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arately Together

우리를 자라게 하는 시간:
그림책에서 만나요

한 인터뷰어가 그랬다. “랭보를 좋아하는 엄마와 시계를 분해하는 아이. 나는 이 둘의 이야기가 너무 궁금해요. 계속해서 듣고 싶어요.” 아이는 말했다. 우리는 다르지만, 그래서 멋지다고. 나는 말한다. 돌아보니 눈이 부신 시간들에 아이와 나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거기 있었고, 그렇게 우리는 늘 함께였다고. 그러니까 이 엽편들은, 가정 안의 내가 누구이고 어떻게 살고 싶은지 잊지않으려 애썼던 흔적이다. 아이의 세상과 내 세상을 동시에 일궈야만 하는 시절에 관한 기록이다.

이연진
어린 시절부터 지금껏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 심미적 취향 생활자, 다정하고 느리게 살아가는 엄마로, 숲 곁에서 생활하며 글을 쓰고 가정을 돌본다. 내향적인 성향과 고유한 취향이 육아에 녹아드는 시간을 담은 《내향 육아》, 《취향 육아》를 썼다.

그림책이라는 문

어릴 적 그림책을 얼마나 가지고 있었는지는 잘 가늠되지 않는다. 다만 내 방에 장롱만큼 큰 책장이 있었고 그 책장 아래쪽에 ‘세계 명작 동화’류의 전집이 꽂혀 있던 기억만은 선명하다.

엄마의 밤색 마호가니 책장. 그 앞에만 서면 언제나 가슴이 두근거렸다. 삐거덕, 유리문을 열면 고소한 생강빵 냄새 같은 절묘한 향이 났는데 그마저도 아쉬워 책장에 코를 박고 숨을 들이쉬던 어린 날들. 돌아보면 그 책장은 《나니아 연대기》 속 나니아로 향하는 비밀의 문, 꼭 그걸 닮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선 학급 문고의 그림책들을 읽고 또 읽었다. 옆 반과 옆옆 반의 책까지, 아껴 읽는다고 읽었지만 드문드문 꽂힌 책들은 금세 동나버렸다. 책이라면 넉넉히 사주시는 부모님을 두고도 내겐 늘 책이 궁했다.

그때 내가 낸 묘책은 ‘친구네 집’이었다. 친구들 집엔 항상 그림책이 많았다. 물론 동네에 나만큼 책이 많은 아이는 없었으므로 더 정확히는 ‘아직 읽지 않은 책’이 많은 거였다. 그 길로 달려가 친구에게 과자며 젤리를 잔뜩 사 안기고 그 애 책장의 책을 읽었다. 과자를 다 먹고 낮잠도 다 잔 친구가 심심해, 나가자, 노래를 부르면 그제야 고개를 들던 여덟 살. 그렇게나 그림책이 좋았다. 놀이터보다, 과자보다, 그 무엇보다.

입 짧던 내가 음식이 나오는 그림책에 각별한 애정을 느낀 건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즉각적인 현실의 맛보다 천천히 그려보는 공상의 맛을 더 탐했기 때문일까? 줄거리를 좇다가도 이국적인 음식 이름에 속수무책 마음을 빼앗겼다. 마멀레이드, 고기파이, 산딸기 술은 정말 어떤 맛일까? 상상하며 그림을 그리고 그 아래 이름을 적어넣는 일은 그 시절 나만의 호사로운 취미였다. 그리하여 내가 만든 첫 번째 음식은 《작은 아씨들》에서 영감을 얻은 ‘체리 빵’과 ‘오뚜기 3분 스프’. 비록 무참한 실패였지만, 책을 읽다 오븐을 열고 그릇을 꺼내 무언가를 만드는 어린 마음은 충분히 달콤했다. 그때부터였지 아마. 부엌에 그림책을 두기 시작한 건. 그리고 먼 훗날의 어느 봄, 나는 엄마가 되었고.

