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hhh

세상에 없는 마을
침묵의 장면들

침묵도 말이다.

모로 보인 세계

옆으로 누운 채 잠에서 깰 때가 있다. 몸은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고, 나는 수십 개의 다리를 본다. 리듬에 맞춰 앞으로, 뒤로, 때로는 한두 바퀴 돌기까지 하는 그런 다리다.

눈을 떴을 땐 침대에 옆으로 누운 채였다. 모로 잠드는 게 습관이 되어서 나는 언제나 옆으로 몸을 틀고 잤다. 주로 눌리는 쪽은 오른쪽이었다. 아직은 밤에 가깝던 어느 새벽, 무심코 눈을 뜬 나는 생경한 장면을 마주했다. 까맣고 조용해야 할 방이 오렌지색으로 빛났고, 들어본 적 없는 저 세계의 말이 웅성웅성 귓가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가늘게 뜨고 있던 눈을 좀 더 크게 떴을 때, 내가 본 건 수십 개의 다리였다. 그 다리들을 감싼 새틴, 벨벳 재질의 옷감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신비로웠다. 펄럭이는 치맛자락과 우아하게 움직이는 힐, 칼 주름이 잡힌 바지와 광이 나는 구두, 힐 사이로 드러난 혈관이 도드라진 하얀 발과 구두 위로 올라온 고급스러운 양말…그리고 그 사이를 신명 나게 뛰어다니던 작고 가느다란 어린아이 다리들. 어디선가 들려오는 클래식 음악 소리 사이로 점점 더 커지던 이국의 말씨를 지금도 기억한다.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인 그것은 영어도, 불어도, 일어도 아니었다. 어째서인지 나는 이 대화가 이 세상에 없는 언어로 이루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새벽, 유일하게 이해할 수 있는 건 나는 이 언어를 절대 배울 수 없다는 사실과 이 다리의 주인들은 밝고 행복하다는 것이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불면이라는 걸 겪어본 적이 없다. 잠에 못 들어 괴로워하는 친구들을 곁에 두어 꽤나 고통스럽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나는 오밤중에 커피를 마셔도, 서너 시간씩 낮잠을 자도, 오후 3시에 기상해도 어딘가에 눕기만 하면 잠들 수 있었다. 그래서 그날 새벽의 경험은 더더욱 이상했다. 불쾌하지도, 고통스럽지도 않았지만 수면 장애라 불러야 마땅할 것 같았고, 수면 장애라기엔 지나치게 편안해서 쉽게 이름 붙이기가 어려웠다. 눈앞에선 수십 개의 다리들이 움직이고, 알 수 없는 대화가 오가고, 오렌지 빛깔은 눈부시고, 나만이 침묵한 채 누워 있을 뿐이었다.

시간이 얼마쯤 지났을까. 기이한 풍경을 바라만 보고 있던 나는 이 장면이 아주 어릴 적, 그림책에서 본 장면과 무척이나 흡사하다는 걸 깨달았다. 《신데렐라》의 언니들이 갔던 무도회장이나《미녀와 야수》에서 보던 춤추는 장면 같은 것. 고운 옷감과 흩날리는 치맛자락이 그네들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는 걸 알려주었고, 보드라운 선율과 사뿐한 스텝이 춤의 장면이라는 걸 확신하게 했다. 나는 꿈인 듯 아닌 이 장면을 바라보면서 머리가 아주 느리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다리만 보이는 이 풍경이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건 시간이 많이 지난 후였던 것 같다. 옆으로 누워 다리들을 바라보는 내 자세가 갑갑하다고 느껴 바꿔보려 했지만, 그땐 이미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입을 뗄 수도, 고개를 돌릴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으니까. 온몸이 빳빳하게 굳어 그들의 다리만을 보고 있을 뿐이다. 얼굴이, 표정이 궁금해도 결코 고개를 들 수 없었고, 하릴없이 소리만 듣고 있어야 했다. 그건 내가 겪어 본 첫 가위눌림이었다. 웅성거리는 저세상의 언어를 침묵으로 마주한 이후, 나는 가위에 눌릴 때마다 늘 같은 장면을 본다. 수십 개의 어른 다리, 아이들의 뛰노는 걸음, 웃음소리, 흩날리는 치맛자락과 구두 소리, 결코 끼어들 수 없는 다른 세상의 말씨…. 이상한 건 전혀 무섭지 않고 오히려 사랑스럽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칠흑 같은 세계

‘칠흑 같은 어둠’이라는 단어를 몸소 경험한 날이었다. 시신경이 끊어진 것처럼 눈앞은 새카맸고, 오로지 거센 파도 소리만이 귓가를 맴돌았다. 아름답지만 너무도 공포스러워서, 자칫 잘못하다간 검은 바다에 빠질 것 같아 조심히 걸어야 했다.

