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eated but not repe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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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하지만 반복되지 않는 것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가까운 것에서 먼 것으로, 가까운 사람에게서 먼 사람에게로. 대개의 좋은 영화는 그 사이를 오가는 움직임을 어떤 예감처럼 보여주는 것 같다. 그렇게 영화는 우리의 삶과 함께 계속된다.

그의 이야기

 우리 집 거실의 동시 상영 

이제 막 10개월에 접어든 아이는 거실 베란다 앞 창문을 바라보는 일을 꽤 좋아한다. 아니 좋아한다는 말은 어른의 시점이 개입한 수상한 말일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아직 말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니추측을 할 수밖에 없는데, 한 달여 전쯤 아이가 거실 앞 베란다 창밖에 흠뻑 빠져 있는 모습을 처음 발견했을 때의 경이로움을 잊을 수가 없다. 창밖에는 초록빛 물결이 있었다. 잎이 제법 큰 감나무의 잎사귀, 소철의 뾰족한 초록, 열세 살 아이의 키만큼 자라 있는 장미의 잎들과 키 작은 철쭉의 파란 이파리와 이름 모를 낮은 묘목 등….

새로 이사 온 집은 운 좋게도 많은 녹색 빛깔들이 투명한 창밖을 채우고 있고, 때로 그 잎사귀 사이사이를 빠져나가는 바람과 빛의 움직임 때문에 초록빛의 물결을 볼 수도 있다. 아이가 흠뻑 빠져든것 역시 그 장면이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때 아이가 초록빛의 움직임이 가득한 어떤 영화를 보고 있다고 느꼈다. 아이는 빛과 그림자의 역동적 움직임에서 어떤 감정적 흐름을 읽고 그것을 즐기고 있었을까. 혹은 10살이 아니라 겨우 10개월이 된 아이에게도 자신을 붙들고 있는 어떤 기억이나 시간이 있는 것은 아닐까.

 

먼 곳에서부터 / 먼 곳으로 / 다시 몸이 아프다 // 조용한 봄에서부터 / 조용한 봄으로 / 다시 내 몸이 아프다 // 여자에게서부터 / 여자에게로 // 능금꽃으로부터 / 능금꽃으로…… // 나도 모르는 사이에 / 내 몸이 아프다

 -김수영, 〈먼 곳에서부터〉 전문

그녀의 이야기

두 번 본 영화는 두 편의 이야기가 된다

흔히 영화는 시간의 예술이라는 표현을 한다. 이 말은 영화가과거나 미래를 마음대로 다룬다는 의미가 아니다. 과거와 미래를 별 고민 없이 이어붙이는 영화는 실은 그리 좋은 작품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영화에는 영화만의 특별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과거나 미래를 하나의 장면-이미지 속에서 해결해야 하는 난제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장면 혹은 이미지라고 불리는 영상에는 시제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재적인 이미지 속에서 과거와 미래를 창조적으로 녹여내고 또 그것을 발생시켜야 하는 조건 속에서 영화는 자신만의 새로움을 빚는다.

아이가 바라보던 창밖은 거리상으로 몇 미터 바깥에 불과했지만, 나는 그때 아이가 머나먼 곳에 시선을 두고 있다고 느꼈다. 과거라고 불릴 만한, 혹은 미래라고 이름 붙여진 그 무언가를 아이는 그 초록빛의 물결 속에서 보았을지도 모른다. 이제 막 제 자신의 덜 자란 몸과 지구의 중력 등을 이해해가기 시작한 아이의 감각 속에도 어쩌면 어떤 슬픔과 아련함 같은 것들을 되새기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을지도. 먼 곳을 제 몸 가까이 감지하고, 또 제 몸 가까이 감지한 무언가로부터 먼 곳으로의 예감을 반복하는 이 움직임에는 영화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어떤 체험과의 유사함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요즘도 연우는 거실에 펼쳐진 자신의 장난감들과 놀다 어느 순간 창밖에 펼쳐지는 풍경의 물결 속으로 시선을 돌려 무언가를 한참 바라보곤 한다. 때때로 아내와 나는 그 순간을 뒤에서 몰래 지켜보면서, 또 숨죽여 눈웃음을 지으면서 감탄한다. 창에 비친 영화와 그것에 빠져든 아이의 등 뒤를 보여주는 영화, 그리고 창에 비친 영화에 빠져든 아이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엄마와 아빠가 그려진 영화. 적어도 세 편의 영화가 동시 상영 중인 이 순간은 절대적으로 반복 불가능한 순간을 담는다. 영화는 반복 상영이 가능하지만, 영화가 진정 담아내려 하는 장면-이미지는 반복 불가능한 순간일 것이다. 연우에게로부터 연우에게로, 아내에게로부터 아내에게로, 그리고 나에게로부터 다시 나에게로. 이름은 반복되지만 이름과 이름 사이에 반복될 수 없는 절대적 순간들이 그들의 삶 속에 새겨지길, 그래서 그들의 영화가 계속되길 바라며.

