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선

평론가 부부의 책갈피

당연한 말이겠지만 방에서는 어떤 것들이 머물고, 머물다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기도 한다. 그것은 사람이기도 하고 사물이기도 하고, 더 많은 경우 그들이 함께 있거나 없어서 생겨난 먼지 같은 기억이기도 하다.

그의 이야기

작가의 작업실에는

작가의 숨겨진 디테일이 산다

작가들의 작업실을 때때로 방문한 적이 있다. 기억에 남는 몇 군데를 옮겨본다. 시인 p의 작업실은 그의 신혼집에 있는 작은 방이었다. 예측 가능하기도 하고 어울리기도 하는, 술병이 있고 재떨이가 있고 기타가 있는 방이었다. 그런데 기억에 오래 남는 품목이 따로 있다. 한 질의 동화책이다. 얇은 외국 동화책이 수십 권 꽂혀 있고, 그중에 몇 권은 말 그대로 마르고 닳도록 펼쳐 봤는지 하드커버가 많이 해져 있었다. 술에 취한 p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책이고 이야기라며 나에게 자랑하듯 그 책을 보여주었다. 나 역시 꽤 술에 취했었기 때문에 제목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그림체가 흐뭇한 웃음을 머금게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후로 그를 만날 때면 그 책의 표지에선가 혹은 속지에선가 보던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하는 캐릭터의 모습이 생각난다.


소설가 e의 작업실과 소설가 k의 작업실은 아내 덕분에 잠시 들러본 적이 있다. 두 작업실 모두 아내가 작업실이 절실할 때 친구들의 도움을 받은 곳이다. e의 작업실에는 아내에게 김밥을 전하러 간 적이 있고, k의 작업실에는 귀가하는 아내를 데리러 간 적이 있다. e의 작업실에는 우아한 드레스 하나가 걸려 있었다. 작업실에 드레스는 좀 어울리지 않는 소품 같았지만, 그것을 바라보다 꼭 필요한 소품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옷이 있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소설을 쓰다 지칠 때쯤 그 옷을 풍경처럼 바라보는 작가의 뒷모습이 떠오르기도 했고, 혹은 상상이 멈춰진 자리에서 드레스를 입고 상상의 거리로 외출을 나가는 작가의 머릿속을 떠올리기도 했다. 입기 위한 옷이 아니라 걸어두고 보기 위한 옷, e의 소설에 담긴 예술의 품격과 여유가 어쩌면 그 옷이 놓인 자리에서 비롯됐는지도 모른다.


소설가 k의 작업실에서 본 인상적인 소품은 포스트잇이었다. 거기에는 일정 기간 방을 내어주면서 전하는 사소한 메시지들이 적혀 있었다. 가령 공과금은 자신의 통장에서 빠져나가니 고지서가 날아와도 개의치 말라는 당부, 화장실 겸 욕실에 습기가 차 곰팡이가 생긴 적이 있으니 문은 되도록 열어두면 좋다는 의견, 근처에 어느 카페나 빵집이 걸어서 가보기 괜찮은 정도에 자리하고 있다는 정보 등등…. 그 포스트잇은 소설가 k의 소설 속에 등장해도 어색하지 않을 소품이었다. 그가 쓰는 소설만큼 다정하고 세심하며 꼼꼼한 기록이었던 것이다. 정성 어린 글씨체 또한 잊지 못한다. 그 후로 나는 k의 소설이 자신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산된 형식이겠다는 추측을 하며 그녀의 소설을 좀더 좋아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시인 s의 작업실. s는 작업실을 옮겼다. 집을 옮겼기 때문이다. 예전 집에서는 그 집에서 가장 넓은 방을, 지금 집에서는 거실을 작업실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건물 내부의 위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창밖 풍경이 그에게는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전 집에서는 세계가 몰락하기 직전의 풍경인 듯한 노을이 그렇게 장엄하게 보였다. 지금 집에서는 북한산에서 솟아오르는 일출을 볼 수 있다. 창밖의 것을 창 안으로 들이는 그의 시선을 보면서 시인의 상상이 그 시선의 움직임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인 s는 좋은 일이 생겨서 또 한 번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번에 그의 작업실에는 무엇이 보일까. 커다란 달이 잘 보이는 곳은 아닐까. 그의 시 하나를 옮겨 적는다.

내가 가장 훔치고 싶은 재주는 어둠을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저녁의 오래된 기술.

불현듯 네 방 창에 불이 들어와, 어둠의 벽돌 한장이 차갑게 깨져도

허물어지지 않는 밤의 건축술.

검은 물속에 숨어 오래 숨을 참는 사람처럼,

내가 가진 재주는 어둠이 깨진 자리에 정확한 크기로 박히는, 슬픔의 오래된 습관.

