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깊으면 음악이 고프다. 불 꺼진 방에서 더듬더듬 노란 조명을 켜곤 한밤의 플레이리스트를 세팅한다. 레코드판을 몇 장 꺼내 두고 귀찮아질 채비를 시작한다. 한 면이 다 돌아가면 애써 뒤집어 줘야 하는, 분주한 밤이다.
Night Cruising 2018
Fishmans
큰외삼촌이 있었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돌아가신, ‘굉장한 미남’이라고만 알고 있는 엄마의 큰오빠. 어느 아침 눈을 뜨니 심장이 멎어 있었다고 했다. 홀연히 찾아온, 예고 없는 죽음이었다. 이해할 수 없고, 그래서 더 슬픈 이야기. 나는 피시만즈Fishmans를 들을 때면 여름밤을 떠올리고 종종 큰외삼촌을 생각한다. 피시만즈의 보컬 사토 신지 또한 그렇게 갑자기 사라졌기 때문이겠지. 갑작스러운 죽음과 그들이 남긴 어떤 것들을 곱씹는다.
A면이 금세 다 돌았다. 한 면에 한 곡밖에 들어 있지 않은 이 가벼운 LP엔 모름지기 여름에 어울리는 곡, 그만큼 밤에 듣기 좋은 곡 피시만즈의 ‘나이트 크루징Night Cruising’이 실려 있다. A면엔 오리지널 버전이, B면엔 2018년 버전이 수록돼 있는데 사토 신지가 살아 있다면 2018년 버전을 듣고 뭐라고 했을까. 큰외삼촌이 살아 계셨다면 지금 나를 뭐라고 부르셨을까. 천천히 판을 뒤집고 B면에 바늘을 올린다. p.m.09:24
窓はあけておくんだいい声聞こえそうさ “창문은 열어두는 거야 좋은 소리가 들려올 것 같아”
– ‘Night Cruising’ 중에서
Jazz Impressions Of “A Boy Named Charlie Brown”
Vince Guaraldi Trio
아랫입술을 꽉 깨물게 되는 밤이 있다. ‘내가 왜 그랬지?’, ‘내 이야기를 더 해야 했어!’, ‘그 말은 하지 말걸….’ 같은 후회를 하다 보면 마지막 말은 항상 “이 멍청아!”였다. 검은색 지그재그 줄이 그려진, 노란 티셔츠를 입은 찰리 브라운이 가장 많이 듣는 말이기도 하다. 스누피에게 ‘찰리 브라운’이라는 이름 대신 ‘둥근 머리의 소년’으로 불리며 무시당하는 아이, 연날리기만 하면 늘 연줄에 칭칭 감겨버리는 아이, 100번째 손님까지 초콜릿을 준다고 하면 101번째에 줄을 서는 아이, 투수로 있는 야구팀은 백전백패인 아이.
어린 패배자 찰리와 마음 한 조각을 나눠 가지며 찰리 브라운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을 듣는다. “<피너츠>의 주제를 굳이 찾는다면 항상 패배하는 찰리 브라운이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거 아닐까요?” <피너츠>의 작가 찰스 슐츠의 말을 떠올리며. p.m.11:36
“잠이 안 와. 계속 내가 실수한 게 떠올라.”
–찰리 브라운Charlie Brown
유예
9와 숫자들
어느 해 봄날, 두 손을 세수하듯 펼쳤다 접었는데 그사이 꽃잎 하나가 오목한 손바닥 안에 들어왔다. 벚꽃 이파리였다. 떨어지는 벚꽃잎을 잡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며 이죽대던 친구는 어떤 사랑이 이루어지는지 지켜보겠다며 그 뒤로 만나는 족족 “연애해?”라고 물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손톱을 잘 깎는 아이였다. 첫눈 오는 날까지 손톱에 봉숭아 물이 남아 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단 말이 싫어서 게으르지 않게 물들인 손톱을 깎아냈기 때문이다.
