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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에서 세상의 시작까지
세상의 끝에서
세상의 시작까지
끝이라고는 도무지 없을 것 같은 이 세상에도 끝은 있다. 일단 도착하고 나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그래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그곳. 세상의 끝. 그래서인지 끝으로 가는 버스는 벼랑 끝에 오래 서 있어본 사람들의 표정들로 가득하다. 무언가 얻기 위해 떠나온 것이 아닌, 무언가 먼 곳에 두고 오기 위해 떠나온 사람들. 나는 그곳에 나를 두고 오고 싶었다.
공항의 밤이 깊어간다
여행의 시작은 공항이다. 아니, 피곤한 줄도 모른 채 밤을 새워 여행지를 고르고 여행 가방에 넣을 짐을 생각하며 모든 물건의 값을 이국의 돈으로 환전해 셈해보기 시작하는 순간들. 그 마음들이 내게는 모두 공항이다. 내 마음에 공항이 있으니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여행자로 사는 삶이다.
공항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떠나는 사람과 남겨지는 사람. 누군가와 공항에서 인사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아무도 나를 버리지 않았는데 괜히 버려진 기분이 든다. 나는 남겨지기보다는 오히려 떠나는 사람에 더 가까웠는데, 언제든 내가 열고 나갈 수 있는 문 앞까지 갔다가 돌아왔을 뿐인데 문득 외로워지는 이유는 뭘까. 사실 떠나는 사람은 생면부지의 나라에서, 그렇게 떠나간 자리에서 더 지독히 외로워지게 될 텐데.
그래서 나는 가끔 혼자 공항에 다녀오는 연습을 한다. 여권도 비행기 표도 없이 공항 창가에 앉아 절반은 창밖의 사람들을 바라보고, 나머지 절반은 창문에 비치는 내 모습을 바라보는 일로 하루를 보낸다. 내 공항은 보통 해가 지고 나서야 운항을 시작한다. 팔 언저리에 비치던 비행기가 심장을 향해 이륙을 시작할 때, 긴 야간비행으로 불이 모두 꺼지고 잠시 눈을 붙이고 나면 우리가 전혀 다른 세상의 상공을 지나고 있을 거란 믿음으로 서로의 눈을 바라보다 잠들 때
그러니까 나는 내 비행기 표에 적혀있는 목적지 밖으로의 여행을 기대하는 셈이다. 그러나 그곳은 내가 떠나온 자리, 지나간 옛 기억들일 따름이기에 끝내 도착할 수 없는 여정일 뿐이다. 가끔은 오래된 기억을 잊는 것만이 계속 살아갈 힘이 되곤 하니까.
우리는 가끔 과거를 만나기 위해 미래로 향한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는 누구의 과거도 될 수 있기에 우리의 절반쯤은 여기에 남겨두고 나머지 절반의 마음으로 떠나는 것이다. 돌아올 곳이 있다는 것만큼 사람을 안심시키고, 또한 나약하게 만드는 것이 없기에 여행에서의 모든 경험이 이토록 큰 설렘을 주는 것이리라. 두고 가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영영 두고 가는 것도 아닌데 눈시울이 불거지고, 떠나는 사람들을 생각해도 영영 떠나는 것도 아닌데 눈시울이 불거지고 마는, 그 모든 순간이 참 아름답다. 예쁘다.
한나절 내내 환승을 기다리며 공항을 떠났다가 다시 공항으로 돌아오는 동안 여기까지의 생각을 적어두었다. 여행의 시작이 공항이듯 여행의 끝 역시 공항이니까, 집으로 돌아가 가방을 푸는 순간까지 여행은 계속되니까, 여행의 시작과 끝 사이에 잠시 쉬어가는 게 아마 이번 삶의 전부가 될 테니까.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내 기억도 참 아름답고 예뻤다, 할 수 있겠다.
한번 열린 여행은
닫히지 않는다
하필 크리스마스이브였고 비행기에는 빈자리가 많았다. 메리크리스마스 앤 해피뉴이어, 기장의 인사에 뒤이어 주변에 앉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잠시 눈을 붙였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꿈을 꾸다 보니 창밖으로 노을이 졌다. 리스본은 고즈넉하다. 이곳에 무던해진 사람들이 문 닫은 상점들을 스쳐 지나간다. 그들이 보는 내 얼굴 역시 그러한 듯하다. 여행자들에게 세상의 끝은 보통 여러 번의 여행 끝에 마침내 찾아오게 되는 곳이기에, 나 또한 여행의 종착이 될 만한 자리를 찾아온 것이었다. 그렇기에 여행자들의 얼굴은 차라리 외로움이란 한 단어에 가까웠고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 모습들에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후였다.
로시우 광장 근처 숙소에 짐을 두고 나와 한참을 걸었다. 아줄레주 양식으로 지어진 리스본의 건물들 사이를 통과해, 산타 주스타 엘리베이터와 개선문을 지나자 코메르시우 광장이 나왔다. 리스본 시민들이 독재 정권에 항거하여 투쟁을 이어가던 곳이다. 그들을 생각하며 테주 강 건너편 예수상을 가만히 바라보다 돌아섰다. 비행 전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아 속이 아플 지경이지만 식당에 들어가 무언가를 차려 먹기엔 그럴 만한 기분이 나질 않았다. 버릇대로 맥주 두 캔을 사들고 로비에서 빵 몇 개를 챙겨 리스본의 첫 밤을 보냈다. 아름답지만 창을 열어두고 자기엔 차가운 도시다.
