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is je t’aime 사랑해, 파리

사사로운 어느 날의 여행 기록

파리!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그곳, 어릴 때부터 내게 파리는 꿈의 도시였다. 여행 중에 만난 누군가 물었다. 꼬박 3주를 파리에만 머무는 이유가 뭐냐고. 나는 대답했다. 하루를 빠짐없이 돌아다녀도 매번 새로운 곳을 발견하는 사랑스러운 곳이기 때문이라고.

8월 5일
아멜리에Amelie처럼

혼자 여행을 다니면 남의 사진은 많아도 정작 내 사진은 몇 장 없다. 평소 사진 찍기를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젊은 시절의 모습을 남기고 싶은 마음에 종종 즉석 사진을 찍었다. 지하철역 안에 있는 네모난 증명 사진 부스에서 말이다. 그 시작은 영화 <아멜리에>에서 시작되었다. 주인공 아멜리에가 좋아하는 남자, 니노의 취미는 즉석 사진기 밑에 버려진 사진들을 모아 앨범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흥미로워 보이던지. 언젠가 파리에 가면 꼭 한번 해보리라 생각했었다.

그리고 오늘 나는 영화 속 아멜리에와 니노가 만난 파리 북역에 가서 증명사진을 찍었다. 증명사진기를 통해 내 모습을 보는 건 조금 민망하지만 재미난 경험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현대미술관 팔레 드 도쿄Palais de Tokyo에 있는 사진 부스가 훨씬 더 영화 속 사진과 흡사하게 나온다는 것. 그래서 60센트짜리 바게트로 점심을 해결면서도 3유로짜리 사진을 두 번이나 찍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참 비효율적인 소비였다.

8월 7일
나의 아지트,
몽소 공원Parc de Monceau

 

구름이 천천히 흘러가는 오후, 나는 몽소 공원에 있었다. 오래된 나무는 제 몸집보다 큰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는데 흔들리는 나뭇잎을 따라 그림자에도 바람이 불어왔다. 아이들은 나무를 타고 올라가보겠다고 그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잔디는 햇살을 머금은 바람에 파도처럼 넘실댔다. 깎아놓은 듯한 인위적인 정원보다 소박한 매력이 있는 곳. 내 키보다 긴 녹색 나무 벤치에 누워, 공항 벤치가 이 정도만 되어도 연착이나 노숙이 두렵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내일 와인과 치킨을 사서 다시 오기로 했다.

8월 10일
방브Vanves에서 보물찾기

 

파리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 중 하나는 방브 벼룩시장Marche aux Vanves이다. 이곳에 오면 오래된 것들이 가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오늘 내 눈길을 사로잡은 건 진한 녹색의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긴 사진들이었다. 한 장당 1.5유로라는 가격표를 힐끔 보았다. 오래된 사진은 유명한 사람이나 명소가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한 때를 보여주는 추억의 일부다. 한껏 차려 입고 찍은 가족들 사진, 물장구치며 환하게 웃는 아이들의 모습, 누군가의 묘비, 집에서 줄넘기를 하던 사람, 많은 하객들 앞에 서 있는 신랑 신부의 사진, 창가에서 엄마와 아기가 노는 사진, 누군가의 소중했던 인생의 한 컷들이 바구니 안에 무심하게 쌓여있었다.

8월 13일
우울할 때는 아이처럼

여행을 오래 하면 나만의 요령 같은 것이 생긴다. 기분이 우울할 때 아이들이 많은 곳에 가는 것처럼. 평소 아이들을 특별히 좋아했던 건 아니지만 순수하고 귀여운 아이들을 구경하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래서 오늘은 콩코드 광장Place de la Concorde 근처에 위치한 놀이 공원으로 향했다.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그전의 우울한 기분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개었다.

따끈한 추로스Churros 한 봉지를 사서 입에 물고는 아이들 구경에 나섰다. 물 위에 떠다니는 커다란 투명 공 안에 들어가 달리고 넘어지기를 반복하는 아이들을 보며 나도 마음껏 놀고 싶어졌다. 놀이 공원을 돌아다니다가 내가 참여할 수 있는 인형 뽑기를 시도했다. 결과는 순식간에 참패, 그래도 난생처음 도전한 인형 뽑기에 짜릿짜릿한 기분을 느꼈다.

8월 14일
파리로 출퇴근하는 여행

 

파리에 있는 동안 중심가에서 한참 떨어진 북쪽에 숙소를 얻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민박집이었는데 일단 가격이 저렴했고 주인아주머니의 손맛이 특별하다는 말에 고민도 하지 않았다. 막상 오고 나니 파리의 소매치기들이 모여 사는 어두운 지역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집에서 창밖을 바라보면 여기가 서울인지 파리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회색 건물이 밀집한 우리네 모습과 굉장히 흡사했다. 숙소의 청소 및 정리시간은 매일 12시부터 5시까지. 의무적으로 비워야 하는 이 시간 동안 나는 출근하다시피 파리 중심가로 향했다. 하루 6시간씩 규칙적으로 파리 여행을 하고 정해진 시간이 되면 한국의 어느 동네와 같은 곳에서 한국 사람들을 마주했다. 그야말로 파리로 출퇴근하는 묘한 기분이었다. 덕분에 파리에서만큼은 성실한 여행자로 살 수 있었고, 하루하루 파리의 새로운 매력을 발견할 수 있었다.

