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내게로 온 것

누군가의 머리맡에서, 가방 속에서 한 시절을 함께한 책들. 빛은 바래고 종이도 거칠어졌으나 사람과 삶을 이야기하고 지혜를 논하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다. 이들은 헌책방에 모여 고요하게 새로운 곁을 기다린다. 빼곡한 책장을 거닐다 자신의 가치를 발견해 줄 한 사람의 옆자리를.

솔직해지는 곳

나는 괜히 서점에 간다. 이유는 별거 없다. 광화문에 왔으니까, 오늘은 한가로우니까 같은 이유가 내겐 서점으로 향할 충분한 동기가 된다. 언제 맡아도 좋은 특유의 냄새, 이 바쁜 세상 속에서 책장을 넘기는 사람들과 한 공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금세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만 자꾸 ‘읽어야만 한다’는 묘한 압박감을 지고 책 사이를 거니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유명 작가의 화제작, 아직 난 펼쳐 보지 못했지만 베스트셀러 코너에 몇 주째 자리한 도서 같은 것들이 너는 정말 책을 좋아하느냐고 말을 거는 것 같을 때가 있다.

신작들의 빤한 눈초리를 피하고 싶을 때, 나는 헌책방으로 향한다. 헌책방은 작고 고요하다. 책들은 입구부터 어지러이 쌓여 있는 듯 보이지만 장르, 언어, 작가 같은 규칙 아래 서로 몸을 얼기설기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모습으로 내게 별다른 말을 걸지 않는다. 읽어야만 한다고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내가 책들에게 천천히 물을 뿐이다. 언제 쓰인 건지, 어떤 나라에서, 어쩌다 이곳에 왔는지. 그렇게 여러 권을 펼쳐 보고 다시 내려놓는 일은 진짜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을 고르는 과정이다. 오래된 책 사이에서 자신에게 솔직해져 보는 것이다.

일 년 전, 나보다 먼저 헌책에 귀 기울이며 자신이 좋아하는 바를 알아채 온 이를 만났다. 《AROUND》 97호에서 만난 작가 호재 씨는 대구의 서점 ‘북셀러’의 운영자. 이곳은 예술적 가치가 높은 오래된 서적을 사려 깊게 큐레이션해 선보여왔다. 한 해를 꼬박 넘겨, 호재 씨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당신은 북셀러에서 오늘 어떤 책을 발견했냐고. 평생 소장하고 싶은 책, 그리고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은 책은 무엇이냐고. 그가 대구에서 서울로 보내온 두 권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이야길 나눴다.

책방지기 호재가 북셀러에서 찾은 것

평생 소장하고 싶은 책

《현대문학》 164호
현대문학사 | 1968

“오래전 문예지를 들여다보는 일은, 존경하는 옛 작가의 작품이 처음 발표된 시대로 돌아가서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느껴져요. 그중에서도 제가 집착적으로 매달린 일은 오래된 문예지 속에서 김수영 시인의 시와 산문을 찾기였어요. 그가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한 뒤, 현대문학사에서 펴낸 이 책에는 그의 추모특집이 수록되어 있답니다. 대표작 〈풀〉이 처음으로 발표된 지면이기도 하지요. 평생 소장하고 싶은 책이란, 내가 변하지 않는 마음으로 좋아할 사람의 혼이 담긴 책일 거예요. 저한테 그러한 작가는 김수영 시인입니다. 당신에게도 그런 작가가 있나요? 헌책방 구석에 쌓여 있을 오래된 문예지를 뒤적여보세요. 당신이 존경하는 한 사람이 세상을 살아오며 작품을 발표한 첫 지면을 찾는 기쁨을 누리실 수 있을 거예요.”

1. 현역시인신작 100인선

1955년 창간된 문예지 《현대문학》. 소개된 164호 후반부를 빼곡히 채운 작품은 당대 시인 100인의 시 100편이다. 갑오개혁 이후 우리나라에서 서구의 형식과 내용을 반영한 ‘신문학’이 탄생한 지 60주년이 되었음을 기념해 마련된 특별 기획이라고. 출판사에서 신석초, 박목월 시인 등을 비롯한 선정 위원을 위촉해 이들이 꼽은 시인 100인의 신작만을 한 편씩 수록했다.

2. 표지화

컴퓨터 툴로 디자인 작업을 하지 않던 당시에는 화가들이 직접 그린 그림으로 표지를 장식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당대 최고의 예술성을 지닌 문학 작품을 소개하던 《현대문학》 역시 표지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창간호는 화가 김환기의 손이 닿았으며, 이중섭·천경자·장욱진 등 한국 미술계의 거장들이 표지화를 장식했다. 북셀러에서 보내온 표지는 동양화의 현대화를 이끌었다 평가받는 화가 서세옥의 작품.

