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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것은 언젠가 낡고, 낡은 것도 언젠가는 새것이었다
베를린의 한 도자기가게에 들어갔다. 커피잔이 진열된 서랍장의 손잡이가 아름다워 만지작거리는데 주인 할머니가 다가왔다. “그건 약을 넣던 서랍이에요. 여긴 100년 넘게 약국이었죠.” 원피스를 단정하게 입고 새하얀 머리를 곱게 묶은 여자였다. 그녀는 약국이 도자기가게가 되기까지의 역사를 소개하다 종종 동네나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지나간 일의 모든 사연을 다 듣고 살 순 없지만, 어떤 이야기는 자연스레 귀를 기울이게 된다. 할머니는 젊은이가 들으면 좋아할 이야기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얘길 할 때의 속도, 몸짓, 우아함도 몸으로 기억하고 있는 분이었다. 할머니는 알고 있을까? 자신의 가게와 그녀 자신이 닮아있다는 걸. 베를린에 머무르며 그녀를 닮은 공간을 몇 군데 더 찾아가봤다.
공항이 공원으로
템펠호프공원 Tempelhofer Park
A. Tempelhofer Damm, 12099 Berlin
H. thf-berlin.de
T. +49 30 7009060
O. 운영시간은 매월 다름(홈페이지에서 확인 가능)
2008년에 문을 닫은 템펠호프 공항은 2010년부터 공원으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프로젝트를 맡았던 담당자는 인터뷰에서 “어떤 도시도 이렇게 귀한 땅을 공공 공간으로 두지는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공항으로 쓰였던 부지는 넓었다. 욕심을 부리자면 얼마든지 다른 것으로 채울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들은 공원처럼 보이기 위한 공사나 재건축을 최소화하고 공항의 모습을 그대로 두었다. 덕분에 이 공원을 찾는 사람들은 활주로 위를 맨발로 달리는 즐거움을 누린다.
기차역이 미술관으로
함부르거반호프 Hamburger Bahnhof
A. Invalidenstraße 50-51, 10557 Berlin
H. Smb.museum/hbf
T. +49 30 39 78 34 11
O. 화~일요일 10:00~18:00, 목요일 10:00~20:00
함부르거반호프는 기차역이었다. 1846년에 완공했으나 기차는 1884년 운행을 중단했다. 이후 교통건축박물관으로 사용했는데 그마저도 세계대전으로 파괴되었다. 지금의 현대미술관은 1996년 건물 일부를 복원해 만든 것이다. 이 건물에 들어서면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기차역의 ‘어제’를 확인할 수 있다. 기차역이었음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고 그 모습은 역사를 기억하게 해준다. 하지만 전시장에 들어서면 현대예술의 ‘지금’이 느껴지기에 나올 때는 어쩐지 묘한 기분이 되어버린다.
화장실이 햄버거 가게로
버거마이스터 Burgermeister
A. Oberbaumstraße 8, 10997 Berlin
H. burger-meister.de
T. +49 30 23 88 38 40
O. 월~토요일 11:00~03:00, 일요일 12:00~03:00
버거마이스터는 ‘버거의 장인’이란 뜻이다. 이름과 걸맞게 햄버거를 먹으려면 긴 줄을 기다려야만 한다. 차례를 기다리다 보면 가게 위쪽에서 ‘männer(남자)’라는 푯말을 볼 수 있다. 어떤 표시일까 고민하게 되는데 사실 햄버거와는 연관이 없다. 그것은 오래전에 이곳이 화장실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증표다. 수로를 가진 공간이 이곳뿐이라 어쩔 수 없이 화장실을 개조해서 만들었다고. 그 사실을 알면 잠시 머뭇거리게 되지만,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물면 화장실은 금방 잊게 된다.
비밀클럽이 카페로
카페 아인슈타인 Café Einstein
A. Kurfürstenstraße 58, 10785 Berlin
H. Cafeeinstein.com
T. +49 30 26 39 190
O. 월~일요일 08:00~24:00
카페 아인슈타인이 있는 건물은 1878년에 한 재봉틀 공장의 사장이 지었다. 그는 유대인 은행가 부부에게 건물을 팔았고, 부부는 이곳을 비밀 클럽으로 만들었다. 정권이 바뀌며 그들은 나라에 건물을 빼앗겼고 그 후로도 몇 번씩 건물주가 바뀌었다. 그중에는 애인으로부터 이 건물을 선물 받은 독일의 여배우도 있었다. 많은 사람이 소란스럽게 이곳을 오갈 때, 건물은 말없이 자리를 지켰다. 1978년부터 지금까지는 사람들이 차와 음식을 나누는 카페인데, 내일은 어떻게 될까?
우체국이 사진갤러리로
체오 베를린 C/O Berlin
A. Hardenbergtraße 22-24, 10623 Berlin
H. Co-berlin.org
T. +49 30 284 44 16-62
O. 월~일요일 11:00~20:00
‘C/O’는 우편물을 부칠 때 쓰는 단어다. 다른 사람 집에 머무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보내려면 집주인 이름 앞에 ‘C/O(care of)’라고 적어야 한다. 누군가를 ‘돌보고 있다’는 뜻이다. 이 갤러리는 우체국 건물에서 시작했다. 창립자는 우체국과 역사를 함께하고 싶어 사진을 ‘돌보고 있다’는 의미로 ‘C/O 베를린’이란 이름을 지었다. 지금은 몇 번의 이사를 한 후라 우체국 건물을 쓰고 있진 않지만, 자신들의 이름을 통해 초심을 잊지 않고 사진작가들의 사진을 돌보고 있다.
약국이 세라믹 스튜디오로
쿤케라미크 KühnKeramik
A. Yorckstraße 18, 10965 Berlin1
H. Kuehn-keramik.com
T. +49 30 28 38 46 95
O. 수~금요일 12:00~19:00, 토요일 11:00~16:00
다양한 디자인의 도자기가 가득한 세라믹 스튜디오 쿤케라미크. 도자기가 놓여있는 진열대를 자세히 보면 손잡이에서 약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이곳이 1890년부터 2009년까지 약국이었기에 그렇다. 100년이 넘도록 약을 담고 있던 가구들이 이제는 도자기를 진열하는 데 쓰이고 있다. 쿤케라미크의 도자기 제품은 펑크록과 바로크 예술을 접목한 스타일로 잘 알려져 있다. 공간이 주는 묵직한 매력이 제품을 더욱 돋보이게 해준다.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에어로빅을 끝낸 여자들이 샤워를 하고 있다. 젊은 여자 셋이 결혼생활에 대한 얘기를 한다. “십 년 후엔 어떻게 될까? 정말 모르겠어. 가끔은 그냥 새로운 것만 찾게 돼. 새것 좋잖아? 반짝반짝한 것들.” 옆에서 조용히 씻고 있던 할머니가 웃으며 말한다. “새것도 결국 낡지.” 그 후로 젊은 여자들은 말이 없고, 옆에 있던 노인들은 웃으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젊은 여자들은 막막한 표정으로 나이든 여자들을 바라본다. 주름진 얼굴과 늘어진 살로 햇빛이 비친다. 소녀의 빛나는 아름다움과 할머니의 농익은 우아함을 비교하는 일이 의미가 있을까? 다만, 할머니를 닮고 싶어 그녀의 옷을 물려받은 소녀의 마음을 어여삐 여겨줄 순 있을 것 같다. 누군가는 할머니의 옷을 버리기도 하니까. 새로운 것은 언젠가 낡고, 낡은 것도 언젠가는 새것이었다.
에디터·포토그래퍼 박선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