 

내 아이만큼 어려운 게 세상에 또 있을까. 정말이지 이건 모르는 사람은 끝내 모를 일이다. 내 안에 탯줄로 연결되어 있을 때, 우리는 말 그대로 하나였다. 아이가 세상에 나오며 이야기는 달라졌다. 나는 그 지점을 오래 헤맨 사람이다. 그토록 다른 한 지붕 두 생활자. 아이와 나의 접점이 되어준 건 돌고 돌아 마침내 그림책이었다. ‘엄마, 나는 차가 좋아요. 자동차 많이 나오는 책 보여주세요.’ ‘나도 이렇게 물놀이하고 싶어! 같이 해줘요.’ 말 못하는 아가는 오랫동안 내게 그림책으로 말을 걸어왔고, 그걸 늦게 알아챈 나는 월동 준비하는 다람쥐마냥 바지런히 책을 모았다. 그림책은 우리가 서로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구나. 이제껏 책이라는 문으로 세상을 만나온 이에게 이보다 근사한 경험은 없을 거야. 내 품에서 잠든 아이를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부엌에 그림책이 많으면

걷기 시작할 무렵, 아이가 찾은 의외의 책 자리는 부엌이었다. 아이는 부엌을 좋아했다. 수시로 들어와 서랍을 열고 살림을 늘어놓던 조그만 아기. 그 애가 부엌 어딘가에서 그림책을 뽑아와 내 앞에 내밀면 이제 그런 일들마저 다 지루해졌다는 신호였다.

부엌에는 책이 많다. 부엌과 책, 모두를 애착하는 사람인지라 거기서 밥도 짓고 책도 읽는다. 레인지옆에, 컵 선반 위에, 포개둔 접시 틈과 와인 셀러 속에. 책과 그림책들이 마치 거기가 제자리인 양 천연덕스레 놓여 있다. 누구 하나 그러자 하지 않아도 거기에 그림책이 있으니 시작되는 놀이가 매일 피어났다. 복닥복닥 어수선해도, 찬장 속에 그림책을 넣어두고 그날에 맞춤한 책을 골라 곶감 내주듯 읽어주는 일은 갈수록 즐거웠다.

하여, ‘부엌 그림책’은 따로 모은다. 면면이 고운 책, 따뜻하고 밝은 책, 진심 어린 염려와 격려가 담긴 책이 내 부엌에 산다. 그 책들만큼 좋은 육아 동지를 여전히 알지 못하는 까닭에 아이와 뭘 할까, 뭘 먹을까 하는 궁리 끝에는 늘 그림책을 펼친다.

그중 유달리 마음 가는 책이 《엘리엇의 특별한 요리책》이다. 30여 년 전 출간된 오래된 그림책. 나는 이 책을 아이를 낳기 한참 전인 2008년 종로의 헌책방에서 샀다. 작가가 비외르크라니, 가슴이 두근거려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아이가 서너 살 무렵부터 이 책을 꺼내 함께 빵을 굽고 수프를 끓였다. 책에 나온 채소를 마당에 심고, 샐러드를 만들었다. 식구 모두 이 책에 나오는 빵을 좋아해서 요즘도 자주자주 펼쳐본다. 통밀가루, 우유, 소금, 이스트만 넣고 굽는 소박하다 못해 투박한 빵. 그래도 그 정직한 맛에 끌려 주말이면 즐겁게 구워 따뜻하게 나눠 먹는다.

그날그날. 우리의 ‘지금’에 어울리는 그림책을 읽다 번뜩, 메뉴를 정하고 재료를 엮어보는 건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뭉게구름 가득한 날이면 머랭을 내어 ‘구름빵’을 만들고, 모든 게 다 귀찮기만 한 날엔 아이와 《주먹밥이 데굴데굴》을 펼쳐 주먹밥을 만든다. 고소한 냄새와 다정한 그림책, 아이의 웃음소리가 익숙한 공간에 한데 어우러진다. 삶이 좀더 말랑하고 폭신해지는, 내가 감히 행복이라 어림하는 그런 순간이 점점 불어난다.

“엄마, 이따가 책에서 만나요!”
나를 세워두고 놀이에 몰두할 때, 아빠와 산책을 나설 때, 혹은 잠에 젖은 목소리로 아이는 그렇게 말하곤 했다.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줄 때면 등장인물과 아이, 내가 하나로 뭉뚱그려지는 신기한 경험을 한다.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에 모인 사람들처럼 그 시간만큼은 순전한 한패가 된다. 책 한 권에 두 가슴이 하나로 엮이는 마법의 순간. 아이는 그 순간을 ‘만난다’고 표현한 게 아닐까.