2013년 늦여름, 정동진에 가기로 했다. 한 번도 친구와 여행을 가본 적 없던 당시의 나는 ‘무박’여행이라는 말에 별생각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밤이라고는 단 하루도 새워본 적 없으면서, 친구들과 함께라면 바닷가에서 자지 않고 하룻밤을 보내는 것 정도야 너끈히 해낼 거라 생각했다. 우리의 목적지는 정동진이었다. 각자 집에서 가까운 역에서 같은 기차에 오르기로 했는데, 늘 지각을 하는 친구 한 명이 기차 도착 시각 5분 전까지 역에 도착하지 못했다며 우는소리를 했다. 두고 가야 하나, 내려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기차는 친구가 타야 할 역에 도착했다. 어쩔 수 없이 내려야겠다며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는데 가까스로 기차에 오른 친구가 숨을 헉헉 쉬며 옆자리에 앉았다. 심장이 덜컹한 나는 기차에서 잠을 좀 자 두려는 계획을 철회했다. 사이다와 달걀을 먹으며 기차 여행의 낭만을 한껏 즐기는 것으로 수면욕을 달래기로 한 것이다. 강릉역에 내려 가장 먼저 한 일은 오래된 원조 순두붓집에 들러 바닷물을 간수로 쓰는 말간 순두부를 먹은 것이었다. 새빨간 순두부찌개만 알던 나는 간장을 엷게 뿌려 먹는 이 푸근한 맛이 꼭 담요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담요 같다.’는 소릴 듣고 지각쟁이 친구가 말했다. “한여름에 담요라니, 너무 덥잖아.”

우리가 정동진에 가기로 한 건 해돋이도, 바다도 아닌 작은 초등학교 운동장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독립영화를 보는 영화제를 위해서였다. 플라스틱 의자가 나란히 깔려 있는 운동장의 모습은 어찌나 고즈넉한지 지금 생각해도 아름답고 아름답다. 주위에는 돗자리를 깔고 둘러앉아 무언갈 먹고 마시며 영화와 어우러진 사람들이 있었다. 자그마한 부스에서 뻥튀기 같은 걸 사 먹거나 영화제 굿즈를 구경하면서 하루를 보내는 건 지극히 여름밤스러웠다. ‘컨츄리꼬꼬’라는 간판을 단 낡은 치킨집에 들어가 치킨을 먹은 것도, 정동진 모래시계를 오래 관찰한 것도 참 이상한 경험이라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밤은 계절답지 않게 일찍 찾아왔고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고는 검은 해변을 거닐기 시작했다. 지각쟁이 친구는 하늘에 별이 많다고 했고, 키가 큰 친구는 손을 뻗으면 별이 잡힐 것 같다 했고, 눈이 나쁜 나는 별이 보고 싶다고 했다. 얼마쯤 걸었을까. 새벽을 어떻게 보내면 좋을지 이야기하는 친구들 곁에서 눈앞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부릅뜨고, 허벅지를 꼬집고, 머리카락을 하나씩 뽑아봐도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결국 나는 모래사장에 앉아… 그 뒤로는 기억이 가물가물해 자의로 누워 잔 것인지, 까무룩 잠에 빠진 것인지, 정신을 잃은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눈을 떴을 땐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바닷가였고, 나는 부랑자처럼 모래사장에 드러누워 있었다. 사려 깊은 친구들이 돗자리에 눕혀놓은 것 같긴 한데, 어째서인지 머리만 간신히 돗자리 끄트머리에 닿아 있었고 눈앞이 새카매 꿈인지 생시인지 좀처럼 분간이 안 갔다. 저 멀리 친구들 목소리가 들려 생시라고 생각했지만 목소리의 방향이 확실치 않아 오히려 더 모호해진 밤이었다. 신발 속에 들어온 모래 알갱이를 탁탁 털어내며 일어선 순간, 내가 딛고 있는 땅과 멀기만 했던 하늘이 뒤엉켜버렸다. 

새카만 허공을 딛는 듯한 감각은 조금 무서웠다. 눈앞에 보이는 건 까만 밤과 까만 바다, 그 경계를 알 수 없어 허우적대는 내 발뿐이었다. 친구들 목소리는 점점 멀어져 닿지 않는 곳까지 가버렸고, 이젠 그 누구의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드넓은 모래사장, 그보다 더 넓은 바닷가엔 오로지 나뿐이었다. 조심히 걸어 나가 보았지만 점점 더 커지는 듯한 파도 소리에 나는 걷기를 멈추어야 했다. 철썩, 가까워지는 소리와 쏴아, 멀어지는 소리. 그렇게 반복되는 파도 소리에 잠겨 긴긴밤을 보내고 어슴푸레 동이 텄을 때, 아주 먼 곳에서 친구들을 발견했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간신히 집에 돌아온 나는 어찌할 도리 없이 이틀을 꼬박 앓았다. 땀을 흥건하게 흘리며 앓는 내내 새카만 꿈을 꾸었다. 파도 소리가 가까워지고 다시 멀어지는 꿈이었다. 귓가를 넘실거리던, 소리로 꾸는 꿈은 나를 깊은 잠에 들지 못하게 했다. 미지근한 땀을 흘리며 얕은 잠 속에서 깨고, 다시 잠들고, 또다시 깨기를 반복했을 뿐이다.

