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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작가 정현주
거기,
라디오가 있다
정현주
야근하고 택시를 타면 보통 라디오가 켜져 있다. 한강을 따라 집으로 가며 흘러나오는 이야기나 음악을 듣고 있으면 그 새벽이 다행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느 날, 기사 아저씨에게 새벽의 라디오가 좋다고 말했더니 “택시 안에서는 라디오가 유일한 친구죠.”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듣는 이가 예전보다 줄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라디오를 친구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 주파수를 맞추길 멈췄더라도 언제나 라디오는 그 자리에 묵묵히 있어왔다. 그리고 여기에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 지난 20여 년간 라디오 원고를 써온 사람이 있다.
매일 쓰는 글이 진짜야
1997년에 처음으로 라디오작가 일을 시작한 걸로 알고 있어요.
면접을 보러 갔던 순간이 아직도 기억나요. 스물일곱에 대학원을 졸업하고 놀고 있었는데 한 선생님이 언제까지 놀 거냐고 물으시는 거예요. 모르겠다고 하니 이력서를 갖고 오라고 하셨죠. 앨범에서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을 오려 붙여서 이력서를 내고 KBS로 면접을 보러 갔더니 피디가 카페로 들어와서 한참 두리번거렸어요. 사진이 너무 예쁘게 나와서 못 알아봤던 것 같아요(웃음). 그때부터 라디오작가 일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막내작가는 보통 이십 대 중반을 안 넘긴다고 들었어요. 막내작가에서 메인작가까지 기간은 되게 길다고들 하고요. 실제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보기엔 어떤가요?
그 얘기가 맞을 거예요. 보통은 막내부터 메인까지 10년이 넘게 걸린다고들 해요. 처음 들어오면 사연 정리부터 시작해서 3~5년 차에 보통 서브작가가 되죠. 그때부터 코너를 맡게 되고 그 후로 메인이 되기까지 또 7~10년 정도가 걸려요. 메인이 되면 그때부터 전체를 총괄하게 되는 거죠. 그 과정에선 실력뿐만 아니라 운도 따라야 해요. 이렇게 오래 걸리는데 그에 비해 돈은 적게 받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 일을 하라고 선뜻 추천하진 못하겠어요.
하지만 못지않은 즐거움이 있어서 20년 가까이 하고 있는 거겠죠?
맞아요. 재미있고 좋은 일이에요(웃음).
라디오는 매일 방송을 하니까 원고도 매일 써야 할 것 같아요. 그건 어떤가요?
하루에 보통 A4 30페이지 정도를 쓰거든요. 작가가 셋이라 나눠 쓰긴 하는데 그래도 많은 양이죠.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매일 그 일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녜요. 요즘도 원고에 대한 압박으로 악몽 꾸고 가위눌리고 그래요.
꽤 오래전부터 작가님이 홈페이지에 올리는 글을 봐왔는데, 메인 화면에 ‘매일 쓰는 글이 진짜야.’라는 문장이 늘 눈에 먼저 들어오더라고요.
생각해서 나오는 게 아니라 그냥 툭, 튀어나오는 문장들이 있잖아요. 그 문장이 그래요. 2001년 즈음부터 그 문장을 홈페이지에 써뒀어요. 저는 라디오작가가 되기 전엔 제가 공부를 계속할 줄 알았기 때문에 글을 쓴다는 걸 상상도 못 했거든요. 매일 뭔가를 쓰는 게 정말이지 어렵고, 많이 힘들었어요. 그런데도 방송이 시작되면 즐거워서 포기할 수가 없었죠. 어느 날, 뒤돌아보니 ‘내가 여기까지 왔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뿌듯했죠. 거기까지 오게 된 것이 내가 매일매일 했던 작업들의 결과물이란 생각이 들어서 매일 뭔가를 쓰는 게 중요하단 생각이 들었어요.