어느덧 10대인 아이에겐 스마트폰도 카톡도 없다. 요즘 애들하곤 그런 게 없으면 소통이 안 돼, 그런말을 들을 때면 나는 부엌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낡은 그림책들을 떠올린다. 그러면 ‘우리에겐 그보다 더 강력한 끈이 있지.’ 하는 생각에 마음이 든든해진다. 마치 탯줄처럼, 지금껏 우리를 이어준 끈이 이 그림책들이었음을 기억해 주길, 하는 바람은 여기에다 먼저 적어둔다.

이 글이 나올 때쯤이면 우리는 더 많은 ‘그림책 만남’을 갖게 될 것이다. 뜨거운 여름을 보내고 고운 가을을 맞이하는 동안.

추천해요, 부엌 그림책

아이와 부엌에서 보내는 시간을 좀더 풍요롭게 해줄 그림책들을 소개합니다. 대단한 ‘요리’가 아니어도 괜찮아요. 서툴러도, 재료가 부족해도 좋기만 해요. 온 가족이 함께하다 보면 더 재미난 방법이 보일 거예요!

쥐돌이와 팬케이크 
글 나카에 요시오 | 그림 우에노 노리코 | 옮김 고향옥 | 비룡소

‘요리’가 부담스러운 날, 팬케이크는 좋은 친구가 되지요. 아이와 재료를 계량해 반죽하고 잘 익은 팬케이크를 좋아하는 접시에 담아 꾸미는 건 언제나 즐거워요. 플라스틱 칼로 팬케이크를 나눠보는 것도 소근육 발달과 수 개념 형성에 좋겠지요. 《쥐돌이와 팬케이크》를 읽고 팬케이크를 만들며 아이에게 “곤란한 쥐순이를 도울 방법은 없을까?” 묻는 것도 재미있어요. 여유가 있다면 베이킹파우더 없이도 팬케이크를 한 장 구워보세요. 납작한 ‘부침개 빵’이 만들어질 거예요. 아이와 비교해 보며 이유를 어림해 보기 좋답니다.

아빠와 피자놀이 
글·그림 윌리엄 스타이그 | 옮김 김경미 | 비룡소

저는 이 표지만 봐도 웃음이 나요. 저렇게나 넉넉하게 웃고 있는 아빠는 과연 어떤 피자를 만들까요? 산산한 주말, 부엌에서 아빠와 신나게 몸놀이 하고 좋아하는 토핑을 듬뿍 올려 피자도 만든다면 아이의 하루가 꽉 찰 거예요. 미리 토르티야나 식빵, 도우 생지를 준비해 두면 만들기가 더 쉬워집니다. 엄마는 쉬어도 좋아요! 저희 아이는 요새도 수시로 ‘아빠 피자’ 해요.

돌멩이 수프
글·그림 마샤 브라운 | 옮김 고정아 | 시공주니어

유명 옛이야기지요. 그래서 여러 버전으로 나와 있는데 저희는 마샤 브라운의 책을 읽었답니다. 차마 돌멩이를 넣을 순 없어 콩알을 넣고 끓였고요. “돌멩이 수프는 어떤 맛일까?” 아이에게 묻고 책 내용을 따라가면 일사천리입니다. 냉장고와 부엌 곳곳에 당근, 양배추 등 필요한 재료들을 숨겨두고 아이가 가져오면 퐁당퐁당 넣어 끓이시면 된답니다. 간만 잘하면 실제로 맛도 좋고 한 끼 식사로도 그만이에요. 베풂과 나눔에 대해 생각해 보기에도 좋은 책입니다.

글과 삽화가 두루 곱고 마음이 따끈해지는 책, 표지만 봐도 입맛 도는 책, 온 가족이 웃을 수 있는 책… 저는 이런 책을 부엌에 둡니다. 어떤 책이든 ‘부엌에 두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책을 발견하시면, 부엌 한쪽에 두고 아이와 여러 번 읽고 또 요리도 해보면 어떨까요? 그렇게 오래 읽어 정다운 그림책과 엄마 목소리, 오늘 공기의 촉감과 냄새와 맛… 그런 선명한 장면들이 아이의 오감과 함께 쑥쑥 자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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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다은

글 이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