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Y OF SEEING

다르게 보는 법

다르게 보는 법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나는 자주 현기증을 느꼈다. 온전하게 작품을 감상하기보다 그에 대한 해설을 읽고 이해하는 데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아야 했기 때문이다. 한번은 우연한 기회에 수도원 건물을 개조한 작은 박물관을 방문하게 되었다. 중세의 느낌을 그대로 간직한 그곳에서 한 남자를 만났다. 그는 벽돌로 이뤄진 방과 방 사이를 넘나들며 열심히 눈앞의 작품을 그리는 중이었는데 마치 자신의 노트 안에 작품을 옮겨 담는 것처럼 보였다. 해설을 읽거나 사진을 찍는 법도 없었다. 그의 감상법을 곁눈질로 훔쳐보던 나는 처음으로 틀 안에 갇힌 시선을 꺼내 ‘다르게’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전시가 재미없던 이유

여행은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나라 간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몇 개의 글자와 숫자로 나를 증명하고 정해진 자리에 앉아 같은 메뉴의 기내식을 먹어야 하는 것부터가 그랬다. 그중에서도 나를 가장 자유와 멀어지게 만든 건 바로 ‘작품’들이었다. 들어서자마자 여행자를 압도하는 크고 넓은 공간, 그 안에서 엄격한 훈련을 받은 군인처럼 제자리를 지키고 선 조각상, 연대순 혹은 사조별로 나열된 수많은 작품 사이를 걷다 보면 ‘나’라는 존재는 점점 사라졌다. 그럼에도 모든 공간을 둘러봐야 한다는 애꿎은 의무감에 작품 해설이 담긴 오디오를 한 손에 꼭 쥐고 설명에 귀 기울였다. 유명한 작품 A, 화가의 이름은 B, 당시 배경은 C, 옆에 있는 개 한 마리가 나타내는 건 D, 행여 놓칠세라 전문가의 해설에 따라 눈으로 좇던 나는 이 멋진 작품에서 모두가 같은 것을 봐야 한다는 사실에 답답함을 느꼈다. 만약 전문가와 다른 시선으로 작품을 바라본다면 그건 틀린 걸까, 역사적 가치를 지닌 명화 앞에서 감탄을 쏟아내지 않는다면 교양이 부족한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도 어느새 다음 전시관으로 가기 위해 바쁜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한 여인의 초상화를 보게 되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처음 만난 ‘모나리자’는 생각보다 작았고, 그 앞에 모여든 사람들이 사진을 찍어대느라 몹시 분주했으며, 나는 그 너머로 눈썹이 없는 그녀의 이마만 한참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작품이 아닌 앞사람의 뒤통수를 보며 대기하는 진풍경 속에서 회의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어느 미술사가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는 평소 좋아하던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고 싶어서 공부에 매진했지만, 작품에 대해 새로운 뭔가를 알게 될 때마다 이전에 느꼈던 감정을 서서히 잃어갔다고 고백했다. 경험은 생각하는 게 아니라 느끼는 것이기에 강렬한데, 언어로 설명하기 시작하면서 감정이 사라지고 기억들은 해체되었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 읽은 『영혼의 미술관』에서는 이렇게 딱딱한 전시 환경과 감상법에서 오는 아쉬움을 지적하고, 애초에 인간에게서 비롯된 예술이 다시 우리 삶으로 귀환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미술관을 층별로 ‘고통, 자비, 두려움, 사랑, 자기 이해’ 등 사람의 감정선에 따라 재구성해보자는 식이다. 작품 해설도 기법이나 양식, 미술사적 가치보다 그가 왜 이 그림을 그렸는지 간단히 일러주는 정도의 내용으로만 대신하고 말이다. 그의 제안대로라면 예술작품이 더 이상 경외의 대상이 아닌 경험의 대상이 되어 좀 더 가까이 와 닿을지도 모를 일이다.

미술은 경험을 보존하는 방식이며, 우리 주변에는 일시적이고 아름다운 경험이 많은데, 그런 경험을 마음에 담으려면 도움이 필요하다. 이는 물을 나르는 일과 그 일을 도와주는 도구에 비유할 수 있다. (중략) 오늘날 미술관들은 희귀한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다는 말로 방문객을 끌어들이려 한다. 자기들에게 훌륭하고 특이하고 흔치 않은 작품들이 있다고 넌지시 말한다. 그러나 진정 이상적인 미술관이라면 훌륭하고 중요한 것들을 매우 일상적인 것으로 만들고 널리 보급하는 쪽으로 나아갈 것이다.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높은 벽 뒤에 보물을 쌓는 일에 열정을 쏟는 대신, 예술작품의 가치를 이 세계에 보다 널리 전파하는 데 전념할 것이다. 진정한 예술 애호가라면 미술관의 상대적 중요성을 낮추는 데 사명을 두어야 한다. 현재 그곳에 수집된 지혜와 통찰은 애지중지 보호하고 미신처럼 숭배할 것이 아니라, 관대하게 아낌없이 세상에 퍼뜨려야 하기 때문이다.

