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P FOR BOOKS

책을 위한 지도 『시옷의 세계』

‘흡연은 폐암 유발’, ‘어린이는 나라의 미래’, ‘꺼진 불도 다시 보자’만큼이나 구태의연하지만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다. 책을 읽어야 한다면 과연 어떤 책을 읽는 것이 좋은가?

나는 문학소녀도 아니었고 문학 처녀였던 적도 없으며 문학 아줌마는 더더욱 아니다. 그런 말에서 풍기는 어딘지 감상적이고 지적인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물론 나는 누구 못지않게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 지나치게 좋아해서 도서관 서가에 꽂힌, 아직 정복하지 못한 책들 앞에 서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다. 마치 거기 강동원이나 조인성이 서 있기라도 한 것처럼. 하지만 나는 강동원이나 조인성의 품에 뛰어드는 대신 대출 한도를 꽉꽉 채워서(도서관 가족 카드를 가지고 있어서 한번에 20권이나 빌릴 수 있다!) 그 무거운 책들을 이고 지고 집으로 돌아온다. 돌아오는 길에는 노다지라도 캔 것처럼 마음이 뿌듯하다.

영국 소설가 닉 혼비Nick Hornby는 아이가 있는 부모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서로에게 두 시간 동안 책을 읽을 수 있는 독서권을 주라고 한 적이 있다. ‘싸구려 선물처럼 보이겠지만, 부모라면 실제로 람보르기니 한 대 값보다 더 고마워할 거라는 걸 장담한다’면서 말이다. 그만큼 어린아이를 키우는 부모에게 책 읽는 시간은 사치 중의 사치란 얘기다. 내게도 마찬가지였다. 두 명의 아기를 키우느라 수년간 보이지 않는 사슬에 발이 묶인 죄수의 신세였다.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줘야 하는 아기 둘을 키운다는 것은 이를테면 ‘너무 피곤해 기절하거나 돌아버릴 것 같아도 절대로 기절하거나 돌아버릴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아기들이 잠들었을 때 어디든 처박혀 책을 읽는 것뿐이었다. 나는 한밤중에 어두운 거실 소파에 앉아 책을 읽었다. 공원 벤치에 앉아 유모차를 앞에 두고 책을 읽었다. 기저귀를 개면서 한 손으로 책을 읽었다. 심지어 건널목 앞에 서서 책을 읽은 적도 있고, 운전하다 신호대기만 걸리면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렇게 읽은 책이 몇 년간 수백 권이었다.

내가 그 많은 책을 읽어 치운 걸 알게 되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대단하다.” “어떤 책을 읽었어요?” “어떻게 하면 그렇게 책을 많이 읽을 수 있어요?” “책 좀 추천해 주세요.” 이해하시라. 세상에는 나보다 더 많은 책을 읽고 나보다 더 학식이 풍부한 사람이 수도 없지만, 뜻밖에 그런 사람을 자기 동네에서 찾기는 힘든 일이니까(그렇게 뛰어난 사람들은 보통 동네에서 어슬렁거리기보다는 중요한 자리에서 중요한 일을 하고 있을 거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한다. “재미있는 책을 읽으세요!” 

뭔가를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개 뭘 읽어야 할지 모른다. 서점이나 도서관 서가 앞에 서서 그 어마어마한 책의 무게에 짓눌려 버리는 것이다. 이젠 지성인이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굳게 먹고 서점에 가서 베스트셀러라고 골랐는데 하품이 나오고 온몸이 뒤틀릴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다가 어떤 이들은 단정한다. “난 책을 싫어해!” 정말이지 안타까운 일이다. 세상에는 재미있는 책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책을 고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게 필요한 책,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는 거다. 그런 책을 읽으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로 즐겁다. 굳이 남이 읽으라고 권해준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보통 사람들은 남에게 책을 권해줄 때 자신이 읽은 책 중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던 책을 추천하기 마련이다. 그래야 자신의 지성이 돋보일 테니까). 내 경우에는 책을 읽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육아가 너무 힘들어서 적성에 끔찍하게 안 맞는 일자리에 종신 고용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육아에 관한 책이라면 죄다 빌려다 읽었다. 나처럼 정신적 위기에 처한 여자를 위한 심리학책도 읽고 대리만족이라도 하고 싶어서 여행책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집 벽에 곰팡이가 슬길래 결로 현상에 관한 과학책도 읽었다. 집이 더러워서 인테리어책도 읽었다. 필요해서 읽는 책은 머리에 쏙쏙 들어왔다. 책을 읽다 보면 그 책 안에 다른 책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기 마련이다. 그 책 중 읽어보고 싶은 것은 찾아내서 또 읽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 그러고 나니 전처럼 도서관에 갈 때마다 길을 잃은 것 같은 기분은 더이상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문학’이라는 것은, 특히나 ‘순수문학’이라는 것은 내게는 미지의 세계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물에 첨벙 뛰어들 수 없는 것처럼 나는 고작해야 발끝이나 슬쩍 집어넣었다 뺀다. 그럴 때 나는 나보다 훨씬 더 많은 책을(심지어 훨씬 더 좋은 책을) 읽은 사람들, 나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진 사람들, 게다가 나보다 훨씬 더 좋은 글을 쓰는 사람들의 책을 읽는다.‘조금 다른 시선, 조금 다른 생활’이라는 부제를 단 시인 김소연의 책 『시옷의 세계』는 바로 그런 책 중 하나다. 이 책에서 김소연은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시들을 소개한다. 소개된 시도 멋지지만, 그 시를 소개하는 그녀의 글 역시 시에 뒤지지 않게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녀는 자신의 무뚝뚝함과 소심함, 서투름을 고백하면서 이렇게 쓴다. 

