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UMMER OF PLANTS

식물의 여름

집 앞 은행나무 잎이 초록색으로 변했다. 손톱만한 연두색 잎사귀를 보여주던 때가 며칠 전 같은데, 언제 이렇게 자란 걸까. 주변의 식물이 더 짙고 선명해지면, 여름이 오고 있는 것이 실감이 난다. 이 감상은 ‘그런데 식물의 여름은 어떤 모습이었지?’라는 질문까지 이어졌는데,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봄에는 잎이 돋고 가을에는 낙엽이 지는 모습이 자연스레 떠오르지만, 여름에는 온통 초록색이란 것밖엔 생각나질 않는다. 분명 그 안에서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고 있을 텐데, 식물들에 너무 무관심했던 것은 아닐까. 곳곳에서 무더움을 견디고 있을 식물의 여름을 찬찬히 들여다보기로 했다.

능소화

CAMPSIS GRANDIFLORA

여름이면 담장이나 도로 옆에 주황빛으로 만개하는 꽃이 있다. 그 이름은 ‘능소화’. 여름이 오면 흐드러지게 피기 때문에 흔히 발견되지만, 눈길을 한 번에 사로잡을 예쁜 꽃은 아니다. 솔직히 진한 주홍빛이 조금은 촌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무더기로 피어 있어 ‘주황 풍경’ 정도로 스쳐 지나기 쉽지만, 이 꽃의 슬픈 전설을 알고 나면 걸음을 멈추고 싶어진다.

옛날 어느 궁궐에 ‘소화’라는 궁녀가 있었다. 임금의 눈에 띄어 소화는 빈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 후 임금은 한 번도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 어느 여름날, 기다림에 지친 소화는 ‘담벼락에 묻혀 내일이라도 임금님을 기다리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모든 꽃과 풀이 더위에 고개를 떨구는 여름, 그녀가 묻힌 담에는 주황빛의 소박한 꽃이 피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그 꽃을 능소화라 이름 붙였다. 비록 흘러가는 전설이라 할지라도, 수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도 여전히 사람들이 이 꽃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애잔하다. 올여름에는 길을 걷다 이 꽃을 보면 잠시 걸음을 멈춰 이 예쁜 녀석의 이름을 불러주는 건 어떨까.

망개

BERCHEMIA BERCHEMIAEFOLIA

혹시나 오지 않은 계절의 소식을 먼저 알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꽃 시장을 찾아가라고 알려주고 싶다. 꽃시장은 늘 계절을 앞서간다. 1월이면 벚꽃과 설유화가 봄을 알리고, 3월이면 이미 튤립과 작약이 등장해 있다. 하지만 계절 식물의 종류를 잘 모르고 있다면, 꽃 시장에 가도 ‘와, 꽃이 많구나!’ 정도의 감상에서 그치기 쉽다. 다가오는 여름을 알아차릴 수 있는 가장 좋은 식물을 하나만 꼽아보자면 ‘망개’가 있다

동그란 구슬 같은 연녹색의 열매. 망개가 보이면 ‘이제 곧 여름이 오겠다’고 생각하면 된다. 여름이란 계절의 이름을 들으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초록의 풍경 말곤 떠오르는 것이 별로 없을지도 모른다. 봄에서 오는 낭만이나 설렘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다만, 이런 여름 틈에서 자라는 망개 같은 열매를 보면 그 마음이 달라진다. 

이 작은 것이 여름을 온몸으로 알려주고 있다고 생각하면, 기특하다. 여담이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망개 얘기를 하고 있으면, 망개떡 생각에 배가 고파진다는 말을 종종 한다. 그러면서 “그게 혹시 망개떡의 망개야?”라고 묻는데, 맞다. 갓난아이 손바닥만한 귀엽고 동그란 망개 잎 사이에 떡을 넣어 찐 것이 바로 망개떡이다.

에키네시아

ECHINECEA

짙은 갈색의 복슬복슬 뾰족한 질감과 초코송이 같은 모양이 귀여운 꽃, 에키네시아. 학명은 ‘Echinaceapurpurea’라고 쓰는데, 그리스어로 고슴도치를 의미하는 ‘Echinos’에서 온 이름이라고 한다. 이름의 유래를 알고 보니, 꼭 고슴도치의 등 모습을 닮은 것 같다. 꽃이라기엔 꽃잎이 너무 없어 열매가 아닌가 싶기도 했는데, 한 식물원에서 이 녀석 본연의 모습을 만나게 되었다. 연한 자줏빛의 꽃잎이 치마를 두른 것처럼 달린 모습이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앙증맞던지. 그런 예쁜 모습 외에 이 녀석은 약초로도 쓰인다고 한다. 고고학자들은 인디언들이 예로부터 상처나 감염 등에 사용했다고 알리고 있다

좋은 성분이 있는 것은 좋지만, 이 예쁜 아이를 말리고 빻아서 약으로 사용한다고 생각하면 좀 미안해지기도 한다. 여름에는 일단 이 아름다운 모습을 지켜봐 주는 것 어떨까? 여름이 지나 꽃잎이 아래로 드리워져 뾰족한 부분만 남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일종의 치유를 받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꽃 시장에서는 흔히 이 녀석을 ‘호랑이 눈’이라는 별명으로 부른다. 상인들과 손님들 사이에서 ‘호랑이 눈’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레 오가는 모습이 재미있게 느껴진다. 그런데 호랑이 눈이라는 듣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별명은 누가 지은 걸까?

클레마티스

CLEMATIS

‘클레마티스’라는 우아한 식물의 우리나라 이름은 조금 웃기지만 ‘으아리’이다. 이 단어를 보자마자 소리 내서 “으~아리”라고 발음해보는 것이 비단 나만은 아닐 것 같다. 이 꽃의 엉켜있는 줄기는 척 보기에 연약해 보인다. 그러나 손으로 잡아채면, 겉모습과는 달리 끊어지지 않고 강하게 손으로 파고든다고 한다. 그 아픔 때문에 지른 비명을 그대로 이름으로 옮겼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 어찌 됐건, 재미있는 이름이 틀림없다.

유래에서도 알 수 있듯 이 꽃의 줄기는 넝쿨로 얽혀있다. 그래서 넝쿨 가지와 잎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특히 더 사랑받는 꽃이기도 하다. 연한 분홍, 자주, 청색, 보라, 흰색까지 다양한 색의 꽃을 볼 수 있는데, 어른 손바닥보다도 큰 꽃부터 엄지손가락보다도 작은 종모양의 꽃까지 크기도 생김새도 다양하다. 클레마티스로 여름 정원을 꾸며놓으면, 시원한 초록 잎과 예쁜 색의 꽃이 뒤엉키며 자라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다. 무더운 여름, 클레마티스가 만든 작은 그늘에 앉아 있으면 꽤 근사한 오후를 보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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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박선아

일러스트 꽃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