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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한 즐거움
50대에 처음 파도를 타게 된 만화가와,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닷속 깊은 곳에서 문어와 친구가 된 영화감독의 이야기를 들었다. 중년의 나이에 난데없는 취미가, 매일 그걸 하고 싶어 안달이 나는 열정적인 취미가 생긴 이유가 궁금해졌다.
만화가 이우일은 내게 좀 특별한 존재다. 내가 20대 중반일 때, 이미 유명한 만화가인 그를 나는 슬며시 동경했다. 어린아이들이 성공한 이들을 동경하는 것처럼 동경했다. 나는 언제나 돈이 많거나 높은 직위에 오른 이들보다 멋있는 이들에게 관심이 많았고, 이우일과 그의 아내 선현경과 딸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들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 시절 내가 어느 잡지사에서 기자 생활을 할 때, 내 앞자리 선배가 이우일의 인터뷰를 하러 간 적이 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온 선배가 이우일이 한수희라는 사람이 쓴 섹스 칼럼을 재미있게 읽고 있다고 전해줘서(야하기보다는 재미있는 칼럼이었습니다. 믿어 주세요), 나는 무척 기뻤다. 하지만 동시에 절대로 그 사람을 직접 만나서는 안 되겠다고(글과 현실의 괴리…) 다짐했던 기억도 난다.
이제 나는 잡지 기자도 아니고 섹스 칼럼도 안 쓰고 섹스 따위에 대해서는 할 말도 없다. 나는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어 차곡차곡 늙어가고 있다. 그 와중에 이우일과 선현경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 소식은 인스타그램을 통해 알고 있다. 그들은 어느 해에는 미국 포틀랜드(퐅랜이라고 했다, 그는)에 있었고 또 어느 해에는 하와이에서 파도를 타고 있었다. 음? 파도를? 코로나19 시국에 다시 서울로 돌아온 그들은 여전히 파도를 타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 날에는 제주에 있었고, 어느 날에는 동해에, 어느 날에는 또 서해에 있었다. 아니, 이 사람들은 대체 뭘 해서 먹고살길래 이렇게 맨날 놀고 먹고 파도만 타고 있는가, 하고 나는 궁금해했다(사실 지금도 좀 궁금합니다).
얼마 전 이우일은 《파도수집노트》라는 책을 냈다. 책은 만듦새부터가 이우일을 닮았다. 실로 묶은 것처럼 특이하게 철해져 있고, 글씨는 작고 사사롭다. 연필과 색연필과 물감으로 그린 것 같은 파도와 파도타기를 하는 이의 그림은 수수하고 평화롭다. 어깨에도 눈에도 목에도 팔에도 손에도 힘이 빠진 그림이다. 욕심도 욕망도 없어 보이는 그림이다. 나는 이 책이 소년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나이 든 소년을. 치기 대신 겸손한 즐거움으로 가득한 나이 든 소년의 책. 그렇게 이우일은 나이 든 소년이 되었고, 나는 이 사람이 그렇게 늙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나는 그의 삶을 동경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동경하기에는 나도 너무 늙어 버렸다. 이제는 누구의 삶이건 삶은 그냥 삶이라는 것을 안다. 대신 나는 한창때 멋졌던 그들이 어떻게 늙어가는지가 궁금하다. 이 사람은 어쩌다 이런 어른이 되었을까. 그건 어쩌면 파도 때문일까.
큰 키가 무색하게 평생 운동에는 재능도, 관심도 없던 만화가 이우일은 하와이에서 우연히 파도타기에 빠진다. 그는 하와이에서 2년 동안 파도를 탔고, 남은 생엔 파도가 있는 곳으로만 여행을 하기로 결심했다. 운전을 무서워해서 평생 아내에게 운전을 맡기던 그가 파도를 타기 위해 한겨울 빙판길 위에서도 벌벌 떨며 운전을 한다. 영하 10도의 맹추위에서도 바닷물에 들어가 온몸이 꽁꽁 얼 정도로 파도를 탄다.
오십이 넘어 사람이 이렇게 변한다는 것이 가능하구나. 뭔가에 이렇게 푹 빠지는 것이 가능하구나. 뭐든 쉽게 질리는 데다 뭐 하나 진득하게 해본 적이 없는 나는, 생각해 보니 별다른 취미도 없는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역시 성공한 사람은 달라도 뭔가 달라. 그런 내게 그는 이런 문장을 들이민다.
