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자리에 앉아 쓴 편지

받는 이가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홀로 빈 종이를 마주하며, 보통의 편지는 그렇게 쓰인다. 그러나 단춤과 하호하호가 주고받은 기록은 사뭇 다르다. 2024년 5월 7일 밤부터 23일 아침까지, 독일 라이프치히Leipzig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던 두 친구는 편지를 쓰기로 한다. 쏙 빼닮은 모양의 일과를 보냈어도, 같은 방에서 잠을 청하더라도 편지는 부지런히 쓰였다. 다정한 안부 인사와 보내는 이의 이름을 적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함께 시간을 쓰는 것,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글로 적어내는 것이 마음을 나누어 쓰는 일이라는 걸 다시금 깨우쳤다. 두 친구가 같은 자리에 앉아 쓴 편지를 추억이 담긴 선연한 기록이라 부르며 조금 옮겨 적어본다.

단춤 @danchoom

만화가이자 인형제작자. 계절이 흐르며 만난 마음과 대화를 엮어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당신의 곁에서 용기와 위로가 되길 바란다.

하호하호 @hahohaho00

그림을 그리고 책을 든다. 《밤에 방에서》, 《강강술래》, 《자각》, 《Dusty Vases》, 《MOMO TWINS》 외 다수의 책을 만들었다.

아직 한국에서

하루를 보내고 있을 당신에게.

너보다 먼저 이곳에 짐을 풀고 생활한 지도 시간이 꽤 흘렀네. 그동안 나는 오랜만에 느끼는 외국인의 시선으로 하루를 살고 있어. 어딜 봐도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것들이라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어.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앵무새처럼 따라 해보기도 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빠른 속도의 대화들을 기다렸다가 마지막 인사만큼은 힘차게 외치고 나와. (안녕 인사가 “챠오, 츄스!”인 것 알고 있지? 어감이 좋게 들려.) 그럼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씩씩하게 거리로 나가지. 작은 용기를 쌓아가는 하루들을 보내고 있어. 짧은 대화이더라도 입을 떼는 게 쉬운 일은 아니기에 긴장하며 대화를 시작하게 돼. 

이런 노력과는 별개로 이곳은 새롭고 두려운 것들이 참 많아. 그러는 사이 내 어깨는 점점 좁아지는 것처럼 느껴져. 한국에서부터 짊어지고 온 피로들이 긴장과 부딪히며 많이 지친 듯해. 덕분에 느리게 행동하고 생각하며 지내고 있어. 나의 이런 태도들은 이곳과 많이 닮아 있어. 사람들은 무척 여유로워 보이고 높은 건물이 없어서 하늘이 한눈에 가득 담겨 눈이 쉬어갈 시간이 많아. 너와 지내게 될 시간 사이사이에도 이런 날들이 가득하겠지? 평화로운 일상들을 기대하며 너를 기다린다.

단춤으로부터.

단춤

 

“우리의 편지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독일에서 유학 중인 친구를 만나기 위해 계획을 세우던 중 하호하호의 독일 여행 계획을 알게 되었어요. 함께 여행하고, 자연스레 그 기억들을 모아 책으로 만들기로 했죠. 2주 남짓 머물던 라이프치히는 도시 곳곳의 공터가 모두 공원인 곳이라 소개하고 싶어요. 공원을 빼곡히 둘러 자란 나무들 아래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과 산책하는 강아지들, 각자만의 시간을 집중해서 보내는 그 모습들이 자연스러웠습니다.”

하호하호 

 

“먼저 도착한 단춤이 타지에서만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을 충분히 만끽하길 바랐어요. 때문에 한국에선 연락하지 않고, 대신 직접 만나면 하고 싶은 말들을 곱씹으며 기다렸습니다. 낯선 타지의 기차역에 도착하니 단춤을 비롯하여 친구들이 마중 나와주었어요. 낯설고 어색하던 곳이 순식간에 우리가 함께하는, 반가운 장소가 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긴장으로 경직된 얼굴이 단숨에 풀리는 게 느껴질 정도로요.”

여긴 어딜 보아도 아름드리나무가 잔뜩이야. 거대하고 각자 다르게 생긴 나무들을 보면서 우린 신기해서 계속 사진을 찍었잖아.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그렇게 큰 나무를 작은 핸드폰에 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리고 그다음부터는 사진 찍는 것보다 실제 내 눈앞에 있는 나무를 좀더 관찰하려고 노력하고 있어. 그 나무들과 나의 물리적 크기 차이라든가, 잎의 모양이라든가, 가지를 뻗는 방식이라든가. 우리는 여기의 단순하고 규칙적인 일상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는 것 같아. 비일상이 일상이 되는 건 마법 같은 순간인 것 같아. 

