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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Our Table
내 인생의 구호는 대충 이런 것이다. ‘아침에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잠들기 전에 술 한 잔을 마실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완벽한 인생!’ 내 인생에서 커피와 술은 빼놓을 수가 없다. 커피와 술에 관한 영화를 고르다 보니 이 두 편이 생각났는데, 다시 보니 커피와 술보다 중요한 것이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에 흥미로운 소설책을 한 권 읽었다. 그 책에는 ‘사람 알레르기’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알레르기는 어떤 사물이나 상태가 아닌 특정한 사람들에 대한 알레르기를 뜻한다고 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계선을 마음대로 침범하는 사람들, 소위 ‘무례한’ 사람들이 이 알레르기의 유발자다. 책을 읽으면서 ‘맞아, 그런 사람들이 있지.’ 하고 생각하는 동시에 불안감이 들었다. 어떤 사람에게는 나 역시 사람 알레르기 유발자가 아닐까? 나야말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계선을 마구 침범해왔던 건 아닐까? 이런 내가 어떻게 나만은 무례한 인간이 아닐 거라 확신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나야말로 무례하고 오만하며 개념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에게 그렇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어떤 사람에게는 그럴 소지가 다분하다. 그런 내가 남들의 무례함에 분개하는 것은 좀 어이없지 않나 싶다. 사람들이 품고 있는 고민의 대부분은 관계와 관련된 것들이다. 우리는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다수의, 그리고 다양한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잘 풀리지 않는 인간관계에 대한 해법은 딱히 개발된 것이 없다. 방법이라고 해봤자 대개 두 가지로 수렴된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나한테도 내 맘 같지 않은 타인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렇다 할 해법은 없다. 그저 ‘이 세상에 내 맘 같은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는 마인드로 살아가는 정도가 적당한 타협안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앤젤스 셰어:천사를 위한 위스키>(2012)는 위스키에 관한 영화다. 동시에 켄 로치의 영화이기에, 이 영화는 ‘우리 사회의 골칫덩어리들과 어떤 식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것은 결국 인간은 인간에게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되는 대로 살아가는 동네의 사고뭉치 청년 로비는 폭력 사건에 연루돼 재판을 받게 된다. 마침 여자친구는 그들의 아이를 출산하고, 갓 태어난 아이를 본 순간 로비는 더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로비는 법원의 명령으로 사회봉사를 하러 갔다가 교육관인 중년의 남자 해리를 만나는데, 그때부터 그의 인생은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기 시작한다.
사람이 예전처럼 살지 않겠다고, 새 인생을 살겠다고 결심하는 것까지는 크게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인생을 바꿔보겠다고 말하던 사람들이 실제로 변하는 모습은 별로 보지 못했다. 사람이 정말로 변할 때, 변화의 방아쇠가 되는 것은 개인적인 의지보다는 타인과의 관계다. 어떤 사람을 만났느냐에 따라서, 그 관계에서 어떤 역할을 했느냐에 따라서 사람은 비로소 달라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해리는 로비를 집으로 불러 자신이 좋아하는 몰트위스키Malt Whiskey를 대접한다. 로비는 자신에게 위스키의 향과 맛을 감별하는 예민한 감각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된다. 그래서 이야기는 켄 로치의 영화가 대개 그러하듯 동화처럼 단순하고 담백한 드라마로 흘러가는데, 나는 솔직히 로비의 재능보다는 해리의 재능에 더 관심이 갔다.로비를 다른 세계로 인도한 사람은 해리다. 해리의 재능은 단순하다. 그는 로비를 사고뭉치, 교정 대상이 아니라 그저 딱한 젊은 친구로 받아들인다. 해리의 집은 쾌적하고, 로비는 부딪치고 넘어지고 여기저기 뚫린 구멍을 피하거나 막아보려 발버둥을 치거나 달아나는 삶이 아닌 삶, 제 일을 열심히 하고, 집에 돌아와서 아무도 알지 못하는 아름다운 취향을 즐기며 살아가는 단순하고 평화로운 삶을 처음으로 맞닥뜨리게 된다.
