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거나 무겁거나

Music Around Us

근 몇 달간 책을 하나둘 중고 서점에 팔고 있다.

10권에서 많으면 15권 정도 들고 가면 1만 원, 운 좋으면 2-3만 원이 내 손에 쥐어진다. 이 돈으로 좋은 안주 주문해서 주말에 기쁜 마음으로 술 한잔한다. 요즘 가장 큰 보람 중에 하나다. 버리는 게 아니다. 책은 더 좋은 주인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책을 좋아하는 편이다. 나에게는 반드시 지키는 습관이 몇 있다. 그중 하나가 독서 시간 준수다. 날마다 최소 1시간 정도는 반드시 책을 읽는다. 나는 친구가 많지 않다. 약속이 거의 없기 때문에 한 달로 치면 30시간 정도를 독서로 채운다. 장르 무관이다. 예를 들어 내가 가장 많이 되풀이해 읽은 책은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다. 대학원 공부를 위해 소설과 희곡도 읽어야 한다. 비평 서적과 에세이 등도 틈틈이 읽는다. 내 생각에 대한민국에서 한글로 글 제일 잘 쓰는 사람은 문학평론가 신형철과 소설가 김훈이다. 두 작가의 책은 하나도 빠짐없이 마르고 닳도록 읽었다.

중고 서점에 책을 파는 주제에 혓바닥이 길다고 생각할 수 있을 터다. 그래서 ‘좋아한다’라고 적지 않고 ‘좋아하는 편’이라고 썼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나는 책을 좋아하는 만큼 게임을 애정한다. 게임을 애정하는 만큼 축구 보는 걸 선호한다. 축구 보는 걸 즐기는 만큼 NBA 시청도 잊지 않는다. 우리 집엔 만화책이 많다. 5,000권은 넘는다. 만화책은 단 한 권도 팔지 않았다. 가끔 지인에게 만화책을 빌려줄 때면 이 말을 잊지 않고 덧붙인다. “책은 반납 안 해도 되지만 만화책은 반납 안 하면 사형.”

요컨대 나는 책이 다른 매체에 비해 우월하다는 믿음을 예전에 버렸다. 한때는 나도 독서야말로 지성인이 되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른바 다독가 중 인간적으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경우를 여럿 봤다. 반면 책이라고는 거의 안 읽은 누군가의 행동으로부터 철학자의 아우라를 발견했다. 

심지어 책에도 등급이 나뉜다. 사람들은 웹 소설 기반의 드라마에 열광하면서도 웹 소설을 속된 말로 출판 소설만큼 쳐주지 않는다. 뭔가 정통이 아닌 이단을 보듯 대한다. 그렇지 않나. 인생 (웹 소설 기반) 드라마는 있을지언정 ‘인생 웹 소설’이라고 밝히는 사람은 희한하게 많지 않다. 어쨌든 핵심은 이렇다. 그것이 출판 소설이든 웹 소설이든 SF 소설이든 판타지든 장르나 분야에 본질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공자님 말씀 전한다. “책을 읽기 전의 나와 책을 읽은 후의 내가 같다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감히 반론하자면 반만 맞았다고 생각한다. 우선 대전제에는 동의한다. 그러니까, 문제는 ‘나’라는 것이다. AI 와 똑같다. AI 는 죄가 없다. 그것이 백마법이 될지, 흑마법이 될지는 어디까지나 인간에게 달린 문제다. 다만, 공자님은 다음 같은 진실을 간과하셨다. 책이 반드시 나라는 사람을 바꿔야 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물론 내 인생을 뿌리부터 송두리째 흔드는 독서는 필요하다. 그러나 그런 독서만 하다 보면 숨이 막힌다. 좀 갑갑해진다. 따라서 가벼운 독서를 가끔씩 섞어줘야 한다. 비유하자면 잔재미 같은 독서. 이런 독서가 숨통이 되어줄 것이다.

나중 각 잡고 독서할 때를 위한 준비운동이 되어줄 것이다. 때로는 가볍고, 날렵하게, 때로는 무겁고, 진중하게, 이것이 바로 책을 대하는 나의 자세다. 여기, 언뜻 가볍게 보이지만 내용이 가볍지만은 않은, 음악 관련 만화책 두 편 소개한다.

《파도여 들어다오》

음악 만화는 아니다. 라디오에 대한 만화다. 라디오 작가를 한 지 어느덧 20년이 다 되어간다. 나에겐 필수템인 셈이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음악과 라디오는 불가분의 관계다. 따라서 만화를 보면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리즈 페어Liz Phair의 ‘White Chocolate Space Egg’가 대표적이다. 이야기는 좀 어처구니없고, 황당무계하다. 일본 삿포로의 수프카레집 직원이자 화끈한 성격을 지닌 ‘코다 미나레’가 술집에서 만난 낯선 남자와 술에 취해 얘기를 하게 됐는데 알고 보니 이 괴짜 같은 남자가 라디오 PD였다는 게 주된 스토리다. ‘완전히 새로운 DJ 를 발굴하고 싶다’는 욕망 하에 그는 코다 미나레를 DJ 로 전격 데뷔시킨다. 아니나 다를까. 코다 미나레는 기존 DJ와는 완전히 다른 매력으로 청취자를 사로잡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 엉성한 사이비 종교 집단과 얽히기도 하는 등 가볍게 읽을 만한 책이라고 보면 된다. 작가는 사무라 히로아키다. 전설적인 만화《무한의 주인》으로 특히 유명하다.

©Hiroaki Samura/Kodansha Ltd.

《블루 자이언트》

단언할 수 있다. 여러분도 책에서 소개하는 재즈 명곡 하나쯤은 곧장 찾아 듣고 싶어질 것이다. 나도 읽으면서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의 [Kind of Blue](1959)와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의 [Giant Steps](1960)를 오랜만에 꺼내서 감상했다. 작품 제목은 이 둘을 합친 것이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거다. 비록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이 주인공이 재즈를 어떻게 연주하고 있는지 말이다. 하나 더 있다. 책을 보면서 몇 번이나 눈물 지었는지 모른다. 이렇게 설명하고 싶다. 분야에 상관없이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의 현재를 마주할 때마다 울컥하는 횟수가 과거에 비해 현저히 늘었다. 나이 먹었다는 증거다. 음악까지 듣고 싶다면 작년 꽤 화제를 모았던 애니메이션을 보면 된다. 애니메이션 음악은 그래미 수상 경력의 재즈 뮤지션 히로미Hiromi가 맡았다.

BLUE GIANT ©2019 Shinichi ISHIZUKA/SHOGAKUK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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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배순탁―음악평론가 · 〈배철수의 음악캠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