새벽부터 로카곶으로 갈까 했지만 마음을 돌려 벨렘지구로 가는 트램을 탔다. 벨렘지구에서는 발견기념비와 벨렘탑과 같이 대항해시대의 영광을 보여주는 건축물들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지금 이 도시에는 염치 불구하고 다가와 적선을 바라는, 젊은 노숙인들이 차고 넘친다. 지난 시대의 영광 앞에서 벨렘탑은 이미 오래 전부터 무너지고 있었겠구나. 오래된 것들만이 오래 남아있는 풍경 사이를 걷다 보니 제로니무스 수도원 앞이었고, 마침 진행 중인 성탄 미사를 멀찍이 서서 지켜보다가 구시가지로 돌아와 로시우역에서 신트라로 가는 기차를 탔다.
한 시간 남짓 달려 도착한 신트라역은 시골의 간이역처럼 아담했다. 로카곶으로 향하는 403번 버스는 한 시간마다 운행되는 듯했지만 한 시간 반을 기다려도 버스는 오지 않았다. 건너편 레스토랑 직원에게 물어보아도 잘 모르겠다고 한다. 그사이에 함께 기다리던 사람들의 절반은 지쳐 리스본으로 돌아가 버렸고, 나는 딱 삼십 분만 더 기다려보자는 마음으로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그렇게 두 시간을 채웠을 무렵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버스가 도착한 것이었다.
버스 기사는 말쑥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중년 남자였는데, 곧장 버스에서 내리더니 지금부터는 휴식시간이라며 방금 내가 다녀온 레스토랑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이 당혹스러운 광경에 그제야 웃음이 났다. 다른 곳도 아니고 ‘세상의 끝’으로 가고 있으면서 나는 너무 서두르고 있었구나. 내가 잊고 있던 걸 저 버스 기사는 아주 당연하게, 또 아주 간단하게 일깨워주었다. 게다가 오늘은 크리스마스가 아닌가. 갑자기 커피 생각이 간절하다. 십오 분 후에 출발이라고 했으니 커피 한 잔을 위해선 조금은 서둘러야 할 것이다.
세상의 끝, 이곳에서
내가 끝나고 당신이 시작된다
세상의 끝이란 말, 참 아리다. 내게도 끝내 닿지 못할 자리가 하나쯤 있어 내게서 먼저 떠난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 볕이 잘 드는 집을 짓고 아름답게 살고 있었으면 했는데. 세상의 끝도 결국 이 세상 어딘가일 뿐이라니. 이토록 부릴 만한 낭만도 없이 도착하게 되는구나. 내게는 세상의 시작이었던 당신들을, 그런 당신들이 이제 내 세상에 없다는 걸 알기 위해서, 마치 안 될 걸 알면서도 하게 되는 사랑 고백처럼, 사랑도 없이 시작되는 이별을 맞이하기 위해 세상의 끝까지 가게 되는 순간이 온 것이다. 그러면서도 바로 가기엔 마음이 저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우회를 거듭하며 걸어본다. 어린 날 네게는 가지 못하고 네가 사는 집이 네가 살던 집이 될 때까지 주변만 맴돌던 나날을 다시 떠올리며. 그때의 수줍고 미숙했던 마음이 세상의 끝을 내게서 조금 더 멀리 보내주길 바라면서.
여기까지 왔지만 나는 세상의 끝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다만 상상을 한다. 세상의 끝에는 내가 기억하는 얼굴이 있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언제라도 알아볼 수 있도록 귀밑에 살짝 찍힌 점이라거나, 말끝을 흐리다가 다음 음절을 힘주어 말하는 습관이라거나, 거짓말이 아닌데도 목을 가리던 당신의 수줍은 진심이라거나. 세상의 끝에서, 아니 세상의 끝 너머에서라도 잊지 말자고 약속했던 우리만의 비밀―당신이 두 손을 내밀면 그 자리에서 데리고 떠나달라던―같은 것들.
하지만 당신은, 그리고 당신들은 세상의 끝에 없을 것이다. 나는 그 부재를 내 눈으로 보기 위해 무너지는 심정으로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이제 와 고백하건대, 이 한 장의 글을 쓰기 위해 당신들이 끝내 내 고백에 응답하지 않기를, 내가 이미 너무 늦어버렸기를 바란 적이 있다. 이제 와서라는 말은 이미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다.
수평선 너머로 넘어갈 것 같지 않던 해가 지고 사람들이 박수를 친다. 나도 따라 조용히 소리 없는 박수를 친다. 이제는 정말 돌아갈 일밖에 남지 않았구나. 여기까지 오기 위해 나는 또 생의 한 조각을 다 써버렸기에 아무리 맞춰도 비고 마는 퍼즐 판 앞에서 다시금 무너지겠다는 예감이 든다. 그러나 나쁘지 않다. 당신들이 내게 가르쳐주고 떠난 아름다움이 나를 아름답게 해주고 있기 때문에. 그렇기에 평생을 헤매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아름다워질 수 있기에. 세상의 끝에서 당신을 잃고 다시 찾는다. 이곳에서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는 한 포르투갈 시인의 문장*을 이곳에서 ‘내가 끝나고 당신이 시작된다’고 고쳐 적는다. 세상의 끝에서 세상의 시작으로 다시 사람이 그리워진다.
*유라시아 대륙 최서단 로카곶 십자탑에 새겨져 있는 포르투갈 시인 카몽이스의 구절.
‘AQUI ONDE A TERRA SE ACABA E O MAR COMECA’
에디터 김건태
글 김종연 사진 이훈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