홈페이지에 올라오는 글은 일과는 조금 떨어진 일기인데, 그럼 원고와 일기를 둘 다 부지런히 쓰고 계신 거네요.
라디오의 글은 온전히 디제이에게 맞춰서 써야 하는 거잖아요. 디제이의 목소리를 통해서만 세상을 만나는 거고요. 하지만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제 안에는 저의 목소리로 하고 싶은 저만의 이야기들이 있었어요. 제 세상에 대해 얘기를 할 공간이 필요해서 홈페이지에 글을 쓰기 시작했던 거예요. 라디오는 일로 매일 쓰는 것이지만, 홈페이지에는 매일 내 얘기를 쓰려고 했죠.
어릴 적에 엄마가 자기 전에 읽어 준 책이 있거든요. 어른들을 위한 수필이었지만 어린 제가 듣기에 전혀 불편함이 없었고, 심지어 수십 년이 지난 요즘도 종종 생각이 나요. 라디오든 잡지든 문학이든 ‘팔리는’ 글을 쓰는 사람들은 대중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요. 저 역시도 그런 고민을 계속하고 있는데, 언젠가부터 누구든 소외 받지 않고 읽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어졌어요. 하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고요(웃음).
선아 씨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아요. 제가 출간한 책들이 베스트셀러에 놓여 있잖아요. 쉽고 단순한 문장들로 쓰인 글들이고요. 내가 가진 것을 혼자 보려고 쓰는 일기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공유하려고 쓰잖아요. 그걸 상대가 알아먹게 쓰는 게 말하는 사람이 갖춰야 할 예의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제가 있는 매체가 라디오이기 때문에 누구든 들을 수 있어야 하고요. 대중을 향하는 글을 쓰는 사람일수록 그걸 더 깊이 고민해야만 해요. 글을 쓰는 사람들은 이에 대한 질문은 평생 가지고 가야 하는 것 같고요.
매체에 있는 사람들은 대중을 향해 글을 쓰지만, 동시에 대중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잡지에선 어떤 표현을 쓰는지 모르겠지만, 라디오에선 ‘대중은 중학생이야.’라고 표현해요. 전 동의하지 않아요. 대중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현명해요. 좋은 것을 알아보는 눈도 갖고 있고요. 게다가 요즘은 워낙 많은 것들을 손쉽게 접할 수 있잖아요. 대중의 안목은 점점 높아지고 있죠. 양질의 것을 담되, 쉽고 간결한 언어로 전달하고 싶어요.
라디오는 특히 더 그럴 것 같아요. 그래야만 하는 것 같고요. 원고가 글로 읽히는 게 아니라 말로 읽히잖아요.
그렇죠. 라디오는 누가 봐도 이 문장이 뭔지를 알아야만 해요. 내가 쓴 글로 사람들을 만나는 게 아니라 디제이의 말로 만나는 거죠. 아무리 잘 써도 디제이가 소화를 못 하면 소용이 없는 거예요. 디제이의 세상과 철학이 원고와 맞지 않으면 작가가 바꾸는 게 맞아요. 그래야 어떤 청취자가 들어도 바로 알아들을 수 있어요. 책을 내기 위해 출판사에 가면 “현주 씨는 문장이 참 좋아요.”라는 말을 많이 해요. 그럼 웃어요. 내 문장은 사실 좋다고 할 게 없어요. 문장이 아무 것도 없어요. 그냥 짧고 간결한 것이죠.
처음 시작했을 땐, 말로 읽히는 글을 쓴다는 게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아요.
