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고도 다른 이야기

예술가의 24시

수영장, 체육관, 코트, 운동장….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모인다. 하지만 그곳에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이야기란 없다. 우리가 서 있는 장소는 같을지라도, 바삐 내쉬는 숨과 쏟아지는 땀방울은 다른 이야기로 흐른다.

물 속을 헤엄치는

남자들

정지우
<4등>(2014)

"근데 지금은 진짜 일등하고 싶어요.

그래야지 수영을 계속 할 수 있으니까요."

한 아이가 수영장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헤엄친다. 발바닥으로 벽을 힘차게 차 나아가고, 팔을 유연하게 뻗어 결승점에 가 닿는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도중,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엄마의 찌푸린 얼굴. 이번에도 4등이다. 수영 대회만 나가면 4등을 하는 준호는 새로운 코치와 시합을 준비한다. 그런데 준호를 아낀다던 코치는 손에 무언가를 쥐기 시작한다. 그걸로 자꾸만 준호를, 한 사람을 내려친다. 부어오른 허벅지를 모른 척하는 엄마를 보니 준호는 어째 마음이 더 아프다.

사실 이기는 방법 같은 거 잘 모른다. 수영이 좋았기 때문에 헤엄쳤던 준호는 잔혹한 수업을 피해 도망친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시. 좋아하던 게 끔찍해질까 봐 도망쳤던 준호는 그저 수영이 좋았기 때문에 코치에게 돌아간다. 다시 헤엄칠 수 있게 부모님을 설득해 달라는 말에 코치가 답한다. “니 혼자 해봐라. 메달 딴디.” 준호는 혼자가 되어 물에 뛰어든다. 그리고 레일을 벗어나 자유로이 헤엄친다.

대회 당일, 수많은 사람의 수많은 헤엄이 지나고 결과가 일렬로 줄 선다. 아이의 기록은 맨 앞에 서 있다. 아이를 바로 세우는 건 어른의 난폭함이 아니다. 거울을 바라보던 준호는 이제는 더 이상 아프지 않은 아이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짓는다. 단지 이겼기 때문이 아니라, 이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스스로에게 증명해 냈기에.

물 속을 헤엄치는

남자들

질 를르슈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2018)

"참가만 하겠다고?

참가는 아무나 하는 줄 아나? 나갔으면 이겨야지!"

또 다른 남자가 수영장 물속으로 미끄러진 듯 빠진다. 뜨기 위해 물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발을 구르는 사람들과 달리, 남자는 공허한 얼굴로 물 안에 잠겨 있다 맥없이 떠오른다. 중년 남자의 이름은 베르트랑. 사랑하는 가족과 우울증만이 그의 지루한 일상에 머문다. 베르트랑은 딸의 수영 수업을 기다리다 남성 수중 발레 회원 모집 포스터를 목격한다. ʻ우리 우승했어요!’라며 환히 웃는 모습. 일상을 짓누르는 패배감을 물속에 퐁당 빠뜨리고 싶은 베르트랑은 그곳으로 향한다.

사실 이기는 방법 같은 거 잘 모른다. 무작정 시작한 수중 발레 팀에는 남자 일곱 명이 더 있다. 예민하고 까칠한, 존재감이 없는, 사업에 실패한, 무명 가수…. 달라도 너무 다른 그들은 ʻ남자 수중 발레 세계선수권’에서 우승하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혹독한 코치 아만다의 지휘 아래, 다른 듯 보였던 여덟 명의 남자는 팔과 다리의 동작이 같아지다가 마음의 방향과 일상을 대하는 시선도 같아진다.

대회 당일, 수많은 사람의 수많은 헤엄이 지나고 결과가 일렬로 줄 선다. 남자들의 기록은 맨 앞에 서 있다. 금빛 메달을 목에 건 그들은 아마도 다시는 이런 관심을 받지 못할 거라 생각하면서도 서로를 향해 반짝이는 미소를 짓는다. 단지 이겼기 때문이 아니라, 이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스스로에게 증명해 냈기에.