여긴 해가 참 길어서 아침 일찍 눈이 떠지고, 저녁이 되어도 늦은 시간인 줄 모르다가 순식간에 졸려져서 일찍 잠들게 돼. 아, 그리고 매일 재밌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도 신기해. 요 며칠 이곳저곳 놀러 다녔던 바쁜 일정도 좋지만, 오늘처럼 빨래도 돌리고, 무엇을 먹을지 한참을 고민하고, 테라스에 앉아 있으면 금방 몸이 뜨끈해지는 것도 좋아. 나는 매일 내일이 왔으면 하는 마음과, 지나가는 매일이 아쉬워 오늘이 천천히 갔으면 하는 마음이 같이 들어. 나는 매일이 즐거운데, 너도 그럴지 궁금해.

산들 바람이 부는 나른한 오후에

너의 친구 하호하호가.

하호하호 

 

“함께 머무른 지 6일째 되는 날, 단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곳에서는 친구네 강아지 덕분에 하루에도 적게는 한두 번, 많게는 서너 번 산책을 나갔습니다. 주로 공원에 갔지요. 모두가 좋아하는 카페에 가기도 하고, 마트에 가기도 하고, 호수에도 갔어요. 그곳엔 오래된 나무들이 많았고, 마침 봄이어서 더욱 푸릇한 풍경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발걸음을 맞춰 걷던 날들이 만들어준 기꺼운 일상에서 오는 기쁨, 그리고 그 기쁨이 촘촘히 쌓여 즐거웠던 초록의 봄으로 기억됩니다.”

이곳에서의 생활도 일주일 조금 넘었어. 시차 때문인지 눈은 번쩍 떠지지만 몸을 일으켜 세우기 전까지 아주 느릿느릿 이불 속에서 뒹굴다가 부엌에 있는 테이블로 모이며 우리의 하루는 시작이 돼. 난 이 시작이 참 좋아. 잠은 잘 잤는지 그런 안부를 묻다가 아침을 만들어 먹고 커피를 내려 컵을 쥔 채 테라스에서 햇볕을 쬐고 작업을 하고 느긋하게 산책을 나서는 그런 일상은 한국에서 보내는 일상과는 또 다른 모습이야. 그래서 더 틈틈이 이곳의 사랑을 눈에 남겨두려 하고 있어. 분명 먼 혹은 가까운 미래에 이 순간들을 부러워할 내가 그려져서 꼼꼼하게 행복을 수집하게 돼. 다음 그리고 다음, 이 순간을 다시 마주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감히 미래를 점쳐보기도 해.

이 순간을 좀더 오래 누리고 싶은

단춤으로부터.

하호하호 

 

“익숙한 곳에서 각자의 일상을 살아가는 친구에게 편지를 쓰는 것과 낯선 곳에서 같은 일상을 보내는 친구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생각보다 많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더 궁금했어요. 여기서 어떤 감정으로, 어떤 생각을 하며 보내는지. 나는 이런데, 너는 어떤지 편지로 묻고 답했습니다. 함께 시간을 보내도 말로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편지로 쓰였어요.”

단춤

 

“한국에서부터 안고 온 위태로운 마음을 쉽게 내려두지 못했어요. 생경한 풍경을 만나며 더 불안해졌던 것 같아요. 평소였다면 그리 크게 반응하지 않았을 상황들도 커다랗게 느껴지니, 식사를 준비해 먹고 산책하고 여유 시간을 보내는 일상적인 하루만 바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호하호와 함께 한국에서 보내던 하루를 그대로 읊어갔어요. 친구들과 부엌 책상에 모여 눈물 나게 웃던 나날과 그 대화들은 평범하지만 비범한 시간으로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함께 일상을 보내는 것, 그것이 모두 다정으로 느껴졌어요.”