해리는 똑바로 살라며 로비의 목덜미를 붙잡고 흔들지 않는다. 이 우아한 남자는 그저 보여주기만 한다. 좋아하는 것을 즐기면서 살아가는 소박한 삶을. 해리가 한 것이 교육이라면, 그것은 우아함의 교육이다. 어떤 이의 우아함은 자연스럽게 주변으로 퍼져 나가서 그 파장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러운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짐 자무시의 <커피와 담배>(2003) 속 11개 흑백 단편 영화는 모두 커피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대화들을 담고 있다. 주인공들은 오직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태우며 대화를 나눈다. 그들이 마시는 커피는 대개 맛이 없고, 음악은 별로이며, 카페는 시끄럽고, 웨이터는 이상한 사람들이다. 심지어 그들과 마주 앉아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사람들인 것 같기도 하다.사람들은 서로를 좋아하지 않거나 경계하거나 불신한다. 대화는 자꾸만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고, 누구도 진정한 속마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너무 급하게 다가오고, 어떤 사람은 상대를 철저하게 밀어낸다. 때로는 함께 앉아 있는 사람들을 피해 달아나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이 모든 엇갈리는 대화들은 바닥을 드러낸 커피 잔, 공기 중으로 흩어진 담배 연기처럼 다음 순간에는 사라져 버릴 것들이다. 11개 단편들 중 내가 꼽은 백미는 마지막 작품인 <샴페인>이다. 도시의 건물 뒤편, 어두운 공간에서 종이컵에 든 커피 두 잔을 사이에 두고 작업복을 입은 두 노인이 이야기를 나눈다. 그들은 늙어서도 몸 쓰는 일을 해야 하는 노동자들이다. 무척 지쳐 보이는데 특히 한 노인은 상태가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이 삭막한 공간에서 천상에서 울려 퍼지는 것 같은 말러의 노래를 듣는다. 노래는 환청이다. 두 노인은 이제 이 맛없는 싸구려 커피를 샴페인이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상류층 사람들처럼 분위기를 좀 내보기로, 삶의 기쁨을 누려보기로 한 것이다. 종이컵을 들어 건배를 나누며 마신 커피는 신이 내린 샴페인처럼 아주 맛있고 훌륭한 것이 된다. 10분밖에 없는 휴식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한 노인이 잠든다. 영원히 깨지 않을 것처럼 깊고 달콤하게. 그들의 고단한 삶에 짧고 아름다운 평화가 내려앉는다.
우리는 타인이 있기에 살아간다. 그들은 우리의 외로움을 달래주고, 우리를 도와주며, 우리에게 좋은 기운을 불어넣어 주고, 우리를 달라지게 한다. 위스키 마시는 법을 알려주는 사회봉사 교육관 해리처럼 타인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으면서 자기 삶의 좋은 것들을 나누려 하는 좋은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타인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두려움과 상처와 고통을 같은 강도로 느낄 수 없을 것이고, 그들을 실망시키고, 그들한테 실망하며, 서로를 화나게 만들 것이다. 자주 선을 침범할 것이고, 차라리 없는 게 나은 존재가 되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영원히 상대의 진심에 가닿을 수 없을 것이다. 술과 커피와 담배로도 그것은 어렵다.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채 자신의 궤도를 도는 두 개의 행성들. 그것이 바로 우리다. 아니, 어쩌면 술과 커피와 담배가 우리들 사이의 완충재가 되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한, 서로가 부딪쳐 깨지고 마모되는 것을 막아줄 완충재. 우리에게 술과 커피와 테이블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앤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2012)
켄 로치 | 코미디, 드라마
천사에게 나눠진 위스키. 위스키를 훔치려는 로비는 천사까진 아니더라도 나름 귀여운 루저의 모습을 하고 있다. 우연히 발견한 로비의 천부적 재능이 앤젤이 부리는 마법 같은, 일상 속 변화를 일으킨다.
<커피와 담배>(2003)
짐 자무시 | 드라마
영화는 커피와 담배가 우리의 인생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다시금 일깨워 준다. 비록 테이블 사이로 따뜻한 대화만이 오가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들이 무심코 마신 커피와 순간 들이마신 담배 연기는 어떤 모양으로든 반드시 우리 곁을 스치고 지난다.
글 한수희
일러스트 김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