3. 지면 광고

시대상이 엿보이는 지면 광고도 소소한 재미. 사진은 명동극장 앞에 자리하던 한 병원의 광고다. 오늘날 성형외과는 당시 ‘정형의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구나. ‘쌍카풀’, ‘안면윤곽’ 등 미용 관련 진료 항목이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은 책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윤동주 | 정음사 | 1980

“키워드를 받자마자 떠오른 작가는 바로 윤동주 시인이에요. 섬세한 문장으로 따뜻하고 맑은 그의 정신을 담아낸 〈별 헤는 밤〉, 〈서시〉 같은 시는 누구든 사랑하지 않을 수 없지요. 그만큼 다양한 판본이 존재하는데, 그중에서도 1980년에 정음사에서 펴낸 중판본을 소개합니다. 초판과 달리 전집의 형태로 구성된 중판본에는 초판본의 전통을 계승하는 두 가지 멋이 있어요. 하나는 판권지에 ‘1948년 1월 10일 초판 발행’이라고 이 시집을 처음 펴낸 정음사만이 유일하게 밝힐 수 있는 시집의 이력이에요. 나머지는 바로 책 표지의 명사와 조사의 글자 크기 차이랍니다. 명사 ‘하늘’은 크고 조사 ‘과’는 작지요. 서체는 초판과 비교해 현대적으로 변했지만, 초판의 디자인을 이어가고자 했던 어느 이름 모를 북 디자이너의 감각이 돋보이는 판본이랍니다.”

1. 윤동주의 손글씨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중판본의 표지를 펼치면, 윤동주 시인의 손 글씨를 만날 수 있다. 시인의 친필 시 〈참회록〉이 재가공되어 인쇄되었기 때문. 왠지 모를 뭉클함과 동시에 시인의 따스한 환대와 함께 작품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낙서처럼 이곳저곳에 적힌 단어들, 펜으로 그린 선들도 새겨져 있다.

2. 작가 사진

작품 초반에는 윤동주 시인의 사진들이 수록되었다.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과 생전 마지막 모습, 습작집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모든 사진이 청년 시절에 멈춰 있음을 깨닫는다면 짧았던 그의 생의 의미를 가만히 헤아려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3. 세로쓰기와 문장 부호

책장을 넘기면, 이 책이 품은 세월이 더욱 고스란히 느껴진다. 왼쪽이 아닌 오른쪽 넘김으로 제작되었고, 세로쓰기 방식으로 쓰였으며 한자와 한글이 섞여 있기 때문. 문장 부호는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과 달리 마침표 안이 비어 있고, 쉼표도 머리가 아닌 끝이 무겁다. 지금 내게 익숙한 책의 형태와 차이점을 발견하며 읽어보는 일은 분명 헌책이 주는 작은 즐거움이 아닐까.

터를 지키는 그곳

헌책방은 점점 사라지는 추세지만, 긴 세월을 품고 같은 자리에 머무르는 공간들이 있다. 더불어 오래되었기에 가치 있는 서적들을 모은 젊은 감각의 책방들도 하나둘 문을 열었다. 마음에 드는 작품과 운명처럼 마주하는 순간을 경험하길 바라며, 헌책방 네 곳을 소개한다.

북셀러

2022년 문을 연 대구의 중고 서점. 작가이자 책방지기인 호재 씨는 소장 가치 높은 오래된 문학, 철학, 예술 서적을 수집한다. 세월에 가려졌으나 귀중함이 변하지 않는 책을 손님들에게 소개한다고. 새로운 주인이 공간에 찾아오면 기꺼이 책을 내어준다. 공간 한편에서는 호재 씨가 내어주는 핸드드립도 마실 수 있다. 작가의 작품만을 모은 큐레이션, 연인들을 위한 코너 ‘연인예찬’ 등 흥미로운 기획도 꾸준히 만날 수 있는 공간.

A. 대구 중구 달구벌대로446길 8-3

공씨책방

책방 주인 공진석 씨의 성을 따 이름 지은 국내 1세대 헌책방이다. 1972년 경희대 인근에 처음으로 문을 열었으며, 현재는 가족들이 서점을 이어받아 신촌과 성수에서 운영 중이다. 사진 속 공간은 공씨책방 신촌점, 지하에 자리한 공간에 발을 들이면 주인장의 책상을 중심으로 도서가 빼곡히 펼쳐진다. “문제집이나 참고서를 제외하면 모든 분야의 책을 만나볼 수 있다.”는 주인장의 설명처럼 다양한 도서가 가득하다.

A. 서울 서대문구 신촌로 55-2

청계천 헌책방 거리

동대문 디자인플라자 인근에 자리한 헌책방 거리. 1960년대 청계천 근처에서 노점식으로 자리하던 헌책방들이 청계천 복개 공사가 시작되자, 평화시장 근처로 모여들며 생겨났다. 입구에 책이 가득 쌓인 작은 책방 10여 곳이 거리를 채운다. 노끈으로 묶인 세계 문학 전집. 어린 시절 마주친 기억이 어렴풋이 생각나는 표지 등 곳곳에 시선을 두며 거닐어볼 수 있다. 책방 안에서는 주인장이 높은 사다리를 타고 손님에게 책을 꺼내 주거나, 간단히 식사하는 모습도 보인다.

A. 서울 중구 장충단로13길 20

숨어있는 책

신촌역 뒤편 작은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숨어있는 책’이라고 쓰인 초록색 간판을 만날 수 있다. 입구 계단을 지나 지하로 내려가면 높은 책장이 줄줄이 서 있다. 이곳은 1999년 문을 연 헌책방. 공간을 가득 채운 건 인문사회과학, 문학, 예술 분야의 책이다. 절판된 철학책을 찾는 젊은이들, 좁은 서가를 거니는 중년 손님들을 마주칠 수 있는 곳.

A. 서울 마포구 신촌로12길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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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차의진

포토그래퍼 강현욱 자료 제공 북셀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