타인에겐 무심과 배포의 소산인 듯 보이겠지만, 실은 무뚝뚝함은 소심과 서투름의 결합이다. 인간관계에서 오해와 손해를 부풀릴 수 있는 결함 중의 결함이다.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고는 있지만, 세심한 배려와 살가운 표현에 능숙한 성격이 나는 언제나 부럽다. 좋은 마음을 전하려 어어, 하는 사이에 기회는 물 건너가고, 좋아하는 누군가를 만나러 나갔다가 아무 표현도 못 하고 터덜터덜 집에 돌아오기가 일쑤다. 하고 싶은 유일한 말을 그래서 시에다 적고는 한다.
– 『시옷의 세계』 중에서 

그러면서 그녀는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의 「사월과 침묵」이라는 시의 한 구절을 소개한다. 

하고 싶은 유일한 말은
닿을 수 없는 곳에서 반짝인다.
전당포 안의
은그릇처럼

시와 시인에게 동경과 거리감을 동시에 느끼는 내게 그녀는 좋은 시 읽는 법을 알려주는 선생이 되기도 한다. 그녀는 신해욱이라는 시인의 시를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신해욱의 시는 늦게 온다. 연과 연 사이가 아득하기 때문이다. 그 아득한 틈을 우리는 천천히, 너무나도 천천히 이동해야 한다. 초속 5센티미터쯤의 속도로 그 틈을 통과하고 나면, 문득 우리는 다른 시공간에 있다. 신해욱의 시는, 그 연과 연 사이는 웜홀과 비슷한 데가 있다. 그 틈을 통과하면 우리는 시인이 발화하지 않은 낯선 곳에 도착한다. 이상하고도 따뜻한 정오의 공원 같은 곳에 도착한다.

– 『시옷의 세계』 중에서 

나는 오늘도 

사람들과 함께 있다.

누군가의 머리는 아주 길고 

누군가는 버스를 탄다. 

그때에도 

이렇게 햇빛이 비치고 있을 테지. 

그때에도 나는 

당연한 것들이 보고 싶겠지. 

– 신해욱의 「그때에도」

책을 많이 읽는 것은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집에 앉아 책을 잡고 있는 것보다는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훨씬 나은 일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솔직히 말해서 친구를 사귀는 것보다는 책 속에서 스승을 찾는 것이 훨씬 빠르긴 하다. 그 스승이 내 ‘개드립’에 장단을 맞춰줄 수 없다는 게 안타깝긴 하지만. 사실은 그 두 가지를 함께 하면 좋을 것이다. 세상과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세상에 대해 관조하는 것. 어느 한 쪽에 매몰되면 곤란한 것이다.

나는 지난 수십 년간 나 자신이라는 사람을 끌고 다니느라 힘겹게 살아왔다. 문제는 아기를 둘 키워서가 아니었다. 꿈꾸던 것들을 제대로 이루지 못해서도 아니었고, 남편이 속을 썩여서도 아니었다. 작가들은 보통 자신의 가슴에 도넛처럼 큰 구멍이 있다고 표현하곤 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감상적인 여자는 아니라서, 그저 나 자신이 버거웠다고 표현하련다. 

몇 년간 수없이 많은 책을 읽었으나 단번에 내 무게가 가벼워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좋은 책 속의 아름다운 문장을 만나는 황홀한 순간들은 나를 행복하게 했고, 여전히 행복하게 한다. 그리고 진정한 행복이란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목표가 아니라, 오직 사라져버릴 순간들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얼마 전 결혼한 친구에게 나는 일기장의 한 장을 북 뜯어 이 책에서 소개한 시의 한 구절을 손으로 꾹꾹 눌러 적어 보냈다. 김소연은 이 시를 소개하면서 한 여자의 일화를 보탰다. 몸에 상처가 나서 피를 흘리는 순간이 반가웠고, 흉터가 생길 때마다 행복했고, 고층 빌딩 옥상에서 아득한 아래를 내려다볼 땐 언제나 떨어지는 상상을 벗 삼아 커피를 홀짝이던 한 여자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애지중지 키워오던 연꽃 봉오리가 거친 소낙비를 맞아 뚝뚝 잎을 떨어뜨린다. 제대로 피지도 못했는데 잎을 자꾸만 떨어뜨리는 연꽃에 우산을 씌워주며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녀는 밤새 연꽃에 우산을 씌워준 채 비를 맞으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소중한 걸 지킨다는 게 무언지 종내에는 알게 될까. 그래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어떤 걸 종내에는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생길까. 그녀는 철들지 않고 살아온 날들에 곱표를 한다. 이 시를 읽고 또 읽는다.
– 『시옷의 세계』 중에서

내가 손으로 꾹꾹 눌러 쓴 이 시를 독일에 사는 그 친구가 압정으로 푹 찌르거나 테이프를 찌익 뜯어 벽에 아무렇게나 붙여두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창가에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이 시가 그 친구의 집에서 바람에 살랑살랑 흩날렸으면 좋겠다. 그런 풍경 속에서 그 친구가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책을 읽고 아이를 키웠으면 좋겠다. 김소연 덕분에 나 같은 사람도 남들에게 좋은 시를 날려 보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기쁘다.

 

시옷의 세계

김소연 지음 | 마음산책 | 264쪽 | 148x210mm

‘아무도 내게 시를 써보라고 권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를 쓰는 사람이 되었다’는 시인, 김소연. ‘시옷(ㅅ)’으로 시작하는 낱말들이자 ‘시’에 입힌 ‘옷의 세계가 바로 ‘시옷의 세계’다. 시와 시인의 생활을 이야기하는 이 책을 읽다 보면, 읽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더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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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디터 선아

글 한수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