일을 하면 할수록 라디오 원고는 운문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운율이 있어야 듣는 사람의 귀에 정확히 꽂혀요. 알아 듣기 어려운 것은 다시 한 번 반복해주고, 문장과 문장 사이에 뭔가가 있어야만 해요. 그래야 편하게 잘 들리죠. 문장이 길면 기분 좋게 듣기 어려워요. 이런 걸 항상 고민했어요. 강조하고 싶은데 어떻게 강조를 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이 ‘글’을 그러니까 ‘말’을 잘 들을 수 있을까, 그런 것을 20년간 고민하며 점점 문장을 쉽게 쓰게 되었어요. 이건 결국 읽고 말하는 모든 것에 해당하는 거예요. 어렵게 말하면 읽히지도 들리지도 않아요. 초반에는 그게 너무 어렵다고 느껴져서 자기 전에 매일 시집을 한 권씩 읽고 잤어요. 운율을 알고 싶어서요. 밤 프로그램이라 집에 오면 새벽 3시였는데 그래도 씻고 꼭 시집을 읽었어요.
아까 모두에게 좋은 것을 알아보는 눈이 있다고 하셨죠?
아마 조금씩 차이가 있을 거예요. 좋은 그림이나 사진을 보다 보면 그런 눈이 생기듯이 좋은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일수록 더 좋은 글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길 거예요. 대학과 대학원에서 국어국문학을 공부하며 좋은 소설과 시를 정말 많이 봤어요. 어떤 글이 문학적으로 좋은 글인지 알고 있지만, 제가 전달해야 하는 것은 따로 있다고 봐요. 분명한 건 쉬운 글이라고 해서 좋지 않은 글은 아닌 것 같고요. 대학 다닐 땐, 박완서 선생님의 향기를 잘 몰랐어요. 이청준 선생님처럼 어렵게 머리에 쥐날 것처럼 만들어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게 좋은 글이라고 생각했죠. 나이가 들어가면서 왜 많은 사람이 박완서 선생님의 글을 좋아하는지 알 것 같더라고요.
결국 좋은 글이란 뭘까, 이 질문을 다시 드려야 할 것 같아요.
글은 소통이란 생각이 들어요. 문학개론 시간에 교수님이 “아무도 안 읽는 잘 쓴 소설, 그냥 그런데 사람들이 많이 읽는 소설이 있다고 치자. 너희들은 이걸 어떻게 생각하니?”라고 물었어요. 그때 어떤 친구가 “소설은 자본주의의 산물이기에 그 안에서 팔리지 않는 것은 소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어요. 선생님이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말이 그것이라고 했어요. 아무도 읽지 않는 소설을 왜 쓰냐는 거예요. 어릴 땐 그랬어요. 나는 문학도니까 베스트셀러는 안 읽고 문학적으로 잘 되었다는 책만 읽으려고 했죠(웃음). 지금은 달라요. 베스트셀러면 다 읽어봐요. 왜 사람들이 이걸 좋아할까. 라디오 작가로서 알아야 하고 알고 싶으니까요. 아마 글을 쓰는 사람들에겐 다 비슷한 시기들이 있을 것 같아요. 그런 과정들 속에서 자기가 쓰고 싶은 걸 정하고,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쓰면 되지 않을까요?
독하지 않은 웃음을 전하는 것
20년이란 시간이 짧지 않게 느껴져요. 그간 많은 프로그램을 맡으셨잖아요. 세본 적 있으세요?
세보진 않았는데, 저는 보통 2년 이상은 잘 못 해요. 자꾸 옮겼죠. 그럼 한 열 개 정도 하지 않았을까요?
<궁선영의 가요광장>, <성세정의 0시의 스튜디오>, <이주노의 FM 인기가요>, <이본의 볼륨을 높여요>, <김정은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 <김정훈의 FM 인기가요>, <홍경민의 자유선언>, <이민우의 자유선언>, <강타·신혜성의 자유선언>, <옥주현의 별이 빛나는 밤에>, <홍진경의 가요광장>, <이현우의 음악앨범>, <최강희의 야간비행>, <장윤주의 옥탑방 라디오>, <정재형·문희준의 즐거운 생활>. 제가 적어놓은 것만 10개가 넘어가네요(웃음). 프로그램을 옮기는 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건가요?
