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ole And Langue

우리 집에 있는 책 세 권

PAROLE AND LANGUE
우리 집에 있는 책 세 권

랑그Langue가 보편적이고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말이라면, 빠롤Parole은 개인이 가진 자신만의 의미를 내포하는 말이다. 우연히 서재에서 똑같은 책 세 권을 발견했다. 모두 주인이 다른, 자기만의 이야기가 담긴 《어린 왕자》였다. 각자의 빠롤을 들어보았다.

어린 왕자의
얼굴은

우리 집 서재에는 주인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책들이 얼기설기 섞여있다. 책등이 다 떨어져 너덜거리는 책부터 사놓고 열어보지도 않은 빳빳하고 멀끔한 책까지. 그곳에 내 손이 닿지 못한 것들이 무척 많은 까닭에 서재 탐험은 종종 나의 기쁨이 되곤 한다. 어느 날인가 여느 때처럼 서재에서 놀다가 아주 희한한 사실을 발견했다. 바로 엄마, 아빠, 나에게 각자의 《어린 왕자》가 있다는 것이었다. 책 발간 연도, 출판사, 언어, 심지어 어린 왕자의 얼굴마저 모두 제각기 달랐다. 오래될수록, 많이 읽을수록 책은 멀리 내던져진 공처럼 작고 까맣게 움츠러들어 있었다. 똑같은 책을 저마다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꽤나 특별한 의미를 감추고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건 확신 비스름한 것이다. 엄마, 아빠는 어떤 어린 왕자를 만났을까, 내 감정과 어떻게 다를까.

엄마가 어린 왕자를 처음 만난 건 고등학생 때였다. 국어 선생님이 이 책을 추천하면서 “지금 읽는 것과 20대가 되어서 읽는 것, 30대가 되어서 읽는 것이 모두 다를 거다.”라고 하셨단다. 그때 엄마는 이상하게도 걸리적거리는 것 하나 없이 훌훌 넘겨 읽었다고 했다. 딱히 어려운 구석 하나 느낄 새 없던 것이다. 그러다 어른이 되고, 아이를 낳고, 어린 나이에 홀로 육아를 껴안고, 직장에 나가 돈을 벌면서 마주하는 모든 것들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스물넷부터 아이를 키우고 직장 생활하고 공부하면서 얼마나 외로웠나 몰라. 어린 왕자가 장미 한 송이를 옆에 두고 지내잖아. 그가 나처럼 외로워 보이더라고. 어린 왕자를 돌봐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장미랑 이야기하는 것뿐이잖아. 내게 친정은 너무 멀고, 외로움을 달래줄 수 있는 것은 너희하고 글쓰기가 전부였어.”

그러고 보니 나도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이대마다 《어린 왕자》는 결단코 다르게 읽히고 이해되리라. 곧 두 계절이 지나면 내 나이의 앞자리가 바뀐다. 그때 어린 왕자의 얼굴은 또 어떻게 보이는 걸까. 엄마의 말에 따르면, 고등학생 때는 막힘 없이 읽히다가, 20대에는 자신의 일상에 놓인 수두룩한 감정과 현상을 투영해서 보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 30대가 되어서 비로소 조금 더 깊게, 왜 그 일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가 돌이켜 보며 읽게 된다고. 이어서 내게 어린 왕자가 지나가버린, 혹은 눈앞에 마주한 시대를 대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니 보는 사람마다, 시절마다 각자의 사연대로 바라보는 게 아니겠냐고 되물었다. 50대에 만난 어린 왕자는 어떤지 물었다. “마흔에 늦둥이 우빈이 낳고서 시력이 안 좋아져서 이젠 책 읽으면 눈알이 빠질 것 같아.” 이것도 50대가 된 그녀의 어린 왕자겠지.

결국
돌아오는 거지

우리 아빠로 말할 것 같으면 엄마보다 여섯 살 연하로, 이혼한 엄마를 졸졸 쫓아다닌 끝에 결혼에 성공했다. 총각 시절 아빠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싶어하는 사람이었다. 혼자인 생활을 이어가면서 갑자기 죽어도 이상할 게 없다고, 혹은 그래도 괜찮다고 믿었단다. 그리고 우리를 만나고, 아이를 낳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낯선 감정을 겪었다. 

“모두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각자의 아픔을 품고 있고, 그 채로 살아가잖아. 어른과 아이의 구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신체적인 구분이 아니라 심리적인, 정서적인 구분인 거지. 장미꽃의 이면에 숨겨진 내용은 어릴 때 모르거든. 한 번 앓고 봐야 세상을 볼 줄 아는 눈이 생기는 거야. 통과의례처럼.”

그는 나이 들면서 어린 왕자가 달라 보이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렇다기보다는 그의 세상이 변하면서, 그러니까 경험하는 것의 결이나 맥락이 바뀌면서 어린 왕자의 모습이 달리 느껴졌다. 보아뱀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 딱히 큰 감흥이 없었는데, 막내 우빈이가 태어나고 나서 받아들여지는 무게가 달랐다. 어른으로서 우빈이의 말이나 행동에 제약을 두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아이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에 화답할 줄 알아야 되겠더라고. 주인공이 지구로 돌아오기 전, 여러 별을 들렀다 오잖아. 수학자, 술주정뱅이, 가로등을 끄고 켜는 사람처럼 많은 사람들이 자기 경험에 빗대어 자신만의 언어로만 말하는데, 그걸 보니 각 별마다 사는 사람들이 쓰는 언어가 달라서 대화하기가 영 어렵지 않을까, 싶었어. 물론 나도 그렇겠지. 서로의 일부분으로 표현하고 평가 하니까.”

그래, 어쩌면 그대로 돌아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린 왕자》가 1943년 처음 세상으로 나온 뒤, 엄마, 아빠, 나는 어린 왕자와 함께 나이가 들었다. 나의 어린 왕자는, 파리의 어느 작은 골목 어귀에 있던 서점에서 얻은 것이다. 불어로 적혀져 무얼 말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기도 하다. 이건 어린 왕자만이 가진 특유의 힘이다. 우리는 한 권의 책으로 묶여있다. 그러니 이 연결고리는 자연스럽게 돌아오는 운명 같은 거다. 같은 공간에서 오랜 시간 살 맞대고 복닥거리며 살면서도, 사실 속내와 진심이 각자 다른, 동상이몽 속으로 어린 왕자가 돌아오는 것이다. 어떤 시절에 묻어 놓아 전혀 알지 못했던 당신의 속마음과 사정이 어린 왕자로 인해 전해지는 기이한 회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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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이자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