8월 16일
우연히, 뷔트 쇼몽 공원
Parc des Buttes Chaumont

 

 

숙소에서 와인파티를 한 다음 날, 조금 쉬어가기로 했다. 무작정 교통카드를 들고 나와 아무 버스에나 올라탔다. 한숨 자다가 눈을 떴을 때 문득 절벽 위에 정자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얼마 오지도 않았는데 전혀 새로운 교외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마차를 탄 기분이었다. 나는 서둘러 버스에서 내렸다. 그곳에는 커다란 공원이 하나 있었다. 공원 안에는 작은 호수와 폭포, 심지어 동굴도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왜 이제서야 알게 됐는지 안타깝기만 했다.

버스에서 본 정자는 공원의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저 멀리 몽마르트Montmartre 언덕과 그 위에 있는 새하얀 샤크레 쾨르 대성당Basilique du Sacré-Cœur이 보였다. 몽마르트가 파리에서 제일 높은 언덕이라는 말은 사실이었구나. 문득 공원 이름도 모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조깅하고 있는 파리 사람들에게 공원의 이름을 물었지만 아무리 귀 기울여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는 나중에서야 여기가 뷔트 쇼몽 공원이었다는 걸 알았다.

8월 18일
몽파르나스 묘지에서
Cimetiére du Montparnasse

몽파르나스 묘지에 왔다. 할아버지 산소를 찾은 이후 묘지는 처음이었다. ‘묘지’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에 조금은 으스스하고 무서울 것으로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밝은 느낌이었다. 문득 영화 <위크엔드 인 파리>가 떠올랐다. 결혼 30주년을 맞은 부부 닉과 멕이 신혼여행으로 갔었던 파리를 다시 여행하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린 내용이다. 남편 닉은 학교에서 퇴직 권고를 받고 아내에게 이 사실을 힘들게 고백한다. 아내 멕은 그런 남편을 데리고 서점에 가서 책 한 권을 건넨다. 그리고 이 묘지를 방문한다. 수많은 예술가들의 묘를 거닐다가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묘 앞에서 잠시 멈추는 두 사람.

“우리는 사랑을 말할 때 사랑을 의미하는가, 사랑하면서 미워하지 않는 건 불가능해. 특히 가까운 사람일수록!” 나는 그때의 장면을 회상하며 그의 무덤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어느덧 마음이 쌀쌀해졌다. 한때는 나처럼 열심히 살던 사람들이 이제는 여기 다 같은 곳에 잠들어있는 것이다. 그들이 부자였든 가난했든, 유명했든 무명이었든, 행복했든 불행했든 죽음 앞에서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묘지에서 내가 가진 고민들이 한없이 작아졌다. 더 내려놓고, 더 사랑해야지. 묘지 위에 쌓인 낙엽이 꼭 우리네 모습 같았다.

8월 21일
누군가의 결혼식

 

버스를 타고 지나가다가 거리에 드레스와 정장 차림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걸 보고 급하게 내렸다. 내가 내린 곳은 이탈리아 광장Place d’ italie역, 그곳에서는 이제 막 결혼식을 끝낸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양손 가득 한 움큼씩 꽃잎을 쥐고 있었다. 곧이어 아름다운 흑인 신부와 신랑이 나오자 사람들은 일제히 손에 있던 꽃잎을 뿌리기 시작했다. 말 한마디 해본 적 없고, 전혀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의 결혼을 축하하는 것이 이상해 보이겠지만 나는 그들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싶었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그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 밝고 환한 표정이었다.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우연이 주는 선물 같은 광경에 나는 내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8월 22일
라디오를 켜봐요

휴대폰이 없는 여행자는 노트북을 열고 늘 라디오를 켜놓았다. 비가 오는 밤, 파리는 밤 열한 시, 한국은 아침 여섯 시쯤 되는 시간이었다. 서울에서도 텔레비전 없이 지내던 나는 이 시간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며 라디오를 듣곤 했었다. 가끔 한국에 가고 싶거나 말할 사람이 없을 때 혼잣말처럼 라디오 실시간 게시판에 사연을 올리곤 했다. 오늘도 라디오에서 비가 많이 온다는 말을 듣고, 파리도 그러하다는 글을 남겼다. 잠시 후 목소리가 고운 디제이가 내 이름과 함께 짤막한 글을 읽어주었다. 아무도 없는 6인실 방을 싱글룸처럼 쓰고 있는 쓸쓸한 밤, 나는 웃고 있었다.

8월 25일
비 오는 날의 파리 동물원
Parc Zoologiaue de Paris

비는 며칠째 계속되었다. 파리에 있는 동안 맑고 화창한 날은 손에 꼽을 정도로 매일 비가 오거나 흐렸다. 나는 파리 동물원으로 향했다. 동물원은 파리 식물원Jardin des Plantes 내에 자리하고 있었다. 가족끼리 나들이를 왔다가 비가 많이 내려 투덜거리는 아버지의 모습도 보이고, 연인과 데이트를 하다가 치마가 날려 난감해하는 여자도 있었다. 우산을 쓴 사람이 몇몇 있을 뿐 동물원에는 사람보다 동물들이 훨씬 더 많았다. 제일 먼저 나를 반긴 것은 화려한 홍학들이었다. 초록 풀밭 위를 노니는 홍학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들을 제외하곤 비를 피하는 동물들이 대부분이었다. 구슬프게 철조망을 물어뜯는 새들도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너무 슬퍼 보였다. 나는 중고 카메라에 방수 기능이 있기만을 바라면서 빗속에서 끊임없이 셔터를 눌러댔다. 잠시 후, 긴 여행 동안 잘 버텨주었던 카메라는 고장이 나버렸다. 그 사이 비는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누군가 파리는 비가 내릴 때 가장 아름답다고 말했던가, 이날 내가 본 파리는 아름답기 전에 춥고 스산한 도시였다. 하지만 비 오는 날의 파리 동물원과 동물들의 모습은 잊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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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오혜진

글·그림·사진 김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