피디에게 같이 일하자는 제안이 와야 옮기는데, 작가가 어떤 프로그램을 맡고 있으면 연락이 안 와요. 솔직히 저는 그 방식이 좀 이상하게 느껴져요. 어떤 프로그램을 하고 있어도 잘 어울릴 것 같으면 “나랑 하자!” 하면 되는데 피디들이 그렇게 안 하더라고요. 뭔가를 그만두고 쉴 때 연락을 주죠.
작가를 뺏어간다는 느낌 때문에 피디들끼리 암묵적인 약속을 한 것 아닐
까요?
아마 그렇겠죠(웃음). 어쨌든 쉬고 있으면 연락이 많이 와요. 지난번엔 밤 프로그램을 했더니 몸이 많이 상했어요. 그럴 땐 보통 쉬고 다시 시작해요. 때마침 출판사에서 책을 쓰자는 제안이 와서 일을 쉬게 되었고, 그때 맡은 책이 김환기 선생님과 그의 부인이 파리에서 보낸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었죠. 두 분이 사셨던 파리에 가서 여행도 하고 글도 쓰고 돌아와서 낮 프로그램으로 복귀했어요. 저는 솔직히 책을 여러 권 써서 인세만으로도 먹고 살 수 있어요. 이젠 하기 싫은 프로그램은 하지 않고, 마음이 끌려서 하고 싶어지는 프로그램만을 해요. 지금 하고 있는 <정재형·문희준의 즐거운 생활>도 좋아하는 피디가 제안했기에 시작했어요.
라디오엔 청취율이란 게 있잖아요. 동시간 프로그램끼리 신경전이 있겠죠?
옛날보다 사람들이 라디오를 안 듣잖아요. 파이가 줄었는데 얼마 안 되는 청취자들로 서로 뺏고 뺏기는 게임을 하고 싶진 않아요. 그런 식으로 해서 상대사를 꼭 이기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예전에는 들었지만 지금은 듣지 않는 사람들을 라디오로 돌아오게 해서 청취율을 올리고 싶은 마음은 있죠.
일을 오래 하셨으니까 어떤 노하우 같은 게 있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그렇죠. 어떻게 해야 1등을 하는지는 어느 정도 아는 것 같아요. 하지만 이제 설탕과 조미료를 넣어서 맛집이 된 식당은 하고 싶지 않은 거죠. 지금 맡은 프로그램은 이제 막 시작했기 때문에 바닥에서 시작하는 것과 같아요. 노력하는 만큼 청취율이 올라가기를 바라요. 오르고 있고요. 그런데 이왕이면 그것을 좋은 방식으로 올리고 싶었어요. 하나는 앞서 말한 듣지 않는 사람들을 끌어오는 것이고요. 다른 하나는 건강한 웃음으로 사람들을 끌어오는 거예요.
건강한 웃음이요? 그렇지 않은 웃음이란 어떤 걸까요.
반대편엔 독한 웃음이 있죠. 건강한 웃음만을 전하고 싶어요. 좋은 말들을 들었을 때 오는 에너지가 있잖아요. 굳이 나쁜 이야기를 해가면서 웃음을 주고 싶진 않아요. 예를 들어 직장의 갑을 관계가 화제라면 그걸 얼마든지 독하게 볼 수 있거든요. 나쁜 상사를 찾아 웃음을 줄 수 있죠. 그럴 때, 저희 프로그램은 좋은 상사 찾기 같은 걸 해요. 택배 문제가 있을 땐, 택배에 대한 좋은 얘기를 하고 선물을 보내드리고요. 물론 택배 때문에 짜증 나는 일이 있지만, 좋은 얘기를 해보자고 하면 또 얼마든지 나오거든요. 나쁜 상황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좋은 쪽을 보고 그걸 나눠요.
