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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 부부의 책갈피
어쩌면 기원과 기다림은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 유지하는 중요한 삶의 형식이 아닐 수 없다. 저 둘을 통해 우리의 삶은 어떤 공허와 피폐 속에 침잠하지 않을 수 있다.
그의 이야기
아마도 사람마다 특정 단어를 대하는 감각은 다를 것이다. 개인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나에게는 일상적으로 사용하기까지 시간이 꽤 오래 걸린 표현이 하나 있다. ‘기원祈願하다’라는 단어가 그것이다. 사전에서 뜻을 찾아보면 ‘누군가를 위해 대신 빌어주다’란 설명이 적혀 있는 단어, 종종 어떤 대화 끝에 혹은 인사 말미에 적힌 이 표현을 보며 나는 늘 좀 어색하게 느꼈다. 생각해 보면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은 나 스스로 기원의 의미에 너무 큰 무게를 지우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위해 대신 기도한다는 행위를 과도하게 염결성을 따져가며 의문으로 삼았던 것이다. 약간 삐뚤어진 내 마음은 그 말이 인사처럼 누구나 쉽게 할 수 없는 행위라고 여겼다. 그러니 그 말이 텅 빈 내용의 관습화된 인사 형식처럼 사용되는 되는 기미가 보일 때마다 본능적인 거부감이 작동했던 것일지도. 자연스럽게 저 말을 되도록 쓰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어떤 단어나 표현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지는 걸까. 나는 요즘 종종 어떤 인사나 대화 끝에 기원하다, 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가령 어제는 동료 선생님의 아버지가 몸이 많이 편찮으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기원합니다’, 라는 표현이 담긴 문자를 보냈다.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경우가 삶에는 비일비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그 말에 누군가의 마음이 스며들 수 있다고 믿게 된 듯도 하다. 아마도 세상에는 나의 부족한 능력으로 적극적으로 응대하기 힘든 일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였던 거 같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는 일, 감당하기 힘든 일을 앞에 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겨우 기도에 그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 기원이라는 말을 마음에 담았다. 그렇다고 해서 기원의 행위와 그 표현 안에 무력함을 은폐하는 어떤 방어적 행위라는 생각을 숨겨둔 채로 믿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기원이라는 행위와 그것을 표현하는 말에도 분명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고통에 빠진 한 사람을 구하려면 실질적으로 작용하는 물질적 도움이 필요하지만 동시에 실질 속에는 그 사람을 바라보는 따듯한 시선과 말 한마디가 절대적으로 요구된다는 말을 신뢰한다.
인간은 시선과 말속에서 욕망을 가동시키는 복잡한 정신의 소유자이지 않은가. 그런 면에서 어쩌면 기원은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 유지하는 중요한 삶의 형식이 아닐 수 없다. 기원을 통해 우리의 삶은 어떤 공허와 피폐 속에 침잠하지 않을 수 있다.
– 김사인, <화양연화> 중에서
다시 사월, 연둣빛이 시야를 채우고 색색의 꽃들이 피어나고 상승한 기온이 바람을 일으켜 코끝을 간지럽히겠지. 때로 기다림과 무관한 봄비가 세상을 적셔 길바닥에 꽃무늬를 펼칠 것이고. 다른 때와 달리 올해는 특수한 사회적 상황 때문에 사람들이 멀리 있다. 그런데 이 물리적 거리 두기가 이웃에 대한 소원해진 마음으로 이어지거나 해석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다시 사월, 시인의 표현처럼 슬픔이 없는 나라로 가서 철모르는 오누인 듯 살아갔으면 하는 아이들이 떠오른다. 그 아이들을 떠올리며 애달프지 않은 사람 어디 있을까. 지난 삼월에도 슬픔을 이기지 못한 아버지 한 분이 아이들을 따라 떠났다는 참담한 소식이 또 들려왔다. 감히 기원한다. 그분들이 더 이상 고통 속에만 있지 않기를. 사람들의 기원이 작은 우산이 되어 쉼 없이 슬픔에 젖은 분들의 마음에 빛이 들게 하기를.
그녀의 이야기
나는 봄을 싫어하는 아이였다. 좋아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싫어하는. 어린 시절에는 그게 뭔지도 모른 채로, 왜 그런지도 모른 채로 그저 ‘우울한’ 봄날을 견뎠다. 바짝 말랐던 가지가 통통해지고, 하룻밤 사이에 내 손톱만큼 연둣빛 새잎을 내고, 잎이 점점 커지고, 꽃망울이 함성을 지르듯 터지고, 꽃이 활짝 피고, 더 활짝 피고, 더 피어날 허공이 없을 지경이 되어서야 후드득 바람에 날리고, 날리고, 날려서 이내 세상을 뒤덮을 때, 봄비가 내렸다.