벚꽃잎을 잡은 순간 느낀 우연한 설렘은 손톱깎이 같은 친구의 한마디에 금세 사라졌지만, 나는 이 레코드판을 꺼낼 때마다 촉촉하고 보드라운 꽃잎의 감각을 어렴풋이 떠올릴 수 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물건은 아름다웠다. 아무 의미도 없고 곱게 생겨 있는 물건에는 위안이 있었다.” 강신재의 <황량한 날의 동화> 한 대목을 떠올리며 레코드판을 정리하고 잠자리에 든다. a.m.00:22
“잠들어버릴 거예요 난 너무 졸려서 오늘밤엔 꿈도 못 꾸겠네요”
– ‘눈물바람’ 중에서
휴일엔 책을 들고 창가로 간다. 햇살이 가장 잘 드는 곳에 앉아 독서를 시작하면 기다렸다는 듯 햇빛이 기척을 전해온다. 책장에 그늘을 만들거나 노란빛을 일렁이면서. 가끔은 읽고 있는 문장에 제빛을 기울이며 독서를 안내하기도 하는데, 햇살을 느끼는 그 시간이 못내 사랑스럽다.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
유계영 l 문학동네
햇살이 잘 드니 좋다. 마치 독서 길잡이처럼 햇살이 한 행 한 행 드리웠다, 사라진다. 어릴 때 엄마가 그런 얘길 했다. “먹으면 배불러지는 알약이 있으면 좋겠어.” 엄마는 맛있는 걸 먹어도 즐거워할 줄 몰랐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때때로 맛있다고, 이것 참 괜찮다고 이야기하지만 “너무 맛있다!”고 말하는 걸 본 적은 없다. 이 시집엔 이런 문장이 있다. “엄마는 육십 살이 되면서부터 무엇이든 열심히 먹었다” 내 엄마도 그렇다. 맛있게 먹진 않아도 열심히 먹는다. 햇빛을 따라 문장을 읽는데 막 이를 닦은 엄마가 체중계에 오른다. 볶은 땅콩 약간과 빵 조금, 그보다 적은 커피 한 모금을 먹은 상태였고 엄만 ‘가까스로 늘린 몸무게가 또 빠졌다’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아,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 a.m. 11:38
연필로 그은 밑줄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세요 이를 테면 토끼나 불로소득 같은 거요”
– <치(齒)> 중에서
일인용 책
신해욱 l 봄날의책
어린 시절 학교에서 ‘가족 신문 만들기’라는 숙제를 내줬다. 온 식구가 둘러앉아 신문을 만들었는데 상을 받아 운동장 한쪽에 전시가 됐다. 학년별로 잘 만든 신문을 세 개씩 뽑았고 내 것은 가장 잘 보이는 중간에 전시됐다. 며칠쯤 지났을까 내 신문만 눈에 띄게 허옇게 변해 있었다. 특히 빨간 사인펜으로 그린 곳이 전부 그랬다. 나는 누군가 지우개로 박박 지웠다고 생각하곤 분한 마음에 칭얼대는데 뜻밖의 얘길 들었다. “이건 햇빛이 그런 거야. 빛에 바랜 거야.” <일 년간의 햇빛>에는 어린 내 머릿속에 맴돌던 질문이 문장으로 고스란히 담겨 있다. “햇빛은 이 색깔들을 전부 어디로 거둬들이는 걸까.” 700자 제한을 두고 편편이 엮인 산문들을 읽는 동안 온몸이 햇볕에 달궈져 따뜻해졌다. 등이 살짝 따가워 나머지는 그늘에 숨어들어 읽기로 했다. 살금살금 그림자로 향하는 중에 읽은, “생물은 햇빛 속에서 색을 얻고 사물은 햇빛 속에서 색을 잃는다.”라는 문장이 너무 좋았다. p.m.02:16
연필로 그은 밑줄
“이렇게 얇고 바삭한 김을 먹을 수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다른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나는 김의 맛을 모르는 삶을 살았겠지. 김의 맛을 모르는 삶이라니. 아무래도 그건 나의 삶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 <소울푸드> 중에서
사랑하는 개
박솔뫼 l 스위밍꿀
어려서부터 강아지나 고양이보다 사람을 더 좋아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강아지나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내 머릿속엔 몇 개의 강아지 이름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강아지의 이름들. 애기, 쁘띠, 초롱이, 호두, 감자, 살구, 바니, 또래, 루루, 흑당이, 돌돌, 똘멩이…. 그리고 여기 개가 되고 싶은 사람이 있다. 반려견과의 아름다운 이야기나 애틋하고 가슴 저미는 이야기는 여기에 없다. 그저 개가 되고 싶은 금이 있고, 그런 금의 말에 대꾸하던 개 노디가 있고, 금이 노디가 되고, 노디가 금이 되고, 노디가 된 금이 13년을 살다 죽고, 금이 된 노디가 20년 넘게 금으로 살아가는 이야기가 있다. 이 책에 따르면 개 앞에서는 “개가 되고 싶다”고 말하면 안 된다. 나는 이 책을 소리 내서 읽어보기로 했는데, “사는 게 너무 피곤하고 귀찮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요.”까지 읽고 나자 햇살이 너무 따사로워 우선 낮잠을 자기로 한다. p.m.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