올겨울만 해도 난 다정을 잃은 사람이라며 스스로 자책하기 바빴는데 그저 감정을 마주 보는 용기가 필요했던 것 같아. 이곳에 와서 난 참 많은 다짐을 하고 사과를 하고 고맙다는 말을 했어. 실수를 마주하고 바라보는 것은 괴롭지만 나 자신을 응원하고 따스하게 이해하며 그렇게 하루를 살아갈 수 있길 바라고 있어. 이곳에서의 일상이 나를 이만큼 편하게 만들어주는데, 자연이 가득한 곳이라 그런 것 같진 않아. 함께하며 쌓아가는 순간들 덕에 감사한 하루를 보내게 돼. 고마워 정말. 

이곳에서의 일상도 얼마 남지 않았어. 벌써 아쉬운 기분이 드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이르게 잠드는 네가 밤을 새자고 하는데 이미 눈이 반쯤 감겨 있어. 너의 다짐에 웃어버려 미안해. 그렇지만 넌 정말 졸려 보였단다. 너의 남은 날들도 일상처럼 흘러가길, 꿈결 같은 날들을 보내길 바라고 있어. 잘 자, 좋은 꿈 꿔.

이미 잠들어 버린 너에게

단춤으로부터.

단춤

 

“많은 날이 남아 있다는 안도감에 신나서 쓰던 것과 달리 출국이 며칠 남지 않은 날엔 편지를 쓰면서 무척 아쉬웠어요.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만날 수 있지만 이곳에서의 시간은 마지막일 테니까요. 그날 밤을 붙잡고 싶었던 마음, 아직 출발하지 않은 열차의 시간이 멈추길 바라는 마음, 우리가 함께한 순간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보통의 편지는 받는 사람이 멀리 있거나 오랜만의 안부를 물을 때 보내곤 하잖아요. 반면 같은 여행길을 나선 친구는 붙어 있는 시간이 길다 보니 어떤 내용을 편지에 담을까 고민이 많았어요. 결국 스스로 정의 내리지 못한 나의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로 했죠. 그 시작과 과정 그리고 끝맺음을 편지에 담았고, 곧 상대에게 보내는 기록임과 동시에 자신에게 보내는 고백과 되새김질이 되었어요.”

한국에서의 너의 일상이 궁금해. 여행을 가기 전과 같은지, 가기 전과 다른지, 다르다면 어떻게 달라졌는지. 나는 아직 귀국하지 않았지만 귀국하면 전과 많이 달라질 것 같아. 새롭다는 것은 뭘까, 생각해 봤어. 이제는 별로 새로울 것이 없다고 거만하게 생각했는데, 네가 떠나고 나서 같은 곳, 같은 경험이어도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더라. 너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알게 된 점은 편지를 쓰는 것은 마음을 꼼꼼히 살펴보는 일인 것 같아. 나는 대체로 그렇지 않아서 이렇게 저렇게 주절대 보지만 아직 마음을 잘 살피지 못하는 것 같아. 그래도 네 덕에 이 편지를 쓰면서 행복, 용기, 다정과 같은 마음에 관한 단어를 곱씹어 보고 있어.

혼자 쓰는 방이 아직은 어색한

너의 친구 하호하호가.

하호하호 

 

“하루 종일 옆에 붙어 있던 사람이 없다는 건 이상했습니다. 작은 방을 복닥거리게 나눠 쓰던 때가 더 즐거웠고, 혼자 쓰게 된 작은 방은 크게만 느껴졌거든요. 별안간 여행길에서 집게손가락보다 작은 깻잎 몇 장을 옹기종기 모여 나눠 먹던 순간이 떠오릅니다. 그렇게 또 옹기종기 무리를 이룬 개미들처럼 모여 부지런히 밥해 먹고 싶어요.”

단춤

 

“누군가와 무언가를 함께한다는 일은 마음을 나누어 쓰는 일이기에 더 신중을 기하게 됩니다. 여행 속에서 일상을 보내는 사이 우리는 서로를, 그리고 스스로를 더 알아가게 되었지요. 여행은 늘 저에게 큰 반환점으로 남아 있습니다.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알아가는 일은 우물 안 개구리가 바깥을 알게 된 순간처럼 다채로운 놀라움으로 가득해요. 그 앞에 작아진 나를 발견하는 일은 언제나 어색하고 부끄럽습니다만, 처음으로 날것의 감정을 가벼이 다듬어 기록한 순간들이기에 의미가 있어요. 함께였기에 끝맺어진 이야기의 마침표를 오래오래 담아두고 싶습니다.”

Book—《낯선 일상이 보낸 편지》 단춤, 하호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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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명주

자료 제공 단춤, 하호하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