한국 영화사에서 올해는 특별히 기록할 만한 해가 되었다. 한국 영화 탄생 100주년이라는 기념에 제72회 칸영화제에서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2019)으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역사적인 일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21세기를 여는 시점에서 시작해 〈플란다스의 개〉(2000), 〈살인의 추억〉(2003), 〈괴물〉(2006), 〈마더〉(2009), 〈설국열차〉(2013) 등으로 꾸준히 이어진 그의 블랙코미디는 영화라는 매체가 어떻게 대중과 예술의 유쾌하고도 의미 있는 접합점이 될 수 있는지를 일관되게 보여주었다. 한국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포착하고 그 핵심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도 서민들의 잠재된 힘, 혹은 함께 사는 삶에 미약하지만 분명하게 내장된 긍정성을 동시에 끌어내는 역할을 그의 영화가 내내 해왔다. 

내가 그의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영상적인 측면에 있다. 특히 영화적 배경이라고 할 만한 풍경의 처리는 내가 본 한국 영화 중에는 비교할 작품이 없을 정도로 독특한 데가 있다. 말하자면 그레이와 옐로우에서 풍겨 나오는 느낌과 그 둘의 조화가 이뤄내는 특별한 분위기. 예를 들면 비 내리는 오후의 칙칙하고 축축한, 조금은 불길하고 다소간 우울한, 몽상에 잠긴 것만 같지만 지극한 현실이 육박하는 그런 장면과 장면의 연속들이 말이다. 그런 미장센에 매료된 나는 그의 영화가 새로 발표되면 어김없이 그 속에서 쓰인 그레이와 옐로우를 발견해내는 재미를 더불어 맛보았다. 어쩌면 봉준호의 영화는 그의 등단작인 〈플란다스의 개〉에서 그려진, 비 내리는 흐린 날과 노란 우의의 지독한 반복, 혹은 그것의 섬세한 변주 속에서 형성되는 게 아닐까 하고 오해해가면서 말이다.

봉준호의 작품이라면 송강호 같은 배우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더 많겠지만, 그의 영화를 지금 여기까지 견인한 것은 주연과 조연의 구분 없이 그의 영화에서 열연한 여배우들이 아닐까 싶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노란색 후드티를 입고 과도하게 비장한 표정을 짓는 얼굴을 관객에게 각인시킨 배두나, 〈괴물〉에서 어리숙한 아빠와 어리숙한 식구들의 보살핌(!)을 받고 자라 그 자신이 엄마가 되어버린 여중생의 모습을 수많은 겹으로 표현한 고아성, 그리고 〈마더〉의 김혜자. 봉준호의 영화에서 이 배우들을 빼버리면 무엇이 남을까. 

서로를 번역하는 이야기

〈마더〉를 말하기 위해 길게 돌아왔다. 최근 봉준호 감독의 수상 이후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다. 작정하고 본 것은 아니다. 아기를 재우고 이른바 육퇴(!)에 성공한 후, 초여름의 초저녁을 어떻게 보낼까 하던 남편이 같이 보자며 틀어둔 영화가 〈마더〉였다. 처음 보는 건 아니었으나, 대개 좋은 작품들이 그렇듯 다시 보니 처음 보는 듯 생경한 맛이 있었다. 예전에는 안보이던 장면, 대수롭게 지나쳐버린 게 분명한 대사들이 보이고 들렸다. 모두 열거할 수는 없을 그 재생再生들은 아마도 어느새 마더가 된 나 자신의 달라진 현실에 기반을 둔 이해 내지 해석의 차이에서 생겨났으리라. 