그렇게 받은 사연들 중에 기억에 남는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남편 회사에 정리 해고 바람이 불어서 기운이 없으니 응원을 해주고 싶다는 사연이 있었어요. 전화 연결을 하기 전에 몰래 남편과 연결을 해뒀어요. 아내가 말을 다 끝내고 “사랑해.”라고 했을 때, 남편이 나와서 “나도 사랑해.”라고 답했죠. 아내는 울고 있고 남편에게 하고 싶은 얘길 하라고 했더니 “<인사이드아웃>을 보러 가고 싶다고 했는데 같이 못 보러 갔지. 혼자 방에서 휴대폰으로 영화보는 걸 본 날, 마음이 아팠다. 미안하다.”라고 하는 거예요. 디제이도 같이 울고…. 저희 디제이 방송하다 너무 많이 울어요(웃음).
그러고 보니 프로그램 수만큼이나 그간 함께했던 디제이들도 적지 않겠네요.
그렇죠. 이주노, 이본 씨는 처음에 잘 안 맞았던 사람들인데,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 이해하게 된 과정이 기억에 남아요. 이주노 씨에겐 라디오 스텝들을 가족처럼 생각하고 챙기는 ‘식구’의 개념이 있다는 걸 배웠어요. 이본 씨와 할 때는 거의 세 달 동안 매일 울었어요. 결국, 나중엔 친해졌지만요(웃음). 이본 씨에겐 좋은 디제이의 요건을 배웠어요.
그녀에게 배운 좋은 디제이의 요건이란 어떤 건가요?
이본 씨는 자신의 색이 분명해요. 조금만 어긋나면 수정을 요구했죠. 처음엔 이해 못했는데, 디제이는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걸고 방송하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죠. 이본 씨는 프로그램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어요. ‘내 프로그램이야.’가 확실했죠. 의외로 그게 없는 디제이가 많아요. 직장 나오듯이 나와서 입만 빌려주고 가는 사람들도 있어요. 제가 원고를 어떻게 썼든 디제이 입으로 나가기 때문에 결국 원고는 그의 몫이 된다는 걸 디제이도 작가도 잘 알고 있어야 해요.
또 다른 디제이들도 많아요. 개인적으론 최강희 씨와 했던 프로그램을 좋아했었거든요.
최강희 씨는 몰입하는 능력이 좋았어요. 라디오는 사적인 매체잖아요. 일대일의 만남이라는 걸 확실히 갖고 갔어요. 좋은 사람이었죠. 그리고 옥주현은 리딩이 좋았어요. 제가 쓴 원고인데도 다른 원고인 것처럼 읽어줘서 신기했던 기억이 나네요. 일일이 말하려니까 너무 많네요. 이현우, 장윤주….
모든 디제이와의 시간들이 다 다른 의미가 있었어요. 요즘 같은 세상에 라디오디제이를 하겠다고 오는 사람 중엔 나쁜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 페이가 좋은 것도 아닌데 시간을 투자해서 하는 사람들이죠. 지금 함께 하고 있는 정재형 씨 같은 경우에도 바쁠 텐데 쉬는 날에도 계속 라디오에 대한 얘기를 메시지로 보내요. ‘이거 어때? 저거 좋지?’라고요. 라디오와 자신의 프로그램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있는 거죠.
디제이, 피디, 작가가 같이 프로그램을 만들잖아요. 함께 일하는 것은 어떤가요?
라디오에서 일하겠다는 사람들의 성향 자체가 다른 매체에 비해 세지 않아요. 순한 사람들이 찾아오죠. 아무리 그래도 미묘한 마찰 같은 것을 피할 수 없긴 해요. 예전에는 피디와 갈등이 생기면 그만두거나 옮겼어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내가 정확한 색을 갖고 있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았어요.