가늘게 엿본 이별의 세계

“잘 지내고.” 한마디를 끝으로 입을 다문 한 쌍이 있었다.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나는 언 손을 연신 비비며 아주 많은 말을 들은 것 같았다. 그들이 침묵으로 나눈 대화는 오래도록 겨울 공기 사이를 헤매고 있었다.

버스보다는 전철을 좋아한다. 반드시 ‘내려주세요!’ 하고 벨을 눌러야만 문이 열리는 버스는 왠지 모르게 부담스럽다. 어린 시절엔 버스에 오르면 벨을 누를 용기가 없어 내가 내릴 정거장에 아무도 내리지 않으면 몇 정거장쯤 지나더라도 사람들과 섞여 내리곤 했다. 나 하나 내리자고 누군가 하게 되는 수고가 싫었다고 해야 하나. 안 그래도 부담스러운 버스인데, 버스를 더욱 멀리하게 된 건 정류장의 형태가 바뀌면서부터였다. 언젠가부터 버스 정류장이 중앙 차로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데 생긴 버스 정류장은 방향을 가늠하기 어려운 구조였다. 가뜩이나 ‘방향치’ 소리를 듣는 나한테는 버스에 제대로 오르는 게 아무래도 쉽지 않았고 버스 정류장만 보면 머릿속이 어수선해지곤 했다.

아마도 2017년 겨울이었을 것이다. 어쩌다 만남이 길어져 마지막 전철을 놓치고 하릴없이 버스를 타기 위해 역 바깥으로 나온 날이었다. 버스 방향과 노선을 파악하기 위해 부산스럽게 애플리케이션을 확인하며 걸음을 옮길 때, 늦은 시각에도 가득한 인파 사이로 남녀 한 쌍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 사이에는 그들만의 공기라는 게 있어서, 어떤 공기는 주위 사람들에게도 쉽게 전파되곤 한다. 이를테면, 싸움의 분위기라든지, 불쾌감의 공기라든지, 이별의 순간이라든지…. 아주 멀리서부터 나는 그 둘이 곧 이별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신기나 예언 같은 미지의 감각이 아니었다. 누구라도 그들을 보며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 터였다. 묘하게 풍기는 슬픔의 냄새는 이별을 향해 있었지만 두 사람은 어쩐지 덤덤해 보였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가까이 간 건 아니었다. 내가 탈 버스 정류장 가까이에 그들이 있었고, 나는 한 발 한 발 걸음을 내디디며 그들의 목소리와 가까워졌다.

그때까지 내가 아는 이별의 장면은 그런 거였다. 이별을 원하는 한 사람과 사랑을 원하는 한 사람의 간극이 벌어져 눈물과 악과 간절함과 애원이 뒤엉킨 감정의 극한 상태, 혹은 문자로 통보하는 시답지 않은 풍경, 혹은 악을 지르고 침 튀기며 제 할 말만 하고 돌아서는 엉망진창의 상태. 대개 이별 장면은 아름답지 않았기에 듣는 것도, 보는 것도 원치 않았지만 그날 그 남녀의 모습엔 자꾸만 눈길이 머물렀다.

잡았던 손을 놓고 여자가 말했다. “이제 우리는 앞으로 이렇게 만날 수 없는 거네.” 놓은 손을 다른 손으로 매만지며 남자가 말한다. “네가 잘 지냈으면 좋겠어.” 남녀는 서로를 보고 웃었고, 그 이후 내가 탈 버스가 도착할 동안 둘은 얼굴을 마주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둘은 방금 막 이별한 연인이었다. 그런 건 그냥, 말해주지 않아도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그때 나는 어른의 이별이 이런 거구나, 하고 느꼈다. 이제 우리는 서로의 생활에 관여하지 않겠지만, 어떤 삶을 살든 잘 지냈으면 좋겠다며 안전히 안녕하는 장면. 누군가의 옆에서 입을 꼭 다물고 있는 건 실례라고 느낀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 안전한 안녕을 본 이후로 나는 침묵에도 메시지가 담길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언젠가, 나도 저렇게 많은 것들을 담아 입을 다물 수 있을까? 침묵으로 말하는 사람이 되었을 때, 비로소 진짜 어른이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AROUND 온라인 구독

어라운드의 모든 콘텐츠를 무제한으로 읽어보세요.

구독 시작하기

글 이주연

일러스트 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