영화는 광활한 들판, 인기척은커녕 바람만이 오가며 그녀의 다리를 지울 정도로 무성하게 웃자란 들풀들의 흔들림을 포착하며, 그 속에서 들풀인 듯 사람인 듯, 감정이 흘러넘치는 듯 메말라 사라진 듯 춤을 추는 배우 김혜자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몇 년의 간격을 두고 이 영화를 두 번 본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무엇보다 이 첫 장면이다. 바람 같은,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그녀를 쥐고 흔들어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그 힘에 몸을 내맡기고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그녀는 이내 우주에서 가장, 혹은 유일하게 자발적인 힘으로 움직이는 존재처럼 그 속에서 홀로 빛난다. 그것은 한 배우가 단지 몇 분 동안의 화면 속에서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길고 깊은 서사와 심리를 담아낸다는 점에서 봉준호의 영화사에서뿐만 아니라 한국 영화사에 남을 장면이 될 것이라 나는 믿는다.

엄마가 되기 전과 후의 나는 왜 같은 장면을 두 번, 다르게 봤을까. 이 신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쩌면 당연해 보이기도 하는 이 달라짐에 신비라는 이름을 붙일 수밖에 없는 데에는 무슨 말로도 이 극적인 변화를 설명할 수 없을 것만 같다는 막연한 예감이 있다. 그러니까 나는 나에게서 일어나는 이 변화를 비롯해 앞으로도 수없이 맞닥뜨리게 될 사소하고도 사소하지 않은 달라짐들을 그저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라는 두렵고도 설레는 예감 말이다. 엉뚱한 소리 같지만, 아이를 낳고 기르며 ‘어쩌자고 내가’ 하는 생각을 몇 수천 번 하면서 나의 부족을 절감하다가도 나를 바라보는 말간 얼굴을 마주하면 다시 어떻게든 온 우주의 기운을 끌어와 이 아이에게 주자고 용기를 내게 되는 것보다 더 이상할 일이 있을까. 엄마가 되어 사는 세상은 정말이지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 같다.

 

아이가 서두르듯 벌떡 일어나 부엌 등을 끈다. 춥고 어두운 겨울밤. 아이와 나 사이에 노란 빛이 일렁인다. 불빛 아래서 우린 왜 조금씩 달라 보일까. 이제 정말 소원 빌 시간이다. 아이에게 박수쳐줄 준비를 하며 숨을 고른다. 재이가 눈을 감고 슬며시 미소 짓는다. 그런데 그걸 본 순간 내 속에서 짧은 탄식이 터져나온다. 웃음 고인 아이 입매를 보자 목울대가 매캐해지며 얼굴에 피가 몰린다. 불현듯 저 손, 동영상에 나온 손, 뼈마디가 굵어진 손으로 재이가 황급히 가린 게 비명이 아니라 웃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말 그렇다면 그동안 내가 재이에게 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윽고 눈뜬 아이가 맑은 눈망울로 나를 바라본다. 그러곤 가슴팍을 크게 부풀려 숨을 모은 뒤 초를 향해 훅 입김을 분다. 초가 꺼지자 주위가 순식간에 어두워진다. 그 어둠 속에서 잘 보이지도 않는 재이 얼굴을 찾으려 나는 꼼짝 않는다. 

                                                                                                   -김애란, 〈가리는 손〉 중에서

 
 
영화 얘기에서 시작했지만, 결국 영화가 되비춰 준 나의 현실로 돌아왔다. 영화는 영화의 내용으로써만 아니라 그 형식 자체로 그 이야기에 쉽게 또 오래 몰입하게 한다. 〈마더〉가 나에게는 두 개의 영화로 재생되면서 엄마라는 이름에 대해 다시금 골똘하게, 새삼 존재론적으로 고민하게 만들었듯이 말이다. 인용한 소설 역시 〈마더〉와 마찬가지로 아들의 결백을 주장하(고자 하)는 엄마의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여기에 살인 사건을 목격함으로써 거기에 연루된 아들과 그 아들의 결백을 ‘믿고 싶어 하는’ 엄마가 있다. 믿는 게 아니라 믿고 싶은 것. 그러니까 엄마는 제가 낳고 먹여 기른 아들을 결코 알지 못하고, 안다고 말하지 못한다. 그것은 어떤 관계에서나 마찬가지겠지만, 엄마와 자식 사이에 가로놓인 그 명백한 암흑은 특별히 애달프고 공허하다. 끝내 아들이 여중생을 죽였는지, 혹은 아들이 손으로 가린 것이 비명인지 웃음인지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꼼짝 않고 아들이 앉아 있는 어둠 속 건너편을 직시하는 엄마의 부동은 세상 어떤 움직임보다 격렬하게 느껴진다. 〈마더〉의 첫 장면이 〈가리는 손〉의 마지막 장면으로. 영화와 소설은 이렇게 서로를 번역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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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나영, 송종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