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lking along the sea

어떤 날 제주 바다를 따라 걸었다

제주에도 시외버스터미널이 있다. 여기서 버스를 탄다 하더라도 부산이나 전주에 갈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멀리 바다로, 오름으로, 한라산에도 간다. 그중에서 700번 일주버스를 타면 바다를 따라 제주를 돌아볼 수 있다. 일주버스는 터미널에서부터 동쪽으로 가는 것과 서쪽으로 가는 것, 두 개의 노선이 있다. 서쪽으로 가서 협재해수욕장 혹은 모슬포항으로 갈지, 동쪽으로 가서 함덕해수욕장이나 성산일출봉에 갈지는 터미널에 도착해서 정해도 늦지 않는다.나는 주로 동쪽으로 가는 버스를 탄다. 동쪽에는 나를 제주에 살게 한 마을이 있다. 그리고 그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아름다운 바다가 있다.

바다와 가장 가까운 오일장

매달 5일, 10일은 제주 동쪽의 구좌읍 세화리에서 오일장이 열리는 날이다. 서랍에서 장바구니를 꺼내 접어 가방에 넣고 편한 신발을 신고 집을 나선 나는, 700번 버스에 올랐다. 해안선을 따라 달리는 노선이라 주말에는 대개 여행객들이 많이 타는 편인데, 장이 열리는 날이면 버스에는 여행객 대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아진다. 터미널에서 세화리까지 가는 한 시간 남짓 동안 할머니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느라 앉았다 섰다를 반복한다. 옆자리에 앉으신 할머니께 묻는다. “오일장 가려면 어디서 내려야 해요?” 마침 그곳에 내리신다는 할머니, 정류장 앞에서 손을 뻗어 일러주신다 “저쪽으로 가면 돼.” 손길을 따라 멀리 바다가 느껴지는 방향으로 걸었다.

오일장에 가기 전에 들를 곳이 있다. 마침 이날은 5일. 매달 5일 오전에는 세화오일장 근처 카페 ‘커피공작소’에서 작은 장이 하나 더 열린다. 제주 동쪽에 사는 이주민들이 모여서 여는 작은 벼룩시장인 벨롱장. 마당에서 캔 고구마도 팔고, 집에서 만든 귤 잼도 팔고, 직접 뜬 모자도 판다. 벨롱이라는 말은 제주어로 ‘반짝’ ‘깜빡거리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래서인가, 오전 11시부터 1시간 동안 반짝 열리고 사라진다. 이곳은 잠시 물건을 사고팔기 위한 장터이기도 하지만, 제주 동쪽의 사람들이 띄엄띄엄 각자의 마을에서 살다가 오랜만에 서로 얼굴을 보며 안부를 확인하는 곳이기도 하다

왁자지껄 따뜻한 공기가 카페를 가득 채우고 있다. 제주에 이사 온 지 겨우 한 달이 조금 넘은 나에게 안부를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눈이 마주치자 자주 가는 평대리 카페 주인장이 저 멀리서 눈인사를 한다. 

“오후에 커피 마시러 갈게요.”

라고 말하며 귤 잼을 한 병 사서 나왔다.벨롱장에서 나와 바로 옆 오일장으로 향한다. 여느 오일장처럼 생선도 팔고, 귤도 팔고, 옷도 팔고, 신발도 파는 평범한 모습

제주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시장이라는데, 과연 길 하나만 건너면 바다다. 이것저것 둘러보다 구제 청재킷이 마음에 들어 몇 번을 만지작거리기도 했지만 단추가 하나 떨어졌는데도 값을 깎아주지 않아서 그냥 돌아 나왔다. 다음 장날에 가도 분명 그 자리에 있을 것 같다. 청재킷을 금세 잊고서 고기국수를 먹을까, 떡볶이를 먹을까 하다가 분식집에서 떡볶이 한 접시를 먹고 왔다. 나오는 길에 보니, 시장 입구에 사람이 바글바글한 국밥집이 하나 있다. 다음엔 저기 가서 한 그릇 먹어야지. 그때는 오랜만에 만난 지인과 함께여도 괜찮겠다.

세화 바다의 까만 돌 고양이

옥색 바다와 하얀 모래, 검은 돌, 그리고 초록 이끼가 한데 어우러져 있는 아름다운 세화 바다. 무턱대고 나온 나들이라 세화 바다는 만조의 시간이었다. 만조와 간조의 바다는 전혀 다르다. 만조 때는 그냥 지나치고 말 평범한 해변이 간조 때는 제 매력을 뽐내며 반짝이기 시작한다. 제주에서 바다를 보려면 가능한 물때를 맞추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만조의 세화 바다 앞에서 했다. 지난번 세화 바다에 왔을 땐 마침 간조 때였다. 이미 무르익은 가을이었지만 신발과 양말을 벗고 맨발로 해변을 걸었다.

