네는 산림환경연구소와 통일전을 지나서 있는 남산동이예요. 높지 않은 동남산이 굽어보고 다 한옥이라 환경이 경주다워요.

황남동에서 거주하실 때, 장편 동화 《인도로 간 또또》의 주인공 또또란 이름이 탄생한 건가요?
동네 아이가 부르는 개 이름이었어요(웃음). 처음 경주에 왔을 때 항상 고분을 지나다녔어요. 능들을 보면서 저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혹시 순장된 사람은 없을까, 궁금했어요.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고고학에 저절로 관심이 생겨 공부하게 되고 박물관에 드나들고 강의도 많이 듣게 됐죠. 고고학자가 주인공인 《내 안의 깊은 계단》이라는 장편소설도 경주가 아니면 나오지 못했을 거예요.

경주에서 영감을 많이 받으신 것 같아요.
맞아요. 능을 지나다니며 공부하다가 《능으로 가는 길》이란 산문집이 나왔고요. 작가로서 영감을 많이 받았어요. 경주에서 10년을 지내고 보니, 서울에서의 10년보다 두 배 더 썼더라고요. 《인도로 간 또또》, 《세상의 별은 다 라사에 뜬다》, 《내 안의 깊은 계단》, 《능으로 가는 길》, 《미불》 같은 작품을 전부 그때 쓴 거예요. 전성기였던 것 같아요(웃음).

경주에 와서 삶이 달라졌나요?
삶이 달라졌다기보다 제 정체성을 찾았어요. 전 유교 문화에 대한 반감이 있었거든요. 조선시대 말 어느 외국인 여행기에서 일본과 중국, 한국 중에서 한국이 가장 유교적이라는 글을 읽었어요. 일본은 학문으로만 유교를 받아들였는데, 우리는 삶과 문화에 유교 사상이 깔렸잖아요. 제사나 여성에 대한 억압 등 형식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해요. 며칠 전, 직장에서 남자가 여직원을 성희롱했는데 오히려 말한 여성이 피해를 입은 사례를 봤죠. 소설가 이문열이 박칼린을 모델로 소설 쓴 것이 있는데, 거기에 ‘한국문화는 남자의 문화’라는 말이 나와요. 그게 유교 문화인 거죠. 그래서 전 ‘왜 내가 한국에서 태어났지.’라고 늘 반문했어요.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못 느꼈어요.

정체성을 못 느꼈다니, 괴로우셨을 것 같아요.
제가 여행경험이 없었을 때는 이슬람 문화보다는 낫겠지, 이런 생각으로 살았어요. 그런데 1988년에 해외여행이 처음으로 자율화가 되었잖아요. 그 이후 인도를 다녀오고, 여러 국가를 여행해보고 나서 눈을 크게 떴어요. 세계가 이렇게 넓구나. 1992년도인가 유럽을 갔는데, 그렇게 자유로울 수가 없는 거예요. 프랑스 파리에서 거리의 악사가 공연하고 있고 서양여자들이 배낭을 베고 누워서 그걸 즐기고 있더라고요. 그때만 해도 한국에서 여자가 어떻게 길거리에 누워서 음악을 듣겠어요. 그래서 ‘아, 여긴 여자가 인간인 나라구나. 인간으로서 살 수 있는 나라구나’라고 느꼈어요.

문화 충격을 느끼셨겠네요.
제가 6남매 속에서 자랐는데, 단 한 번도 여자라고 불이익을 당한 적이 없어요. 오히려 편애를 받았지. 남자라도 더 대우받거나 하는 것이 없었어요. 다른 집에 가서 오빠라고 더 위해주는 걸 보면 되려 이상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선지 억압적이고 인습적인 것들에 갈등이 심하고 여자라고 해서 불이익을 당하는 것도 저항감을 느껴요. 그러다 경주에 와서 역사를 공부하다가 제 뿌리를 찾았어요.