이우일은 능수능란한 작가는 아니다. 그의 글은 투박하다. 하지만 나는 이 사람이 오십이 넘어 이런 소박한 책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무척 기분 좋다. 짐 자무시가 <패터슨>(2016)을 만들고 <데드 돈 다이>(2019)를 만드는 걸 보았을 때의 상쾌한 기분과 비슷하다. 그는 재능 넘치는 만화가였고, 지금 그가 그린 파도타기 그림들은 이전에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던 그림들과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이다. 나는 지금의 그림이 더 마음에 든다. 그 그림은 쓸쓸하고 평화롭고 차분하고 용감하다. 그토록 오랜 시간을 살아남아서 그는 이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었다. 그 사실이 나를 안심하게 한다.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나의 문어 선생님>(2020)을 보면서 가장 황당했던 것은 러닝 타임 3분의 2 정도의 시간 동안 내가 딱 한 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문어 먹고 싶어.’ 나는 문어를 좋아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먹이로서의 문어를 좋아한다. 문어는 맛있다. 쫄깃하고 풍부한 맛이다. 사치스러운 맛이다. 어른의 맛이다. 바다의 맛이다. 나는 바다의 맛을 좋아한다. 고기보다 언제나 해물이다. 누군가 바닷속 풍경을 보여주면 나는 생각한다. ‘맛있는 것들이 정말 많네!’
이 영화의 감독인 제임스 리드James Read는 몇 년 동안 우울증을 앓았다. 오랫동안 이곳저곳을 떠돌며 촬영하고 영화를 만드는 인생을 살다가, 중년에 이르자 부담감에 짓눌려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는 살아오면서 품었던 확고했던 목적의식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고 고백한다.
회복을 위해 이 남자가 한 일은 바다로 간 것이다. 산소통도, 슈트도 없이 달랑 수영복 바지 한 장에 스노클링 마스크만 쓴 채로 그는 거친 바닷속 깊이 잠수해 들어간다. 그러면서 그는 조금씩 자신의 일, 세상을 카메라로 기록하는 일을 다시 해보고 싶어진다.
이 바다 산책이 조금 달라진 것은 어느 날 문어 한 마리를 발견하면서부터다. 독특하게 움직이고 호기심이 많은 이 신기한 생명체에게 첫눈에 반해 버린 그날부터 그는 매일 문어를 보러 간다. 문어는 처음에는 이 커다란 인간을 피해 숨어버리더니 어느 날부터 팔을 내밀어 그를 만지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조금의 경계심도 없이 그를 보러 굴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이제 문어는 그의 친구가 되었다. 문어는 인간의 주위를 헤엄치다가 손 위에 달라붙고 가슴에 뛰어들어 안긴다. 문어와 인간 사이의 경계선이 사라진다. 그런 그들은 마치 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놀다니. 문어가 노는 것이 무엇인지 알까?
그러나 문어의 삶은 인간의 삶과는 다르다. 문어는 평생 먹이를 열심히 잡고, 먹이가 되지 않기 위해 처절하게 달아나고, 짝짓기를 해서 종족을 번식하는 데 전력투구한다. 피곤한 삶이다. 감독은 그 삶에 개입하지 않은 채 다정하게, 때로는 슬프게 문어를 지켜본다.
문어의 험난한 삶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어떤 일이 일어나건 그것이 문어의 운명이다. 그러고 보면 운명 대로 살다가 운명대로 간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생명이라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살아 있을 때 살아있음을 만끽한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영화의 마지막 즈음, 문어가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스러지듯 목숨을 잃게 되었을 때, 한때 그 탱탱하고 아름다웠던 육신이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졌을 때 문어 먹는 걸 사랑하는 나조차도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때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눈물을 흘린 때는 인터뷰 도중 감독이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할 때였다.
나는 문어를 친구로 생각한 한 나이 든 남자에게는 공감했지만, 솔직히 문어에 공감하지는 못했다. 자연에는 감정이 없다. 감정은 인간의 몫이다. 문어도 정말로 인간을 친구로 생각했을까? 문어의 호기심이란 어떤 것일까? 문어는 무슨 꿈을 꾸었을까? 문어도 꿈을 꿀까?
별다른 취미도 없이 매일 집에서 넷플릭스와 인스타그램의 노예로 살아가는 나는 이 중년 남자들의 아름다운 취미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취미라는 것, 오로지 즐거움과 기쁨을 위해서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기꺼이 투자하는 이상한 일, 누구도 아닌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이지만 결국 자신이라는 비좁은 감옥을 빠져나가 세계를 향해 몸과 마음을 던지는 일.
나는 내가 어떤 취미를 가질 수 있을까 생각했다. 내 머릿속에 서 나는 거친 바다를 헤엄치고 파도에 올라타고 물속 깊은 곳에서 문어와 춤을 춘다. 암벽을 기어오르고 산속을 달리며 벌판 위에서 모닥불을 피운다. 어쩌면 언젠가 내가 몹시 지칠 때 그 일들이 나를 구원해 줄지도 모른다.
아아, 늙는다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파도수집노트》 이우일 | 비채
<나의 문어 선생님> 제임스 리드, 피파 에리치 | 다큐멘터리
글 한수희
일러스트 서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