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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보통의 연애
The most
common Love
가장 보통의 연애
비 오는 날 놀이공원에 쪼그리고 앉아 대성통곡해본 적 있는 사람, 별 볼 일 없는 상대에게 잘 보이려 애쓰다가 자존심에 상처 입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가슴에 화살처럼 꽂힐 <연애의 온도>와 <남자사용설명서> 속 연애 이야기.
나의 첫 연애는 무릎이 시린 기억으로 남아 있다. 엄동설한에 잘 보이겠다고 어울리지도 않는 짧은 스커트에 얇은 스타킹, 7센티미터 높이의 앵클부츠까지 신었는데, 그 해 눈이 어찌나 많이 내리던지 나는 신촌역에서 합정역까지 가는 빙판길을 발가락이 몽땅 부러진 사람처럼 걸어야 했다. 지금도 그 연애를 생각하면 무릎과 발가락이 시린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 노란색 파스가 어디 없나 고개를 두리번거리게 된다. 그럼에도 그때는 많이 괴롭지 않았다. 잘만 구슬리면 맨발로 작두도 탈 수 있을 시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절은 잠깐이다.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광화문 사거리 전광판에 광고라도 하고 싶은 몇 개월이 지나고 나면, 슬슬 연애는 이상과 기대를 배반하기 시작한다.
그는 분위기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대신에 눈에 보이는 분식집에 들어가 아무거나 먹자고 한다. 조금씩 잘못된 선물들을 들고 오기 시작하고, 옷차림도 자꾸 눈에 거슬리며, 계산대 앞에서 주저하는 모습도 짜증이 난다. 급기야 친구들과 술 마시러 간다던 그는 다음날 아침까지 연락이 되질 않는다.
우리는 별것 아닌 일들을 핑계 삼아 다툰다. 눈물을 흘리며 화해를 한 후에는 그가 새벽 3시 20분에라도 택시를 타고 우리 집 앞으로 찾아오기를 기대하지만, 그는 결국 “잘 자”라는 말 한 마디만 하고 아침까지 숙면을 취한다. 그리고 우리는 본격적으로 싸우기 시작한다. 소리를 지르고 눈물을 한 바가지씩 흘리고 문을 ‘쾅’ 하고 닫고 집기를 부순다. 친구에게 내 비참한 연애사를 시시콜콜 토로해 우정에 미세한 흠집과 균열을 내고, 결국 울며불며 그와 화해했다가 다시 또 싸우고, 헤어지네 마네 난리를 치다가 혼자가 되는 과정. 안타깝게도 그 모든 것이 연애 안에 있다.
<연애의 온도>는 헤어진 연인들의 이야기다. 사내커플인 두 남녀가 헤어진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매우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영화. 쉽게 때려치울 수 없을 정도로 탄탄한 직장에서는 웬만하면 사내 커플은 피해야 한다는 작은 교훈을 준다. 또한, 많은 것은 착각이라고,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는 얘기도 해주고.
사귈 때는 그렇게 미웠던 애인이 헤어진 후에는 그토록 소중하게 느껴질 수가 없는 법이고,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하고 바라게 되지만 사실 그건 다 착각이라고 말한다.
“그쪽으로 갈게.”
“내가 갈게.”
“그러다 엇갈려. 아까 우리가 헤어졌던 데, 거기서 보자.”
헤어졌던 곳에서 다시 만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똑같은 일이 일어날 뿐이다. 무엇 때문에 싸웠는지 기억도 안 나는 일로 다시 싸우게 될 것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반복적인 신경전이 오가는 사이 두 사람의 작은 기대도 자꾸만 어긋날 것이다. 헤어진 남자와 다시 만난 적이 있다. “헤어지자. 더 이상은 못 하겠어”라며 서로 전화통을 붙잡고 울던 바로 그 다음날이었다.
도저히 못 헤어지겠다는 이유 하나가 서로를 다시 엮고 만 것이다. 이제껏 매일 시시콜콜한 일상을 보고하던 사람에게 이제 더는 그럴 수가 없다고? 어제까지 손을 잡고 팔짱을 끼고 입맞추던 사람에게 더 이상 그래서는 안 된다고? 머리로 인정했지만, 마음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다시 얼싸안고 울었다. 헤어지지 말자. 이제는 정말 잘해보자. 하지만 한 달 만에 우리는 다시 헤어졌다. 둘 중 누구도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가 너무 멍청했던 건지도 모른다.
우리는 헤어질 이유가 많은 커플이었지만, 단지 관성에 이끌려 다시 서로를 택했다. 그러나 관성을 거스르지 않는다면 인간은 어떤 방향으로도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우린 뒤늦게 깨달았다.