봄비는 한때의 환함, 화사함, 향기 같은 것들의 난장을 일단락하듯이 정성껏 내려 나무도 땅도, 먼지 묻은 새 운동화 바닥도 깨끗이 닦아주었다. 그러면 비로소 나는 큰 숨을 들이쉴 수 있었다. 학교 운동장 한쪽에 있는 등나무 벤치에서 풍겨오는 닦인 돌과 흙과 잎 내음이 그제야 깊숙이 느껴졌고, 나중에 배운 말을 통해서 그 기분이 일종의 안도감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그때 그 감정의 원인에는 ‘새것’이 주는 낯선 기분이 큰 몫을 차지했던 것 같다. 새 학기, 새 친구들, 새 담임선생님, 그리고 연필, 지우개, 공책, 교과서 등 모두 새것인 내 것들에 둘러싸인 그 시간이 불편했다. 아마도 내성적인 성격 탓이었겠으나 봄이 무르익는 동안, 여린 잎이 단단하게 두께를 갖는 동안, 나에게도 어떤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했다. 바쁘게 돌아가는 새 학기의 시간에, 새 친구들과 새 학용품과 새 옷이 생겨서 좋지 않으냐, 어서 언니가 되어라, 하는 가족들의 응원과 격려에 멀미를 느끼며 봄을 견딘 나를 기억한다.
그래서 나에게 봄은 기다림의 계절이다. 딱히 다른 도리 없이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는 시간. 꽃이 피고, 만개하고, 빛깔이 흐려지고, 생기를 잃고, 어느새 바람에 날려 흩어지는 것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시간. 그 화사하고 따사로운 시간 속 어느 한쪽에는 느리게 녹아가는, 서서히 피어나는 어떤 마음이 자리하고 있다.
물질마다 녹는점이 다르듯 봄을 맞이하는 시점도, 기지개 를 켜며 깨어나 ‘이제 괜찮아, 기분이 좋은걸?’ 하고 환하게 웃을 수 있는 시기도 저마다 다른 것이다. 봄은 매년 그 당연한 사실을 내게 깨우쳐 준다.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사람과 사람, 저마다 다른 이 속에서 비로소 함께 존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기를 낳고 몇 번의 계절을 지나오면서 기다림이라는 말에 대해 수없이 생각했다. 기다림이야말로 한 사람의 인격을, 품의 너비와 깊이를 측정하는 척도가 될 수 있겠다고 말이다. 특히 요즘은 육아서라는 명목으로 세상의 모든 양육자와 아기에게 똑같이 주어지는 정보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지 않고, 물 먹고 눈물 콧물 흘리지 않고, 기진맥진하지 않고 중심을 잡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몸에 힘을 빼고, 마음을 비우고, 내 앞의 한 숨결이 스스로 새로운 향과 빛과 모양으로 피어나는 것을 바라보는 일은 일종의 인격 수양과도 같다. 기다림은 그저 무위의 상태가 아니라 고단한 단련에서 발휘되는 힘이라는 것을 나는 이제 조금 알겠고, 그래서 내 아기의 얼굴 위에 눈물이 많던 어린 나의 얼굴을 겹쳐두고서도 진심으로 함께 환하게 웃어줄 수 있게 됐다. 나는 잘 기다리는 아이였으므로, 나의 아이 또한 언제든 언제까지나 기다려줄 수 있을 것이므로.
“나는 몰랐어…… 이런 게 있었는 줄은.”
그것은 혼잣말 비슷한 것이긴 했지만 이날 우에노에서 우리가 만난 뒤 인사말을 제외하고는 처음으로 내게 건넨 말이었다. 나는 그녀가 충분히 오랫동안 그 생물을 바라보기를, 그것이 살아 움직였던 머나먼 과거를 상상해보기를, 그것의 호흡을 느끼기를 기대하면서 아무 대답도 않고 함께 옆에 서 있었다. 그녀는 꽤 오랫동안 인드리코테리움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나만큼 그 생물을 보고 전율을 느꼈는지는 모르겠다. 한참 동안 그것을 바라보던 그녀는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것들도…… 자기들이 영원할 줄 알았겠지?”
– 정영수, <여름의 궤적> 중에서
젊은 시절에 결혼을 하고, 역시 젊은 시절에 이혼을 한 두 사람이 여기에 있다. 결혼한 이유도, 이혼한 이유도 딱히 분명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이들의 관계는 이국의 어느 서점에서 우연히 이어진다. 우연한 만남과 우연한 동행. 끊어진 것 같았던 관계는 다시 이어져서 두 사람을 그들의 과거이자 미래를 예감하게 하는 현장으로 이끈다.
자연사박물관의 한쪽에 자리한 인드리코테리움의 뼈대는 고래를 제외하고는 지구상에서 가장 큰 포유류의 삶의 크기를 분명하게 증명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 거대함 역시 영원할 수 없다는 존재의 유한함을 상기시킨다. 그래서 이 장면은 낯설고, 고요하고, 슬프고, 신비롭고, 무엇보다도 ‘이다음’을 생각하게 한다.
“충분히 오랫동안 그 생물을 바라보기를, 그것이 살아 움직였던 머나먼 과거를 상상해보기를, 그것의 호흡을 느끼기를 기대하면서 아무 대답도 않고 함께 옆에” 있어 주는 마음의 다른 이름은 ‘이다음’에 대한 기다림이다.
혹시라도 너와 내가 함께였을 때 너와 나의 내면에 살아 움직이던 어떤 것을, 그것과 함께하던 호흡을 되살릴 수 있다면 그 유일한 방법은 “충분히 오랫동안” 기다리는 일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예상치 못하던 어느 시절, 어느 장소에서 소름 돋도록 실감하기도 한다. 기다림을 통과한 다음, 그곳에 무엇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보다 조금 더 괜찮을 것이다.
글 김나영, 송종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