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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
‘도시’. 도시는 단어의 느낌만 보면 조금 차갑거나 크거나 먼 곳에 있을 것만 같다. 유년기의 기억 때문일까, 그런 막연한 생각은. 성인이 되었고 이제 우리는 이 도시 안에서 대개 무감각하다. 차갑고 멀고 큰 도시는 생활이 용이해지는 구석을 중심으로 이내 우리와 연동하는 지점을 찾았다. 무엇으로 이루어지나, 이 큰 도시는. 그리고 그 안의 우리들은. 분주하게 켜졌다 꺼지는 일에 우리는 어떻게 참여하고 있나, 같은 질문들 앞에 한참 앉아 있다가 밖으로 나갔다. 대답하듯 걷고 찍었다.
도시의 혼자들은 도시의 가장 많은 형태로 도시를 지속하고 있다. 도시의 가장 작은 단위는 혼자다. 사람 단위로 도시가 분주하게 꺼진다. 그리고 켜진다. 우리는 요즘 더 혼자인 채로 유지되고 싶고, 그런 마음을 부러뜨리지 않고 안쪽에 두어 잘 지키고 싶다. 부지런히 다시 시작되고 싶다. 시작되고 있다. 도시에는 그렇게 도시들이 다시 들어서고 있다.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예감하게 되는 일들도 있다. 처음 보았는데도 미리 한 사람을 드나드는 일처럼. 어려워지기 전부터 어려움을 미리 준비하는 순간들처럼. 머물 것을 몰랐지만 우리가 이 도시에 크고 작게 와 있는 것처럼. 그렇게 나는 열네 시간 떨어진 타국의 도시에 머물게 되었다. 사람이 머무는 공간은 그 도시의 가장 솔직한 얼굴을 대변한다. 마이애미 같은 도시는 화려한 관광지로 알려져 있지만 10마일만 벗어나면 대개 낡은 집에서 생활을 이어가는 남미 사람들의 동네가 줄지어진다. 서울도 그렇고 대구도 그렇고 애틀랜타도 그렇다. 대개 한두 얼굴에 익숙해질 즈음 그 도시를 벗어나거나 더 살피지 않는다. 도시는 그곳에서 끝난다. 어떤 날, 도시의 가장 큰 형태는 사람이다. 같은 도시에서 개인마다 너무나 다르게 구축된다. 그런 생활의 이질성은, 직접 들여다보기 전까지 생소한 감각이지만 어느 도시에서든 발견되고, 우리는 그것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전부 상이하니까. 도시 속에서 발생하는 개개인들 너머는 그렇게 수선스럽고 인간적이며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가득하다. 가장 정확하게 그려지는 도시의 모습은 보편적으로 그런 데 있다. 모든 도시의 우리는 그럼에도 우리에게 동참한다. 건물과 건물, 동네와 동네, 생활과 생활이 맞닿아 있듯이. 하나의 바다와 그것을 둘러싼 육지가 인접해 있듯이. 그렇다고 우리가 누군가를 송두리째 새로 구축해줄 순 없는 노릇이지만 우리는 동참한다. 사람의 일이니까 그리한다. 누군가 일어난다. 자리를 지키고, 듣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것만으로 우리는 일어난다. 그것은 도시를 밝히는 일인 셈이다. 간혹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기도 한다. 그곳에 목소리를 버리고 온다. 두고 갈 것처럼 전부 내놓았다가 다시 담아온다. 상하지 않기 위함이다. 마음을 한곳에 오래 방치해두면 상하기도 하니까. 잘 동참하기 위해서다. 간혹 다시 담아가지 않은 목소리들은 분리수거함 앞에도 자전거를 세워둔 곳에도 전봇대에도 카페와 사무실 안팎에도 있다. 하나의 도시가 그렇게 세워지고 또 지켜진다.
또다시 시작된다.
하루를 연다. 면밀히 살피기 싫은 순간들도 있다. 도로의 분노로부터, 앞을 보지 않는 어깨들과 가파른 수면 부족으로부터, 근원 없는 욕설로부터 우리는 자기 자신을 지켜야 한다. 그런 것에 밀리기 시작하면 도시 밖에 서 있는 것들이 마구 안으로 들어선다. 계속 헤젓고 나가다 보면, 그런 일마저 리듬을 찾는다. 적당히 살 수 있을 만큼의 자세를 학습한다. 우리가 자리를 모색하는 속도는 도시가 우릴 찾아내는 속도와 대개 비슷하다. 그러니까 가끔은 강인해져야 한다. 끝내 망가지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연장된다. 목격되지 않을 때까지만 혼자다. 망가진 사람은 그래서 손을 들어야 한다. 손을 들고 마음을 들어 올려야 한다. 누군가에게 발견될 기회를 나 자신에게 이따금 허락해야 한다. 이 도시는 너무 크고 바쁘지만, 너무 많은 사람이 이곳에 머물지만 손을 드는 이에게는, 특히 나의 그들에게는 애쓸 힘을 언제나 가지고 있으니까. 무심하다가도 그런 식으로 함께하기도 하니까. 십년 넘게 머문 도시에 살고 있다. 이쯤 되면 전부 빠삭히 알고 있어야 할것 같은데 그런 것도 아니다. 깜냥의 문제만은 아니다. 스스로 걷고 닿거나 머문 곳들만 결국 나의 도시로 남는다. 끝내 들르지 못한 곳은 먼 타국의 소문과 다를 바 없이 모호한 얼굴로 남는다. 용이하지 않지 않은가. 직접 만나지 않으면 우리의 일부가 될 수 없다는 이 세계의 문법은. 그러나 그것은 어떤 면에서 공평하고, 도시 내의 어떤 사람들을 지켜주기도 한다. 모두가 도시 구석구석을 살필 시간은 없으므로 각자의 도시는 파편적이다. 낱개의 광경으로 기억되는 곳. 개별성. 비대해지거나 축소되는 오늘날 도시들을 가장 일반적으로 함축하는 고리 아닐까. 그럼에도, 생각보다 인접한 곳에 우리가 살고 있기도 한다. 저마다의 생활이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는 가장 일상적인 지점에서 이루어지기도 한다. 각자의 노동 가운데 교차로와 교차로 가운데 서점 가운데 기다림 가운데 강아지와 콜라와 세탁소 가운데 도시들은 이어져 있다. 꼬마의 도시락 가방이 양복 차림으로 전동 킥보드를 타는 신사에게 이어지는 것처럼. 그렇다. 세탁소는 콜라를 가득 싣고 도로를 지나는 운전수의 어제였기도 하고, 손전화를 보며 취하는 시인의 휴식은 공항으로 떠나는 사무원의 내일이기도 하다. 하나의 자리를 떠나는 방식으로 또 회귀하는 방식으로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우리를 모르게. 직장이 끝나고 집으로 향한다. 돌아오는 길에 목격되는 저마다의 분주한 모습들을 좋아한다. 다른 형태의 노동과 그것에 몰입하는 광경들이 주는 생경함과 경외감에 매료된다. 도시가 이곳에 머무는 사람들을 깨워두는 방식이다. 그리고 내일, 우리는 다시 움직이고 있다. 서점에서 벤치로. 벤치에서 구름으로. 다시 도로로. 움직이지 않을 때도 움직이고 있다. 그런 시간들로 우리는 있음을 체험한다.
혼자들의 도시가 모이고 도시의 혼자들이 모인다. 우리가 모인다. 그렇게 사람들은 무수한 단위의 구역이 된다.
글·사진 이훤(시인·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