한국인으로서의 뿌리요?
경주의 무덤을 보면 경주 김씨 무덤만 매우 커요. 이를 적석목곽분(돌무지덧널무덤)이라고 하는데, 땅을 다지고 그 위에다가 관을 놓아요. 그 위에 시신을 놓고 여러 부장품을 넣고 흙을 조금 덮은 후, 그 위에 머리만 한 돌(인두대)을 높게 쌓는 거예요. 그 위에 다시 흙을 덮어서 완성하죠. 고구려나 백제 시대의 능은 도굴해도 경주 김씨 왕족의 거대 능은 도굴을 못해요. 대 릉원에 13대 미추왕과 17대 내물왕부터 22대 지증왕까지 묻혀있어요. 그런데 이 무덤의 구조가 스키타이와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것과 같아요. 많은 학자가 신라로 유목민들이 이동했다고 이야기하죠.

신라 왕실이 유목민의 후예라는 것이죠?
근래에 신라 왕족 뼈의 DNA 검사를 진행했는데, 스키타이와 같다는 결과가 나왔어요. 신라 경주 김씨 왕족이 스키타이와 같다는 소리죠. 문무왕비에도 자신이 흉노인 김일제의 후손이라고 적혀있어요. 신라인에게 유목민 피가 섞인 거죠. 신라는 국제도시였고 굉장히 개방적이었다고 해요. 또 신라 시대의 수로 부인과 선덕여왕을 보면 여자가 자유로웠다는 걸 알 수 있죠. 내 속에 있는 어떤 자유로움은 유목민의 피가 섞여 그렇다고 느꼈어요.

이상향을 찾으신 거네요.
경주에 와서 신라 속에서 비로소 나의 정체성을 찾게 된 것 같아요. 경주가 저에게는 중요해요. 그래서 유적지를 훼손하는 것을 보면 정신의 고향을 망가뜨리는 것 같아서 화가 나요.

경주에서 만난 인연도 많을 것 같아요.
교촌 최 부잣집 고택이 있는데, 교동법주 인간문화재인 배영신 할머니가 최씨 집안의 안주인으로서 오랫동안 살림을 꾸려오셨어요. 처음 경주에 내려와서 이 집에 들렀을 때 본 할머니의 고운 모습이 기억에 남아요. 경주의 참모습이 저런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돌아가셨지만요. 경상도에는 음식 문화가 없다고 그러잖아요. 그 집의 음식을 먹어보고 이것이 바로 경주 음식이구나 했거든요. 제삿날에 우연히 갔는데, 처음 보는 떡도 있었고 모든 음식이 특별했어요. 윤경렬 선생님이 말씀하셨어요. 경상도 음식이 맛없다고 하는데, 신라가 멸망하면서 신라 왕족이 다 고려로 가면서 귀족 음식 문화도 고려로 간 것이라고요. 삼국유사를 보면 문무왕과 이복형제가 한 명 있는데, 당시 그가 지금의 광주에 가서 굉장히 후한 대접을 받고 그 사람을 경주에 초대해 50여 가지의 음식을 대접했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음식 문화가 없었던 것은 아닌 거죠. 그게 조선조 양반 집안에 좀 남아있던 거고요.

인상 깊은 또 다른 만남이 있었나요?
아무래도 윤경렬 선생님이죠. 그분을 안 만났다면 내가 경주에 왔을까, 이런 생각을 해요. ‘박문호의 자연과학 세상’을 이끌면서 자연과학 운동을 하는 박문호 박사님을 만나 것도 영향을 받았어요. 그분의 고향이 경주 삼릉 부근이에요. 우연히 박사님을 삼릉에서 만났는데 그분이 제 책 《능으로 가는 길》을 잘 읽었다고 해서 반가웠어요.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의 책임 연구원으로 계신 박사님을 통해 뇌과학에 관심을 가졌고 경주에서 충족하지 못한 지식 세계가 확대됐어요.

경주에는 이름 모를 능이 정말 많은 것 같아요.
경주에 주인이 확실한 능은 네 개밖에 없어요. 무열왕릉과 괘릉(원성왕릉 추정), 흥덕왕릉, 선덕여왕릉이죠. 이름 모를 왕릉이라는 것도 신비하잖아요.

앞으로도 경주에 머무르실 건가요?
제가 여기서 20년 살면서, 경주에 받을 것 다 받고 줄 것도 다 줬다고 생각해요. 이제는 좀 옮겨도 되지 않을까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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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정혜미

포토그래퍼 Hae R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