– 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중에서

오름과 고래

그런 의미에서 지난겨울에 방문한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은 가치를 둔 대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곳이었다. 버려진 초등학교를 개조한 이곳은 루게릭병 진단을 받고도 제주의 풍경을 찍는 일을 멈추지 않았던 사진작가 김영갑이 정성을 다해 가꾼 공간이었다. 두모악이라는 명칭은 한라산의 옛 이름에서 따왔다고. 작품 아래 돌무더기가 쌓여있고 이따금 바람이 지나가는 소박한 내부로 들어서면 특별한 설명 없이도 그가 얼마나 자연을 동경했는지,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얼마나 강인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살아생전 그가 가장 좋아했던 풍경은 ‘오름’이다. 당시 오름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고, 동물에게 풀을 먹이는 목동, 들녘에서 일하는 농부를 먼발치에서 보는 것이 전부일 만큼 한적했다고 한다. 작가는 그 후로 20년간 점점 퇴화하는 근육을 이끌고 제주 사람들의 삶의 무대인 중산간 오름을 관찰했다. 그러다 더 이상 밖에 나설 수 없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의 작업이 끝났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시작이었다. 그동안 마주했던 풍경을 기억에서 하나둘 꺼내어보던 그는 오히려 정신적으로 자연과 더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온종일 깊은 생각에 잠겨 내 자신을 들여다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나만이 가진 것은 무엇일까, 그동안 보고 느끼고 깨달은 것은 무엇인가! 가만히 들여다볼 뿐 무엇을 보려고 느끼려고 깨달으려고 하지 않는다. 남들에게도 강요하지 않는다. 보고 싶으면 보고 느끼고 싶으면 느끼고 깨닫고 싶으면 깨달으면 된다. (중략) 침대에 누워 지내는 동안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어서 편안하고 즐겁다. 두 눈으로 보았고, 두 귀로 들었고, 두 손으로 만져보고, 두 개의 콧구멍으로 맡아보고, 온몸으로 느껴보았기에 확신했던 것들이 진짜배기가 아니라 허드레한 것이었음을 알았다. 20년 동안 오름 하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나도 모르면서 두 개 세 개 욕심을 부렸다. 중산간 오름 모두를 이해하고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표현하겠다는 조급함에 허둥대었다. 침대에 누워 지내지 않았다면 지금도 그 같은 과오를 범했을 것이다.

– 김영갑

20년간 오름을 보고도 다 이해하지 못했다는 그의 말은, 소설 『모비딕』에서 평생 고래를 쫓은 뱃사람 에이해브의 탄식과도 일치했다. ‘나는 고래를 모른다. 앞으로도 영원히 모를 것이다. 고래의 꼬리조차 모르는데 어떻게 머리를 알 수 있겠는가!’ 나는 작품에 대해 열심히 이해하고자 했던 지난 노력을 돌이켜보며 의문이 생겼다. 평생을 따라다녀도 알 수 없다면, 어떤 대상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우리가 보는 건 어쩌면 커다란 고래의 꼬리처럼 극히 일부분이 아닐까?

우리들의 눈

일부만 보고 전체를 말하는 상황을 빗대어 흔히 ‘장님 코끼리 만지듯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코끼리의 모습을 모르는 상태에서 자유롭게 표현하는 방식이 오히려 세상에 없던 것을 창조하고 그 본질에 다가서게 한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전체를 보든, 일부를 보든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로 이해하기 위해 애쓰기보다 그저 느끼는 대로 보면 되는 것이었다. 시각장애가 있는 13살 소년이 만든 작품 <우주를 탐험하고 온 코끼리>를 보았을 때 나는 그동안 가졌던 수많은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은 기분이었다. 소년은 한 번도 그림을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지만 이미 예술가의 영역에 있었다. 다만 ‘본다’는 개념에 대해 조금 다른 시각을 갖고 있을 뿐이었다. 이는 소년과 지도 교사가 나눈 대화의 일부다.
“달리Salvador Dali라는 스페인 화가는 보이는 대로 그리지 않고 여러 가지 느낌을 섞어서 세상에 없던 것을 만들어냈어. 그런 사람을 초현실주의 작가라고 하는데, 초현실주의가 뭘까?” “상상하는 것 아니에요?” “맞아. 달리가 만든 <우주코끼리>도 지금 네 작품처럼 가느다란 다리를 가진 코끼리야.

원래는 굵지만 말이야.” “그럼 우리는 달리가 상상한 것을 또 상상하며 만들 수도 있겠네요?”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기’라는 이름으로 6년째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본 프로젝트는, 안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미술에서 소외된 시각장애인들의 교육과 창작 활동을 지원하는 단체 ‘우리들의 눈 Another way of seeing’에서 진행해왔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어떻게 작품을 표현하는지 알고 싶은 호기심에 시작한 작업이 지금은 예술의 무한한 가능성을 증명하는 일이 되었다고. 시각장애가 있는 아이들은 만지고, 듣고, 냄새 맡고, 들리는 것을 그리고 온몸으로 느껴지는 바를 자유로이 표현하고 있었다. 예술작품에서 누가, 언제, 어떻게 만들었는가만큼 중요한 것이 ‘무엇을 말하는가’라면 이들의 작업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우리들의 눈’은 세상에는 다양한 시선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오히려 ‘맹인이 볼 수 있는 것을 눈 뜬 우리가 볼 수 있는가’라는 새로운 화두를 던지면서 말이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다르게 보는 법’은 누군가 가르쳐주거나 텍스트로 이뤄진 설명으로 얻어지는 게 아님을.

영혼의 미술관
알랭 드 보통, 존 암스트롱 지음 | 문학동네 | 240쪽 | 규격 외 변형
우리의 고단한 삶을 보듬어 안고, 한편으로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예술의 치유기능에 관해 써 내려간 책. 철학적 글쓰기로 유명한 작가 알랭 드 보통과 미술사가 존 암스트롱은 우리가 미술을 즐기는 방식과 시스템, 시장 나아가 사회적 요소를 짚어가며 예술의 숭고한 가치를 재정립한다.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삼달리
Tel 064 784 9907
www.dumoak.co.kr

우리들의 눈
서울시 종로구 북촌로5나길 19
Tel 02 733 1996
www.artblind.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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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디터 오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