링 위에 오르는

여자들

타케 마사하루
<백엔의 사랑>(2016)

"서로 싸우고 또 서로 어깨도 두드려주고

그런 모습들. 왠지 그런 걸 하고 싶더라고."

한 여자가 글러브를 고쳐 맨다. 그녀의 이름은 이치코. 이치코는 꿈도, 직장도, 친구도, 취미도 어느 하나 있을 법한 것도 전부 없는 무기력한 일상을 보낸다. 좋아하는 사람인 카노의 복싱 은퇴 경기를 보러 간 그녀는 우연히 마음이 머무는 순간을 만난다. 매서운 눈으로 치고받던 선수들이 경기가 끝나자 서로 꼭 안아주는 장면. 그 길로 동네 체육관에서 복싱을 배우기 시작하지만 게으르고 무기력한 태도는 여전하다.

증오가 없으면 주먹을 날릴 수 없다. 제멋대로 애정을 휘두르던 카노가 떠난 후, 이치코는 분노인지 해방감인지 모르는 심정으로 복싱 훈련에 몰두한다. 섀도복싱은 점점 민첩해지고 줄넘기가 빨라졌다. 얼굴에는 생기도 돈다. 흘러내리는 머리를 바짝 자른 채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일 대회에 나선 이치코는 상대에게 펀치를 맞아 쓰러진다. 지난날의 뿌연 기억들을 원동력 삼아 한 번 더 일어선 순간, 게임은 끝난다.

상처 가득한 얼굴의 이치코는 링 아래로 내려온다. 속상하지만 한편으로 안도한다. 자신을 쓰러뜨린 상대에게 다가가 꼭 껴안고 온기를 나눴으니까, 누군가는 대단찮은 일이라 할지라도 내 손으로 직접 얻어낸 거니까. 자신과 치열하게 부딪혀 본 감각은 내가 이 세상 어딘가를 부유하는 존재가 아닌, 땅에 발을 붙이고 제대로 하루를 살아낸 존재라는 짙은 증명이 된다. 단 한 번이라도 이기고 싶었다며 엉엉 우는 이치코, 세상을 향한 아우성에서 과거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링 위에 오르는

여자들

미야케 쇼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2023)

“나도 강하지 않아.”

또 다른 여자가 글러브를 고쳐 맨다. 그녀의 이름은 케이코. 1945년부터 운영됐다던 체육관은 기구를 사용할 때마다 난폭한 쇳소리가 귀를 찔러댄다. 물론 선천적 감음 난청으로 귀가 들리지 않는 복서 케이코에게는 그 어떠한 소음도 문제 되지 않는다. 프로 복서 데뷔전에서 1분 52초 만에 KO 승리를 따냈던 케이코는 영광의 순간을 잊은 듯 매 순간 메마른 얼굴이다. 정직하고 성실하지만 열정의 잔해도 찾기 힘들다. 

싸울 마음이 없으면 복싱을 할 수 없다. 이기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전력으로 부딪혀 오는 상대에게도 예의가 아니다. 다만 체육관의 울타리 바깥에서는 듣지 못하는 사람으로서 철저하게 소외되기에 복싱이라는 끈을 쉽게 놓을 수 없다. 앞으로 나아갈 수도, 과감히 멈출 수도 없는 상황을 헤매던 케이코에게 체육관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이 닿는다. 마지막 경기일지도 모르는 링 위에 선 케이코는 아주 완벽하게 진다.

상처 가득한 얼굴의 케이코는 링 아래로 내려온다. 분하지만 한편으로 후련하다. 그동안 미뤄둔 문제의 속을 들여다볼 시간을 번 셈이다. 쓰러뜨릴 상대를 모른 채 내지르는 펀치만큼 위태로운 것은 없으니까. 매일 뛰던 산책로에 앉아 사라진 체육관 속 동료들의 사진을 보던 케이코는 눈시울을 붉힌다. 언제나 강하지 않아도 좋고 매번 이기지 않아도 좋다. 눈물을 삼킨 얼굴로 번쩍 일어나 달리기 시작한 케이코, 작아지는 뒷모습에서 다시금 백열의 불씨가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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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명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