– <공터에서 먼 창> 전문

그녀의 이야기

그곳

개인 작업실을 따로 마련해 쓰는 이들이 없진 않지만, 내가 아는 더 많은 시인과 소설가들은 침실 겸 거실 겸 서재에서 일한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적당히 조용하고 콘센트 꽂기에 용이하고 오래 앉아 있어도 눈치 볼 필요 없는 카페를 전전한다. 최근에 서울문화재단의 문학 웹진 《비유》의 한 코너에서는 ‘자기만의 방’이라는 프로젝트를 기획해서 일종의 실험을 감행한 바 있다. 여러 장르의 작가를 섭외하여 소정의 활동비를 지급하고 그것으로 어떻게든 자신의 작업에 필요한 공간, 그러니까 자기만의 방을 구해보자는 것이었다. 물론 성공이냐 실패냐 하는 결과를 제시하는 것이 그 프로젝트의 취지는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좌충우돌일 게 뻔한 그 과정을 현장감 있게 기록하면서 한국에서 문학예술을 한다는 것, 무형의 노동에 주어지는 사회적인 인식, 물가 대비 원고료의 실태가 말해주는 것 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자 했다. 들이는 시간에 비례해 생산물이 가시적으로 쭉쭉 나오는 것도 아니고, 뭔가를 생산했다 한들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고작 글자 수, 원고 매수뿐이다. 하지만 도대체 누가 어떤 방법으로 원고 한 편에 들인 노고를 측정하고 계산할 수 있을까. 완성된 원고의 글자 수만이 그 기준이 될 때 어쩌면 작가들은 영원히 노트북 하나, 노트 하나, 커피잔 하나가 겨우 놓일 만큼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예술가의 방이란, 적어도 한국의 문학예술에 종사하는 대다수 작가의 경우에는 간절히 원하지만 가질 수 없는 어떤 것의 이름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다른 누구의 자유로운 침입이 허락되지 않은 장소, 그 장소를 안전하게 유지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경제적 수입 같은 것. 이런 조건들을 떠올리다 보니 예술가의 방은 ‘예술/가/의/방’으로, 서로 매개를 잃고 낱낱으로 떨어져 방의 예술, 예술의 가방, 방 예술의 가 등으로 의미 없이 뒤섞이고 만다. 어느 쪽이든 예술과 방은 서로 척력을 지닌 듯 자꾸만 미끄러지고 밀어내는 와중에 겨우 함께 놓여 있다. 이때 예술은 흔히 그것의 하위 카테고리로 떠올리게 되는 음악, 미술, 문학 등이 아니라 비경제적인 모든 행위의 대명사가 되어서 방이라는 개인이 소유하는 고유한 공간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듯하다. 그런데 이것이 개인의 문제인가? 눈에 보이지 않는 노동이라서, 분명한 대의에 협조하는 노동이 아니라서 그 값을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으려)는 사회에서 예술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것은 비단 예술가의 문제만은 아니어서

나는 아주머니가 청소하는 내내 서재에서 업무를 보다가 마지막으로 그녀가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왔을 때 안방으로 옮겼다. 침대 위 이불이 주름 하나 없이 팽팽하게 펴져 있었고 베개와 쿠션이 각 잡혀 정리되어 있었다. 방금 체크인 하고 들어온 호텔의 새 침구들 같았다. 나는 그 위에 웅크리고 누웠다가 깜빡 잠들었고, 문밖에서 아주머니가 “다 했어요”라고 크게 이야기하는 소리에 놀라서 일어났다. 나는 그녀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책장 위, 서랍 손잡이 위, 욕조 바닥을 체크했고 비로소 기분이 좋아졌다. 처음으로, 이 아주머니에게 우리 집을 맡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장류진, <도움의 손길>, 《일의 기쁨과 슬픔》 중에서

이 소설의 주된 서사는 가사도우미 서비스를 이용해 격주에 하루 집안일을 맡기기로 결심한 ‘나’가 여러 아주머니의 솜씨를 비교하고 어렵게 선택한 도우미 아주머니와의 갈등을 그린다. 아주머니가 세심하게 매만져주기를 기대하는 그의 집은 나와 남편이 함께 벌어서 어렵게 장만하고, 그들의 취향에 맞추어 리모델링까지 한 너무나 소중한 공간이다. 중요한 것은 애착이 깃든 그 개인적인 공간에 타인을 들이는 일에 있다. 가사도우미에게 비용을 지불하고 살림을 부탁하는 것은 맞벌이 부부가 많은 현대 사회에서 낯설지 않은 일이다. 이 소설은 내가 할 일을 대신해주는 사람에게 느끼는 고마움에 내 공간을 함부로 다루면 어쩌나 하는 불안과 분노가 결합하여 알 수 없이 복잡한 감정을 갖게 되는 ‘나’의 모습을 담담하게 보여주면서 현대인이 처한 여러 가지 곤경을 동시다발적으로 암시한다. 첫 만남에서부터 요즘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아기 빨래 모드로 세탁한다고 충고하는 아주머니의 모습에서 가사도우미라는 직업 특성상 여러 가정의 가계와 생활의 습관이 서로 엮이고 견주어진다. 서로 다른 사람들의 공간이 가사도우미 아주머니의 손길을 통해 비슷한 느낌과 냄새를 갖추고 뭉뚱그려져 인식될 때, 합당한 비용을 지불하고 집을 맡긴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따져 물을 수 없이 미묘한 배반과 결핍의 감정이다.


아기를 그랜드피아노에 비유하며 딩크족으로 살기를 결심한 데에서 짐작되듯 ‘나’는 살아가는 공간이 삶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인물이다. 그 때문에 가사도우미 아주머니에 대한 그의 불만을 정당한 요구를 제 맘대로 어기는 타인과의 갈등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좀 거친 해석일 수도 있지만, 나의 소중한 공간을 잘 유지하기 위해서 그 공간에 대한 타인의 간섭과 침해를 감당하는 아이러니한 ‘나’의 태도는 요즘 같은 시대에서라면 물심양면의 차원에서 자기만의 공간이란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게 아닐까.


‘나’는 새로운 가사도우미 아주머니를 구했을까, 쉴 시간을 쪼개어 값비싼 조명 갓에 쌓인 먼지를, 욕조 타일의 곰팡이를, 닦아도 닦아도 금세 쌓이는 창틀의 먼지를 손수 닦아내며 공간을 공유하는 남편에게 일상의 피로와 권태를 쉴 새 없이 토로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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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나영, 송종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