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듯 흐르는 영화

김종관 — 영화감독

Ⓒ 김종관

어느 맑은 오후, 서촌의 오래된 카페에서 김종관 감독을 만났다. 원래 약속 장소에 자리가 마땅치 않아, 새로 찾아 들어간 카페는 그의 영화 <최악의 하루>(2016)에 나왔던 공간이었다. 어쩐지 익숙하게 느껴지는 자리에 앉아 영화와 산책, 걸으며 담아냈던 그의 영화 속 곳곳을 함께 돌아보았다. 김종관 감독의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말이 느리고 걸음은 쓸쓸하다. 온화한 보폭, 조금씩 늘어지는 산책자의 시간처럼 그의 영화는 흐른다.

듣는 사람의 산책

<아무도 없는 곳>

이야기를 만드는 소설가 창석은 유랑하듯 걷는다. 지하철 역사의 오래된 카페, 쓸쓸한 공원, 어두운 바, 서촌의 북적이는 카페까지. 영화 속 공간은 익숙하지만 어딘가 낯설게 느껴진다. 오랜 외국 생활 끝에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네 명의 인물을 만나 대화를 나눈다. 상실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창석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그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창석은 가끔 자신이 지어낸 이야기를 풀어 보이며,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홀로 변화한다.

“<더 테이블>(2016)을 촬영하다가 떠올린 이야기예요. 하루 동안 한 테이블에서 벌어지는 여러 대화를 담은 영화인데요. 주고받는 대화지만 한 사람이 듣는 구성이면 어떨까, 듣는 과정에서 그 사람의 내면이 변하는 결말을 상상하며 창석을 떠올렸어요. 영화에는 여러 공간이 등장하는데 평소 제 공간적 취향이 묻어나 있기도 해요. 모두 익숙한 곳들이었지만 표현하는 방식은 조금 달랐고요. 

 

실제로 <최악의 하루>에 등장한 골목과 같은 장소가 나왔지만 <아무도 없는 곳>(2021)에서는 다른 곳처럼 보이도록 표현했거든요. 빛과 그림자로 따지면 이 영화는 그림자에 속하는 영화예요. 경희궁 뒤편에서 창석과 출판사 편집자 ‘유진’이 담배를 피우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는데, 오후 산책을 하다 보면 해가 지면서 금방 어두워지는 시기가 있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어둠을 두려워하는데 저는 반대로 어둠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어요.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들을 어둠이 감춰주고 안아준다는 느낌이 들어서요. 호흡이 긴 원신원컷을 찍는 동안 빛이 점점 어두워지는 순간을 기록했죠. 제가 느낀 어둠의 부드러운 이면을 그 장면에 담아내려 했어요. 창작을 위해 산책을 하지는 않지만 종종 걸으며 느끼는 것들을 영화 속에 담곤 해요. 걷다 보면 거리에 흩어진 다양한 공간의 변화와 마주할 때가 있잖아요. 산책으로 미묘한 주변의 변화를 읽는 것처럼 영화 속 공간을 표현하는 방식을 달리하는 거예요.”

헤어짐 속의 산책

<하코다테에서 안녕>

“우리가 이미 늙었다면 헤어지자는 말 따위는 안 했겠지.” “그러니까 오래 기억해 하코다테. 우리가 같이 있던 세계, 여기 거리, 그 길들.” 헤어지는 남녀의 목소리와 하코다테의 아름다운 거리. 영화는 눈 속을 걸으며 누군가 남겼을 오래된 흔적을 찾아 이동한다. 이별 앞에 선 이들의 마음을 조용히 산책한다.

“하코다테를 소개하는 영화예요. 예산이 적은 프로젝트라 친한 스태프들과 가벼운 마음으로 촬영하고 싶어서 하코다테로 출발했어요. 떠나기 전에 그 동네의 풍경을 상상하면서 시나리오를 썼죠. 유튜브로 공부도 하고(웃음), 어느 동네든 버스 정류장은 있을 테니까 머릿속으로 큰 장소들을 설정했어요. 막연하게 눈이 오길 바라며 삿포로의 신치토세 공항에 도착했어요. 차를 타고 하코다테로 가는 데만 대여섯 시간이 걸렸어요. 가는 동안 눈이 안 와서 걱정했는데 밤이 되어 근처에 도착하니 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라고요. 운이 좋았죠. 첫날 오래된 영국 대사관 주변 찻집의 창밖으로 보이는 큰 나무에 눈이 내리는 풍경을 발견했어요. 긴 테이크로 촬영하면서 첫 장면으로 결정했죠. 눈은 내리면 내릴수록 세상 거리의 모든 걸 감추는 신비한 매력이 있어요. 아무리 익숙한 풍경도 달리 보이게 하는 역할도 하고요. 대부분의 컷들이 그런 공간들을 사냥하듯 떠다니며 수집한 영화예요. 말 그대로 걸으면서 찍은 영화였죠. 사전에 계획된 것들이 없어서 순발력이 중요했고요. 