상대가 내 색을 알면 이해하고 조율할 수 있는 게 있어요. 전에는 혼자 앓았지만. 이젠 솔직하게 “그건 아닌 것 같아.”라고 말해요. 내가 무엇이 불편한지를 말하지 않으면 상대는 그걸 몰라요. 솔직하게 말하면서 절충안을 찾으면 오히려 마찰을 줄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무조건 맞춰주는 작가들도 있거든요. 그렇게 하다가 억울해지면 뒤에서 욕하고, 그러면 정말 마찰이 되는 거예요. 제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얘기예요. 같이 일하는 사람끼린 대화가 많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라디오는 ‘대화’잖아요.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거죠.
항상 같은 자리에 먼저 와서 기다리는 일
혹시 일을 하며 겪었던 고비는 없었나요?
어떤 큰 사건이 지나가고 뇌출혈이 왔었어요. 죽을 뻔했다가 겨우 살아났죠. 보통 죽을 고비를 넘기면 뭔가를 놓게 된다고들 하지만, 저는 오히려 다른 욕심이 생겼어요(웃음). 욕심이 하나로 모이고 압축되어서 정말 잘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전에는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렇게 되니 더 잘 살고 싶더라고요. 아파서 아무것도 못 하는 시간이 1년 정도 있었어요. 그동안 혼자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 후로 라디오로 복귀하고 책을 출간했죠. 그때 출간한 책은 과거의 내게 하는 ‘말’이었어요.
요즘 하고 있는 고민이 있는데, 주변엔 또래들만 있어서 서로 뾰족한 답을 내리지 못하고 그냥 이야길 나누어요. 어떤 시기를 먼저 지나간 어른을 만나면 묻고 싶었는데, 작가님에게 한번 물어보고 싶네요. 포기하고 싶을 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음… 저는 20대와 30대 초반에는 해야만 하는 일을 했던 것 같아요. 돈도 필요했고 도저히 피할 길이 없었어요. 일이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기도 했지만, 여러 이유로 악바리처럼 버텼어요. 다행스럽게도 내 일을 좋아하니까 어떤 사건들 때문에 그만두고 싶지 않았던 것도 이유라면 이유였어요. 그렇게 지나고 보니까 어떤 식으로든 우리 삶에 일어나는 일들은 결국 연결이 되는 것 같더라고요.
아파서 일을 쉬었잖아요. 쉬는 시간의 시간들이 버려진 것 같지만, 삶이 이어지면서 그것도 또 연결이 되더라고요. 그때그때 오는 일들에 부딪혀서 깨지거나 돌파하거나 하지 않아도 되는 것 같아요. 꼭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고 하나는 버리거나 인생과 한 판 붙어보겠다는 의지보다는 고비나 파도가 오면 그냥 그걸 넘어가는… 그런 것 있잖아요. 오히려 부드럽게 넘어가는 법을 배워두면 사는 데 더 도움이 되는 것 같더라고요.
뭔가를 선택하려고 보면 우리 주변엔 늘 불안함이 있어요.
불안한 걸 너무 불안해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우리 코너 중에 정신과 선생님이 나와서 상담을 해주는 게 있어요. 나는 그 선생님이 좋은 게, 교수인데 와이셔츠를 벗으면 해골 그려진 티를 입고 계세요. 퇴근하면 밴드를 하시고 뭐 상담을 해달라고 하면 “폭탄주 마시면 돼요!” 하면서 웃으시고요. 사람들이 “왜 저는 자꾸 짜증이 날까요? 부정적인 생각만 들까요?”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는데, 선생님이 뇌가 지쳐서 그런다고 하더라고요. 외부의 어떤 자극보다도 본인의 뇌가 지쳐서 일어나는 현상인데 지친 뇌의 회복은 잠만 자서는 해결되지 않는대요. ‘좋은 사람 만나서 밥 먹기, 자연을 만나기, 문화를 즐기기.’ 이 세 가지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대요. 기억해봐요.
왜 유인력의 법칙이란 게 있잖아요. 좋은 쪽으로 생각하면 온 우주가 나를 도울 거라는…(웃음). 그런 말을 믿고 있어요.
