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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Day, Around the Way
3년 전, 사무침을 안겨준 한 장의 사진이 있었다. 프레임 한가운데 사람이 서있고, 주변에는 갈대와 해바라기 그리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이 있었다. 그때 부터인지 모른다. 산티아고가 내 마음속 어딘가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꽃피우길 기다리는 풀처럼 간절해진 것이. 무려 2년을 ‘가자, 가자!’ 주문처럼 외고 다녔었다. 그렇게 간절했던 길을 비로소 걸었다. 배낭은 아주 무거웠다. 마음은 그보다 더 무거웠으며, 걸어야 할 길은 아득했다. 누군가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라고 했던가. 먼 길이 익숙해질 무렵에서야 나는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때 그녀를 만났다. 처음엔 그저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곤 제 갈 길을 묵묵히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저 멀리 그녀가 보였다. 점심을 준비하고 있었다. 가방에서 빵을 꺼내 한 입 크게 덥석 베어 문 그녀. 양 갈래로 머리를 곱게 빗어 내린 외모와는 다르게 소탈한 모습이었다. 문득 그런 모습을 사진에 담고 싶었다. 그때부터 하루의 목표는 마을이 아닌, 그녀가 됐다. 일단 부드러운 미소로 “안녕!”을 외쳤다. 그 다음엔 내 이름을 이야기했다. “Hi, I’m J.” 그녀가 웃었다. 시작이 좋았다. 이후부터는 쭉 칭찬을 했다. 연신 엄지 손가락을 내밀고, 웃었고, 여자 혼자 걷고 있는 게 정말 멋지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질문을 했다. “어디서 오셨어요?” 그녀의 이름은 마르긴, 프랑스에서 온 여행자. 그렇게 우리는 친구가 됐다. 나는 카메라를 보여주고, 당신을 담고 싶다는 본심을 털어놨다. 이런 말을 건넬 때 유창한 영어보다 효과적인 것은 귀엽게 ‘찰칵찰칵’ 사진 찍는 시늉을 하는 것이다. 마르긴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카메라를 싫어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눈이 아닌 카메라를 통해 그녀를 바라봤다. 초점을 맞추는 손이 떨릴까봐 크게 심호흡을 했다.흐릿했던 그녀의 미소가 선명해지는 순간, 셔터를 눌렀다. 그리고 한 번 더 필름을 감았다. 필름카메라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예사롭지 않았다. 심지어는 더 적극적이었다. 그곳에서부터 우리는 함께 걸었다. 영어를 못하는 나를 위해 하나하나 설명해주는 그녀의 손짓이 음표를 그리듯 부드러웠다. 그때 어디선가 하모니카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그녀가 마법을 부리는 줄 알았다. 서둘러 하모니카의 근원지를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하모니카를 연주하는 남자와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그들은 독일에서 왔으며 부부가 함께 이 길을 걷고 있다고 했다. 부러웠다. 이번엔 저절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하모니카 연주가 끝나자 남자는 아내를 위해 만든 물건이라며 오카 리나도 꺼냈다. 그가 연주를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아내가 외로워하지 않도록 계속 음악을 들려준다는 것이었다. 낯선 사람들이 모여 함께 곡을 연주하고 듣는 즐거움을 어떻게 말로 할 수 있을까? 어떤 단어도 그때의 감정을 표현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충분히 마음이 통하는 묘한 시간이 우리들 사이에 있었다. 음악이 이끄는 가운데 우리는 다시 각자의 길을 걸었다. 독일 부부는 가장 가까운 마을에서 배낭을 벗었고, 나와 마르긴은 다음 마을까지 갔다. 늘 그렇지만 작별의 시간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도 마지막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산티아고 길에서는 매일이 새로운 시작이고, 희망찬 아침이었으니까. “부엔 카미노Buen Camino.” 우리는 서로에게 가장 힘이 되는 말을 나눠 갖는 것으로 이별을 대신했다.
드디어 숙소에 도착했다. 침대를 배정받은 후, 곧바로 샤워를 했다. 천국이 있다면 이곳이 아닐까 생각하며 뜨거운 물에 몸을 적셨다. 그리고는 빨래를 했다. 손빨래를 하는 시간은 하루 8시간을 걷는 것만큼 고되다. 그래도 가장 낭만적인 오후에 음악을 틀어 놓고 양말을 깨끗이 만드는 일은 나름 뿌듯한 작업이었다. 빨래를 탈탈 털 때 사방으로 퍼지는 무지갯빛 물방울들이 제법 능숙한 솜씨로 피로를 풀어주었다. 이 모든 게 마무리 되면 마을 탐방을 나섰다.가벼웠다, 정말 가벼웠다. 어깨를 짓누르는 가방에 없으니 조금만 뛰면 하늘 근처쯤은 닿지 않을까 싶었다. 조금씩 천천히 오래 걷는 연습을 하며 가장 맘에 드는 나무를 찾아 그 아래에 주저앉았다. 이어폰의 음량을 높이고 불어오는 바람의 리듬을 느꼈다. 행복했다. 그때 음악 너머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살며시 눈을 뜨고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이끌려 갔다. 아이들의 미소는 사랑, 그 자체다. 아이들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천사 같은 이들과 친해지는 방법은 참으로 간단하다. 함께 놀아주거나,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보여주면 된다. 경계심 따위는 없는 모습이다. 그렇게 천사의 날개를 달고 아이들은 땅 위에 머물고 있었다. 어느새 돌아가야 할 시간. 나도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졌다. ‘난 너희와 8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나라에서 11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어.’ 생각해보니 길 위에서 보낸 한 달 중 아이들과 함께한 건 고작 1시간 남짓이었다.