내 얘기가 가진 자와 해본 자의 배부른 소리로 들린다면, 연말에도 오로지 동성 친구들과의 만남만이 예정되어 있다면, 쓸쓸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다면, 이원석 감독의 <남자사용설명서>를 보시라. 이 영화를 본다고 세상 모든 남자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거나, 영화 속 주인공 같은 ‘스타’와 사귈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어떤 허무함 속에서 반짝하고 빛나는 연애의 힌트를 발견하거나 그저 한바탕 웃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나이 서른에 푸석푸석한 외모, 비전 없는 광고회사 조감독인 여자는 우연히 마주친 수상한 노점상에게서 ‘남자사용설명서’라는 매우 신빙성이 없어 보이는 제목의 비디오 세트를 구입한다. 예상대로 비디오에서는 어떻게 해야 남자들을 내 의도대로 움직일 수 있을지, 행복한 연애에 골인할 수 있는지를 참으로 설득력 없게 보여준다. 다만 가장 기분 나쁜 일 다섯 가지 중 세 가지는 잊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웃긴 장면이 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엘리베이터 안에서 블루 볼 상태(영화를 봐야만 알 수 있다)에 돌입한 오정세가 이시영에게 키스하려고 달려들다가 수도 없이 따귀를 맞는 장면이나 피치 못할 이유로 알몸으로 운전하다가 교통 검문에 걸리는 장면같이.
사실 남자를 사용하는 법은 영화에서처럼 간단하다. 수준에 맞는 남자를 찾아서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것, 그리고 종종 칭찬을 해주거나 적당한 때 먹이를 주는 것이다. 그렇다. 말은 쉽다. 하지만 지금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김치 어떻게 담그는 거야?”라고 물어보시라. “배추 소금에 절였다 건져서 고춧가루랑 젓갈 양념에 무치면 돼.”라는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엄마는 지금껏 수십 번의 김장을 경험했기에 쉽게 말할 수 있다.
비슷한 얘기로, 남자 사용법이나 연애의 기술 역시 기본은 간단하지만, ‘알아서’ 해결해야만 하는 디테일이 있다. 소금물의 농도는 얼마인지, 배추는 물에 씻어야 하는지, 젓갈은 어떤 걸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알아야 김치를 만들 수 있는 것처럼.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하다 보면 늘게 된다. 몇 번의 망한 김치를 억지로 먹어가며 엄마의 김치 맛도 조금씩 개선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겐 몇 번의 엉망인 연애를 거치는 일이 남았다.
다시 <연애의 온도>로 돌아가자. 두 번째의 이별을 예감한 커플은 놀이공원에 간다. 여자는 새벽에 일어나 김밥을 만다. 하지만 비가 내리고, 남자는 여자에게 지하철 출구 밖에 서있지 않았다고 화를 낸다. 두 사람은 내내 억지웃음을 지으며 분위기를 띄워 보려 애쓰다가 결국 다시 싸우고 만다. 그러다 담담하게 서로를 공치사하며 헤어지기로 합의한 뒤, 남자가 여자에게 롤러코스터나 한 번 타보자고 한다. 여자가 무섭다고 하니 남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왔으니까 한 번 타보자. 안 무서운 것만 타면 재미없잖아.”
나는 한 번도 싸운 적 없는 커플이 하고 있다는 사랑의 밀도를 믿지 않는다. 그들이 잘못된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게 아니라, 매일같이 싸우는 사랑보다 그들이 나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애들은 원래 싸우면서 크는 거고, 그건 어른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기준에 맞는 상대와 안전한 연애만을 고수하는 사람들 역시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섭지 않은 것만 타면 재미없는 법이니까. 망한 연애를 경험하기까지 나는 내가 이렇게 유치하고 이기적이고 자존감약한 사람인지 몰랐다. 그걸 똑바로 쳐다보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우리는 성장한다는 걸 알게 된다. 연애는 빠져 나오고 나서야 그곳이 어디였는지 깨닫게 되는 미로 같은 것이었다.
<연애의 온도> 속 두 남녀가 롤러코스터를 탈 때, 그리고 그들의 파란만장했던 지난 연애의 기억들이 스쳐 지날 때, 코끝이 시큰해졌다. 그것은 그들만의 기억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기억이었다. 지루하고 평범하고 특별할 것도 없는, 그야말로 보통의 연애에 대한 기억들. 엉망진창이었지만, 모두가 진심이었던 것들. 우리의 인생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영화 같은 시간들. 두 번 다시 돌이킬 수 없고, 다시는 손에 잡을 수 없는 일들. 바로 그 이유로 더 아름다운 기억들 말이다.
글 한수희
일러스트 수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