어? 저 그에 얽힌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요. 임진각에 가서 유성우가 떨어지는 걸 본 적이 있어요. 한참 별이 떨어지는 걸 보다가 옆에 있던 후배가 소원을 빌었느냐는 거예요. 그래서 바로 “3만!” 이렇게 했어요. 책이 나올 시기여서 3만 권이 팔리게 해달라고 외친 거죠. 그땐 그냥 생각나서 외쳤는데 그렇게 말하고 그 후로 가끔 그 생각을 했어요. 의심하지 않았어요. 3만 권이 팔릴 거라고 생각했더니 정말 되더라고요. 우주의 기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웃음).
종종 라디오를 들어요. 그때 받는 위로가 따로 있어요. 다른 재미있는 것들이 많아졌지만 여전히 라디오만이 가질 수 있는 힘이 있는 것 같거든요. 작가님이 생각하는 라디오만의 매력은 뭘까요?
제 친구가 카페를 했던 적이 있어요. 아무 때나 찾아가도 내 친구가 거기 있다는 게 좋더라고요. 걔가 거기에 늘 있으니까 외롭지 않고. 그게 라디오인 것 같아요. 라디오는 같은 시간에 항상 그 자리에 있어요. 저희 디제이들 멘트 중에 가장 좋아하는 게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을게요.”거든요. 그게 라디오가 오래 전부터 갖고 온 매력인 것 같아요.
오래 전이라고 하시니 갑자기 궁금한 게 떠올랐어요. 어릴 적에 손편지로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던 기억이 나거든요. 혹시 요즘도 손 편지가 오나요?
거의 안 오죠. 예전에는 커다란 통 하나씩 매일 왔었어요. 그걸 작가들이 다 뜯어서 주소를 잊어버리면 안 되니까 스탬플러로 찍고, 읽을 부분 밑줄 긋고, 글씨가 읽기 어려운 편지면 타이핑해서 붙여주고…. 그런 식으로 방송을 했었어요. 지금 생각하니 정말 추억이네요(웃음).
추억이 많을 것 같아요.
그러게요. 지나고 보니 참 좋았죠. 기억에 남는 편지도 많아요. 어떤 분이 고3인데 죽어야겠다고 생각하다 저희 라디오 오프닝을 듣고 살고 싶어졌다는 사연을 보낸 적이 있어요. 우리가 울었죠. 살고 싶은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잖아요. 건강해지고 싶고 좋은 쪽으로 가고 싶죠. 그걸 지키기가 힘들 때가 있는데, 라디오가 그런 것들을 위로해줄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예전에도 지금도…. 그래도 전보다 많은 사람들이 라디오를 듣지 않는다면 그건 만드는 사람들 탓이에요. 라디오 사람들은 둘러 앉아 “라디오에 미래가 없다.”고 하는데, 그런 생각들 너무 재미없어요. 없으면 만들어야지. 사람들이 듣고 싶게 만들어야죠.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라디오, 다시 들어보세요. 좋아요. 정말.
정현주가 쓴 열 권의 책
JUNGHYUNJOO
morningrain.com
instagram.com/morningrain1211
정현주는 2005년에 《나무, 바람을 사랑하다》를 시작으로 《사랑에 물들다》, 《청춘극장》, 《스타카토 라디오》, 《삼 곱하기 십》, 《그래도, 사랑》, 《다시, 사랑》,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 《거기, 우리가 있었다》를 출간했다. 그녀의 책들이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사랑’이다. 라디오 원고로 쓴 사랑 얘기를 엮은 책도 있고, 어느 화가와 부인의 사랑 이야기를 전달한 것도 있고,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돌아보며 쓴 책도 있다. 어느 책을 집어 들건 그녀가 라디오를 통해 들려주었던 따뜻하고 건강한 마음을 고스란히 전달받을 수 있으니 추운 겨울, 라디오를 들으며 그녀의 책을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에디터·포토그래퍼 박선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