 

전체적으로 눈과 노란색의 대비가 아름답게 담긴 영화인데, 영화를 찍다 보면 ‘우연’을 오롯이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할 때가 있어요. 이 영화엔 그 우연을 잘 녹인 장면이 있죠. 길에서 우연히 노란색 우산을 발견해서 기차 건널목에 우산을 펼쳐 놓고 촬영했는데요. 바람에 우산이 흔들리는 모습이 마치 춤추는 것처럼 아름답게 보이더라고요. 그때 이 장면이 영화가 될 수 있겠다는 확신을 얻었어요.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는 나쁜 우연도 많지만 그것들마저 안으로 끌고 와 좋은 우연으로 만들어야 할 때가 있죠. <하코다테에서 안녕>(2019)은 길 속에서 좋은 우연과 나쁜 우연을 발견한 영화예요.”

솔직한 오늘의 산책

<최악의 하루>

서촌의 골목길과 남산 산책로. 해가 맑은 날씨와 오늘. 은희는 걷고 또 걷는다. 연기를 배우는 그녀는 작은 거짓말이 일상적인 여자다. 퇴로가 없는 길 위에서 방황하듯 산책하지만 그 길 끝에는 뜻밖의 아름다운 장면이 기다리고 있었다. “저 길에 눈이 내리고 한 여자가 걸어옵니다. 무표정하게 내리는 눈 사이를 걸어오다가 뒤를 돌아봐요. 어두워진 저 산책로 너머로. 하지만 안심하세요.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입니다.”

“은희는 온종일 거리를 걷는데 변하는 상황에 따라 걷는 속도와 모양이 달라져요. 화나서 걷고 슬퍼서 걷고 도망가기 위해서 걷고 쫓아가려고 걷고 그냥 산책을 하기 위해서 걷기도 하고요. 계속 변하는 한 사람의 걸음이 잘 드러날 수 있는 공간을 배경으로 했어요. 한 장소에 다양한 모습이 있듯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영화에서 은희는 계속 거짓말을 하고 있지만 사실 그 순간순간 진심이었기도 하거든요. 누구나 여러 태도를 가지고 있잖아요. 만나는 사람에 따라 성향이 바뀌듯 행동하고요. 이런 주제를 공간 안에 놓인 인물과 함께 비유하듯 말하고 싶었어요. <최악의 하루>(2016)는 현실적인 연애 이야기와 어쩌면 거부감이 들 만한 설정들이 연속된 영화지만 그게 너무 눅진하고 버겁게 표현되지 않길 바랐어요. 누군가에게는 영화 속 최악의 상황들이 내 상황처럼 보일 수 있으니까요. 

 

오래 전에 작업했던 <폴라로이드 작동법>(2005)도 첫사랑의 감정을 표현하는 영화인데, 저는 첫사랑을 떠올리면 무력하고 슬프고 자기 제어가 되지 않던 감정이 또렷해요. 당시엔 그 마음이 되게 창피했는데 이토록 수치스러운 감정도 영화 속에 표현되면 재미있는 요소가 되는 경향이 있어요. 은희는 오늘 최악의 하루를 보냈지만 돌아보면 그렇게 최악은 아니었다, 나중엔 별거 아닌 하루였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죠. 영화 속 길들을 이야기와 대비하듯 산뜻하게 표현한 이유도 거기에 있어요. 오늘은 어쨌든 흘러가 버리는 하루이며 우리는 그렇게 무수한 실수와 이불 킥을 할 만한 사연들을 겪으면서 결국엔 나아가는 거예요.”

익숙하고도 낯선 길 위에서

거미줄 쳐진 침대, 외딴 시골 정류장, 녹음진 거리의 아이들, 깨진 유리잔과 낡은 의자. 김종관 감독이 산책 하며 수집한 사진에는 늘 서사가 담긴다. 한 장 안에 누군가의 기억과 마음과 감정과 흐르는 시간이 묻어난다. 그의 영화 속 길 위에서 목격한 익숙하고도 낯선 기록들. 오래전 나의 어떤 하루를 문득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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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김지수

Ⓒ 김종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