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P, Q 그리고 R의 단어

표현

[표현] 생각이나 느낌 따위를 언어나 몸짓 따위의 형상으로 드러내어 나타냄.

책방의 일요일은 중학생이 채우는 날. 14살부터 16살의 친구들이 옹기종기 모여 함께 글을 읽고 쓴다. 하지만 이번 주에는 “책방에 못 갈 것 같다”는 문자를 여러 통 받았다. 다음 월요일이 임시 공휴일이라서 다들 여름 휴가를 떠난다고 했다. 쉼 없이 퍼붓던 장마는 끝났지만, 여전히 어두운 하늘빛을 품은 한 주의 끝이었다. 산과 물을 보러 간 몇 명은 자리를 비웠고 책방을 찾은 O, P, Q 그리고 R만 둥글게 둘러앉았다.

늘 오던 친구들이 보이지 않자 나머지 넷도 슬금슬금 꾀를 부리기 시작했다. 완성하기로 약속한 글은 두 편인데, 한 편만 쓰고 놀자는 말도 나왔다. 붕 뜬 마음을 너무 잘 아니까, 한 편의 글을 완성하고 나면 떡볶이를 먹자고 제안했다. O는 이게 무슨 일이냐며 놀란 표정을 지었고, P와 Q는 내가 떡볶이를 주문하는 걸 보고는 그때부터 신나게 떠들기 시작했는데. R만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 글쓰기에 열중했다. 간식이 도착하자마자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노트를 덮고 필통을 정리했다.

나: 방금 학교에 대한 글을 완성했잖아. 올해 달라진 학교생활은 어때?

O: 진짜 재미없어요. 코로나 때문에 매일 동영상 강의만 들어야 하니까.

P: 엄마가 동영상 틀어 두고 딴짓만 한다고 핸드폰도 숨겨버렸어요.

Q: 1학기 수업을 제대로 못 해서, 선생님이나 친구들이랑 친해질 기회도 없었고.

P: 맞아, 완전 재미없지? 그리고 집중이 하나도 안 돼요.

R은 친구들이 소란을 피울 때면 엷게 웃거나, 시종일관 진지하게 자신의 할 일을 하는 아이다. 그래도 오늘의 과업은 끝이 났으니, R도 오랜만에 마음 편히 친구들의 수다를 들으며 활짝 웃었다. 나는 R이 어떻게 학교생활을 하는지 잘 알 것 같았다. 굳이 묻지 않아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은 이유는 그가 열다섯의 나와 비슷한 표정을 짓기 때문이다. 나는 적극적으로 선생님께 다가가지 않는 대신, 성과를 내보이는 데에 집중하는 타입이었다. 말수가 없는 아이들이 어른의 눈 안에 들기 위해선 무어라도 잘해야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R에게 요즘 가장 큰 고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역시나 그는 생각과 마음을 전달하는 게 어렵다고 말했다. 주변 친구들이 발표하는 걸 들으면 자꾸만 작아진다고. 또렷하고 확신에 찬 발음과 음성으로, 막힘없이 술술 말을 늘어놓는 친구들은 어찌나 똑똑해 보이는지. 한편으로는 저 아이보다 내가 더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 땐 답답하다고 했다. 게다가 표현을 잘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어떤 불이익마저 감수해야 하므로 그는 불안하기도 하다.

R: 저는 항상 불리해요. 선생님이랑 친한 애들은 수행평가 점수를 높게 받거든요.

O: 그래서 나는 좋아하는 선생님이 맡은 과목만 성적이 높아.

나: O는 교실에서 표현을 잘하는 타입이니?

O: 네. 저는 솔직하게 다 표현해요. 너무 말이 많다고 해야 하나?

P: 저도 하고 싶은 말 다 해요. 그래서 교장 선생님도 가끔 저를 따로 부르세요.

Q: 와, 신기해. 교장 선생님까지 널 알아?

R은 제 나름의 노력을 한다고 조용히 말했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만든 후에 선생님의 관심을 끄는 것이 그가 택한 방법이다. 나머지 세 아이가 자기 이야기를 얼마나 잘하는지 신나게 자랑하는 동안 R의 표정은 조금 더 어두워졌다. 마음과 생각이 말로 잘 이어지지 않는 게 고민이라고 했지만, 사실 R이 괴로운 이유는 어른들로부터 관심과 인정의 표현을 충분히 받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지.

그렇다면 정작 ‘표현’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건 어른들이다. R은 나를 고민하게 한다. 나는 일요일마다 무거운 책과 노트를 챙겨 책방에 오는 아이들에게 어떤 표정과 몸짓을 보여주었나. 어느 날 울적해 보였던 아이에게 따뜻한 말을 건넸었나. 자신 없는 순간들만 머리를 스친다.

그러다가 한 어른의 애정 폭격을 떠올리고 만다. 이슬아 작가의 《심신단련》에는 손녀와 할머니의 통화 내용이 나온다. 멈출 줄 모르는 사랑의 표현이 손녀에게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좋은 건 배우라고 했으니까. 나도 할머니처럼 아이들에게 너희 참 장하고 대견하고, 훌륭하다고 말해볼까? 갑자기 간지럽게 변한 나를 보며 아마도 그 아이들은 온몸을 배배 꼬거나, 얼굴을 찌푸리며 손사래를 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쩌다 보니 ‘선생님’ 소리를 듣고 사는 일요일만큼은 관심을 두고 표현해야 하는 쪽이 나라는 걸 잊지 말아야지. 책방에 오는 아이들의 얼굴을 마음 속에 하나씩 그려본다. 특히 있는 듯 없는 듯 유달리 조용한 친구들이 그동안 어떤 말을 하고 무슨 글을 썼는지 한참 더듬어보았다. 이상하게도 유쾌한 웃음이 피어오르거나 마음이 찡해져서, 나는 목소리 작은 그 애들이 더 좋아지고 말았다.

“할머니. 일 다니는 건 안 힘드세요?”
“이? 뭐가 힘들어~ 일 댕깅께 좋아~ 놀믄 뭐햐~”
“고생스러우실까 봐 걱정이 돼요.”
“워메~ 그런 말 하덜덜 말어~ 우리 손주들이 아플까봐 걱정여~ 우래기 참말로 사랑햐~ 대견햐~ 훌륭햐~”
“할머니! 저도 사랑해요~”
“그랴~ 사랑하구 대견하구 훌륭햐!”
“할머니~ 알겠어요!”
“그류~ 이 할미가 너무너무 사랑햐~~”
“네 할머니…! 끊을게요…!”
“그랴 그랴~ 사랑하는 우래기~~ 장햐~ 사랑햐~”
“네!”
“사랑햐~ 우래기들 참말루 사랑하구 대견스럽구 훌륭하구 사랑…”
“할머니~ 이제 끊을게요~”
“그랴~ 사랑햐~ 참말루~ 사랑…”
전화를 끊고 나서도 사랑이라는 말이 귓가에 위잉위잉 맴돌았다. 내가 먼저 끊지 않았다면 존자 씨는 몇 번이나 더 사랑을 이야기했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하려 했던 말의 반의반도 못했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 이슬아 《심신단련》 중

We Around Project
<한밤의 구석진 고민 의자>

 

권투 선수가 링 위에서 싸우다 잠시 쉬어가는 구석의 의자 ‘코너스툴(Corner stool)’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책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단어’로 된 고민을 가진 손님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떠오르는 ‘문장’이 있습니다. 그것을 다시 읽고 쓰며 작은 의자에 머물다 간 그들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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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김성은 크리에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