헤엄치는 물고기마저 투명하게 보이는 세화 바닷물은 짠맛조차 느껴지지 않을 것처럼 맑다. 얕은 바다를 맨발로 걷다가 바다를 등지고 돌아 나오는데 까만 고양이가 마을 쪽에서 바다를 보며 서 있었다. 처음엔 제주에서도 유난히 까만 돌인 줄 알았다. 이 아름다운 옥색 바다를 매일 보며 사는 저 까만 돌 고양이는 이 바다가 아름답다는 걸 알고 있을까. 말을 걸고 싶어서 가까이 다가가자 휙 돌아서 달아난다. 내가 고양이의 사색을 방해했구나, 미안해진다.

아주 사소한 시간

세화리에서 평대리까지는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 주로 차를 타고 다니던 동쪽 해안 도로를 이번에는 천천히 따라 걷는다. 오름 능선만큼이나 아름다운 곡선을 만날 수 있는 길이다. 걷다가 멈춰 뒤를 한번 바라보는 버릇이 있는데, 이 길에서 뒤를 돌아보면 바다와 하늘과 제주의 돌과 까만 아스팔트가 함께 휘어지는 날씬한 곡선과 마주치게 된다. 눈이 시원해진다. 이 길은 올레 20코스(김녕 서포구에서 해녀박물관까지 이어지는 길, 16킬로미터 정도)의 일부이기도 하다.2년 전 제주를 여행할 때 평대리의 작은 게스트하우스에서 이틀 밤을 묵었다. 단정한 작은 온돌방에 짐을 풀고 가벼운 마음으로 숙소를 나섰다. 

오후 네다섯 시쯤, 해가 지기 전의 늦은 오후였다. 마을을 걷던 삼십 분 남짓의 시간, 그 공기가 지금도 생생하다. 바람 하나, 구름 한 점, 흔들리던 나뭇잎의 움직임까지 속속들이 기억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방에 풀어놓은 짐 그대로 여기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동네 어귀 정자나무 아래 앉아 마을 할아버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돌담 넘어 빨간 고추를 말리고 있는 할머니 옆에 쪼그리고 앉아 함께 고추를 너는, 소박한 꿈을 꾸었다. 그러다 그 길의 끝에서 카페를 하나 만났다. 작은 농가주택을 얌전하게 고친 집. 바로 앞집 지붕 너머엔 바다가 보였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동네 골목을 천천히 걸어 그 카페에 가, 반쯤 기대앉아 커피를 마시며 멍하니 앉아있거나 책을 읽었다. 말은 많이 하지 않았다. 그 후로도 평대리에 가면 말이 줄어든다. 이날도 그랬다. 천천히 마을을 걸었다. 집집마다 담벼락엔 늙은 호박이 볕을 쬐고 있고, 마을 곳곳의 당근밭은 푸릇푸릇 생기를 뿜어내고 있다. 마을 어디에나 있는, 꼬리를 흔들며 천방지축 뛰어다니는 강아지에게 가방에 넣고 다니는 사료를 나눠주며 앉아있자니 저 너머에 얌전한 집이 눈에 들어온다.

 그곳에 사는 나를 상상해보다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와 고개를 숙여 괜히 강아지 목덜미를 쓰다듬었다.돌담을 따라 ‘아일랜드 조르바’에 갔다. “걸어왔어요?” 마당으로 들어서는 나를 보더니 오전에 세화 벨롱장에서 만난 주인장이 문 앞에 나와 반긴다. “네에, 댕유자에이드 주세요.” 세화리 바다에서 시작되어 평대리 작은 카페에서 끝나는,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아름답고 평범한 산책길. 길에서 만난 모든 것들과 인사를 나누다 보니 한 시간이면 걸을 이 길이 하염없이 길어졌다. 이제 마당 평상에 고양이처럼 조용히 앉아 흘러가는 구름의 움직임에 따라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햇볕을 가만히 느끼는 시간만 남았다. 아주 사소한 시간이 될 것이다.

TIP
700번 일주 버스는 20분에 한 대씩 운영한다. 시외버스터미널이 아니
더라도 버스가 지나가는 정류장이라면 어디에서든 탈 수 있다. 버스를 탈 때는 미리 행선지를 말하고 요금을 지불하는데, 행선지에 따라 1,000원에서 3,000원의 요금이 차등 적용된다. 교통카드도 사용할 수 있다. 매달 5, 10일에 열리는 세화오일장에 가기 위해서는 ‘세화 버스정류장’
에 내리면 된다.

하도리, 세화리, 평대리, 한동리 등 구좌읍 구석구석에는 개성 있는 식당과 카페들이 많은데 ‘오늘 아침 한라산에 눈이 와서 눈 보러 가요’, ‘죄송해요. 오늘은 바다 보러 갑니다.’ 하는 팻말을 걸고 예고 없이 영업을 쉬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제주 동쪽 구좌를 여행할 때는 ‘허탕 쳐도 괜찮아’ 하는 한가로운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바다타임www.badatime.com’이라는 사이트에서 매일매일 간조와 만조의 시간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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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전진우

글·사진 정다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