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의 자리

The Place Of Positiveness

긍정적인 사람이 더 무섭다.

아파트 복도에 면한 여러 개의 창문들. 때때로 열렸다 닫혔다 하는 파란 유리창과 때가 탄 방충망, 그리고 창문 위로 덧댄 알루미늄 창살. 복도를 지나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 사이를 들여다볼 때가 있다. 그곳엔 검은색 모니터가 있고 형형색색으로 발광하는 키보드가 있다. 책상과 책장이 결합된 학생용 가구, 그 속에 금색 트로피와 상장, 그 옆에 컬러풀 한 문제집들이 줄지어 서 있다. 때때로 그 속에 앉아 있는 어린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기도 하는데, 그 찰나의 표정은 모든 사람이 똑같다.지루한 와중에 살짝 놀란다. 그리고 어색하지만 태연하게 시선을 돌려버린다.

어릴 때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복도에 면한 작은 방은 아이들의 방이다. 학창 시절 내 방도 복도에 면해 있었다. 누나의 방도, 내 친구의 방도 복도에 면해 있었다. 책상에 앉아 공부하다가, 혹은 공부하는 척하다가, 복도 끝에서 발소리가 나기 시작하면 슬그머니 창문을 닫고는 했다. 꼭 쳐다보지는 않더라도, 누군가의 기운이 나의 가장 내밀한 공간을 지나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창문을 닫아도 소용없었다. 지익 지익 신발을 끄는 작은 소리는 소름 끼치도록 가깝게 지나갔다.

임시의 거처 같은 그곳엔 진짜가 있을 리 없었다. 학창 시절엔 모든 일이 유예된 채로 지나가 버린다. 공부에 방해가 되니까, 아직은 성숙하지 않은 사람이니까, 참아야 하는 일.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들뿐이었다. 용돈을 받아 필요한 것을 사고, 용돈을 아껴서 저축할 순 있지만, 진짜 제대로 된 경제 활동을 할 순 없다. 만화를 그리고, 공을 차고, 연애를 하고, 휴식을 즐기는 그 모든 즐거움에 대하여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 하고 싶은 것을 참고, 설사 한다고 해도 그것이 진짜는 아닌 것이다. 모든 것이 유예된 채로 살아가는 나이 때니까 너무 좋은 것을 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현관문이나 다름없는 얄팍한 벽 뒤에 앉게 된 것이다.

유예해 둔 긴 시간을 보내고 진짜 삶을 되찾게 되었을 때, 그래서 이제 마음껏 즐겨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뒤늦게 깨달은 것은 사람들이 아직도 나를 어린아이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군대를 전역하고, 대학을 졸업하고, 진짜 돈을 벌고, 섹스를 하고, 술을 마시고, 심지어 머리를 넘기면 심심치 않게 흰머리가 발견되는 나이가 되었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모든 것을 유예해 둔 채로 살아가는 가여운 사람처럼 나를 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복도를 지나며 남의 방을 쓱 훑는 사람처럼 내 곁을 지나는 사람들은 한 번씩 나의 사생활을 들여다보고 지나가곤 했다.

“이렇게 멋있는 아들이 왜 결혼을 안 하고 있을꼬?”

어른들은 나를 추켜세우는 듯 걱정했다. 그럴 땐 마치 내가 처리해 버려야 할 커다란 짐 덩이처럼 느껴져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너는 결혼하지 말아라. 정말 부럽다.”

친구들과 모인 자리에서는 아직 연애를 해도 되는 사람쯤으로 여겨져 부러움을 샀다. 그들은 내가 부럽다는 듯 말했지만 결국은 훈계다. 그들은 내 자리를 들여다보고 있었고 나는 그것이 몹시 불편했다. 그래서 그들을 마주하는 나의 표정은 지루하고, 나른했을 것이다. 창살 너머로 눈을 마주친사람처럼 대답을 하는 대신 어색하지만 태연한 척 시선을 돌려버렸을 것이다.

결혼은 언제 할 거냐는 부모님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혹은 거절하기 미안해서 집을 나오기로 결심하고 몇몇 집들을 둘러보았다. 주로 오래된 아파트였다. “혼자 사시려고요? 결혼은 안 하시게?”공인중개사는 그 와중에도 내 자리를 들여다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어느 집이나 마찬가지로 아이들 방은 복도에 면해 있었고, 어른들 방은 가장 깊고 넓고 햇빛이 잘 들어오는 곳에 놓여 있었다. 하나같이 거실엔 커다란 사진이 걸려 있었다. 사진엔 온 가족이 다 나와 있지만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 어른들이 바라는 표정과 자세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실이 누구의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손을 잡고, 어깨에 손을 올리는 등 친구 같은 편안한 자세를 하고 닮은 얼굴들이 밝게 웃고 있다. 하지만 밝게 웃는 표정보다는 셔터를 누르기까지 이들을 독려하고 자세를 고쳐주었을 사진가의 노력이 더 크게 다가왔다. 긴장한 채로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을 가족들의 노력이 더 크게 다가왔다.

간혹, 간혹이라기보단 더 자주, 아이들 물건이 거실에 나와 있는 집의 어른들은 아이들이 있어서 집이 좀 어지럽다고 이야기했다. 책과 가방, 줄넘기, 장난감 등 아이들의 자리엔 어쩔 수 없는 것들이 놓여 있었고, 어른의 자리엔 가족사진과 넓은 소파, 좋은 글귀 등 긍정적인 것들이 놓여 있었다. 흔히들 하는 말처럼 결혼은 결심의 문제다. 좋은 일도 힘든 일도 있겠지만, 인생을 긍정하기로 결심하며 어떤 사람은 어른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긍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안타까운 사람이 될 수는 없다.

아파트에 처음 이사 온 날, 누가 봐도 가발인 것이 확실한, 가느다랗고 단정한 검은색 모발을 쓴 경비원 아저씨는 후진하려는 자동차를 멈춰 세우고 창문에 한쪽 팔을 걸쳤다. 그리고 차 안으로 머리통을 들이밀 기세로 이것저것 캐묻기 시작했다. 마치 친한 조카아이의 안부를 묻듯이.

“혼자 사는 거야? 결혼은 안 했어? 왜? 못 한 거야? 안 한 거야? 아버지는 뭐 하시고?”.

싸우기보다는 참고, 대립각을 세우기보다는 적당한 타협점을 찾아 절충하는 방식이 익숙한 사람은 언젠가부터 쓸데없이 버티는 사람, 투쟁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내가 놓여 있어야 할 자리에 놓여있지 않다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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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한승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