그런데도 서로 헤어지기 싫어 아쉬워했다. 당신은, 몇 년을 같이한 당신은. 그저 미안하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문자 한 통으로 모든 것을 마무리 했는데 말이다. 아직은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그게 먼 나라에서 만난 천사들이라는 사실에 눈물이 났다. 그렇지만 나는 이들 앞에서 함부로 눈물을 흘릴 수 없는 나약한 어른이었다. 울고 싶을 때 울고, 웃고 싶을 때 웃으며 사는 것이 이리 힘들 줄 몰랐다. 다시 못 만날 테지만 나는 아이들에게 ‘내일 만나자’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모두가 떠난 빈자리를 노을이 채워 주었다. 나와 아이들을 위해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그를 뒤로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이미 익숙해진 풍경에 눈인사를 하다 보니 이윽고 숙소에 도착했다. 자리를 비운 사이, 많은 사람이 다녀갔나 보다. 그리고 바람도 함께였던 것 같다. 양말은 두 걸음 정도 되는 위치에 엎드려 있고, 속옷은 두 뼘 정도 되는 아래에 떨어져 다른 옷들과 함께 있다. 주섬주섬 옷가지를 집어 들고 침대로 향했다. 대지의 볕을 가득 머금은 옷 냄새에 기분이 좋았다. 잘 개어 놓은 옷과 수건만큼 반듯하고 뿌듯한 게 또 있을까. 정리를 해놓고 침대에 누워 기지개를 쭉 폈다. 처음엔 낯설었던 천장도 편안하게 다가왔다. 내일이면 또 다른 천장을 바라보겠지만. 창문 틈으로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대로 잠들고 싶었지만, 오늘과 작별하고 내일과 만나기 위해서 준비가 필요했다. 다시 일어나 개어 놓은 옷을 가방에 넣고, 입어야 할 옷은 꺼내 놓았다. 새벽에 꼭 먹어야 할 커피의 원두를 확인하고, 남아 있는 필름을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필름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를 길 위에 데려다 놓는 마법 같은 존재였다.
정리되어갈 무렵, 사람들이 들어와 각자의 침대로 향했다. 두 다리 쭉 뻗고 기지개 켜는 사람들, 조금 전 내가 느낀 행복이 짙게 밴 표정이었다. 옅은 미소, 어김없이 그 미소가 좋았다. 나도 침대로 향했다. 잔잔한 지평선처럼, 우린 모두가 같은 선상 위에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하루하루 다른 천장을 바라보며 익숙한 허전함 속에서 시간을 확인하고, 덮고 있는 침낭의 유혹을 간신히 이겨내야 했다.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바람이 되어야지, 작은 소리도 들리지 않도록. 그리고 아무도 없는 거리로 나가 몸속 가득 차가운 새벽공기를 채워야 겠다. 묘한 냄새가 풍겨 오는, 어떤 향수보다 진한, 사람 냄새로 가득한 그것은 바로 삶, 그 자체였다. 내일이면 모든 게 새롭겠지. 어김없이 시간은 흐르고 흔들림 없이 나를 스쳐가겠지.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내게 보낸 미소를 기억한다. 산티아고에서 돌아온 후에도 마치 그 미소에 화답이라도 하듯 계속 길을 걸었다. 반드시 찾아내야 할 것이 있었고, 고작 몇 번의 여행으로 찾을 수 있으리란 기대는 애초에 하지 않았다. 지금 내가 잘하고 있는 게 맞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들 때면, 한없이 초라하고 불안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내가 무얼 찾아 헤매는지. 이를테면 천천히 나만의 속도로 걷고 싶은 마음 같은 거다. 소소한 것에 감사할 수 있는 따뜻한 마음, 추억을 공유할 수 있어서 고마웠다는 말을 건넬 수 있는 마음,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하다는 마음 말이다.
산티아고 가는 길
www.voyages-sncf.com
산티아고 길을 걷기 위해 파리Paris에서 바욘Bayonne까지 가는 유레일을 이용한 뒤 생장Saint Jean pied de port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목적지까지 이동했다.유레일 티켓은 3개월 전부터 예약이 가능하다. 오픈 직후 가격은 25유로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가격이 오르기 때문에 미리 알아보는 것이 좋다. 현장 구매 시에는 약 100유로가 넘는 가격을 지불해야 할 수도 있다. 생장에서부터는 도보로 갈 것을 추천한다. 걷는다는 게 얼마나 마음 편한 일인지 알게 될 것이다. 길 위에서 필요한 건 약간의 애절함, 그것 하나면 충분하다.
글 사진 백종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