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 Book]

엄마의 옷장

우리 엄마는 멋쟁이다. 엄마의 옷장은 늘 온갖 옷들로 빽빽하고, 거울 옆 벽에는 패션 잡지에서 오린 사진들이 잔뜩 붙어 있다. 내 옷장은 엄마의 옷장의 삼분의 일 규모도 되지 않는다. 그리고 내 딸에게는 아예 옷장이라는 게 없다.

내 패션의 역사는 엄마의 옷장에서 시작되었다. 어릴 때 나는 엄마가 외출할 때마다 몰래 엄마 옷장에 있는 옷들을 다 꺼내 입어보고 화장품도 꺼내 발라보곤 했다. 갓 스물에 나를 낳은 엄마는 멋 부리기를 좋아해서 옷장 안이 늘 옷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건 직접 옷을 지어 입던 외할머니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젊은 시절 동네에서 소문난 멋쟁이였던 외할머니가 엄마는 자랑스러웠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우리 엄마가 자랑스럽지 않았다. 사실 나에게 엄마는 미스터리한 존재였다.

엄마와 나의 싸움은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옷이 가장 큰 문제였다. 신체의 한계라도 시험하듯 뛰고 구르고 뛰어내리기를 반복하던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넘어져 무릎에 상처가 가실 일이 없었다. 내가 그런 아이라는 걸 알면서도 엄마는 나를 바꿀 수 있다고, 저 애를 뜯어고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엄마는 내게 굳이 하얀 원피스와 하얀 스타킹, 구두까지 신겨서 내보냈다가, 역시나 문지방을 넘자마자 넘어져 우는 소리를 듣고 달려와서는 넌 대체 왜 그 모양이냐, 너 때문에 못 살겠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사춘기가 되면서부터 본격적인 반항이 시작됐다. 나는 엄마가 사 온 옷이라면 보지도 않고 퇴짜를 놓았다. 왜 동의도 구하지 않고 함부로 옷을 사 오느냐며 있는 대로 신경질을 부렸다. 엄마는 “지독한 년, 내가 다시는 네 옷을 사 오나 봐라!” 이를 갈고 나서도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린 듯 또 옷을 사 와서 내 성질을 돋웠다. 우리 둘의 역사는 누가 내 삶(딸의 삶)의 주도권을 쥐느냐의 역사였다. 지배하려는 자와 독립하려는 자의 끝나지 않는 싸움이었다. 싸움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것은 내가 스무 살이 되어 집을 나가, 우리 사이에 물리적인 거리가 생기면서부터였다.

우리 모녀는 옷 취향이 비슷하고 엄마도 나도 옷을 차려입는 건 좋아하지만 쇼핑은 못 견딘다. 항상 비슷비슷한 옷들이 걸린 옷장에서 가장 가까이에 걸린 옷을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대충 입는다. 그러다 지금처럼 여성복 매장 앞에 서 있으면 이 세상에는 옷을 정성껏 차려입는 여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를 수가 없고, 우리 둘 다 어떤 면에서 자질 미달이라는 것을, 늘 하던 대로 살다가 우리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만다. 우린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게 자기만의 세상에서 고립된 채 살아온 사람들, 평생 서로의 생활 반경에서 벗어나지 못해 닮아버린 두 여자다.

— 비비언 고닉, 《사나운 애착》 중에서

비비언 고닉의 에세이 《사나운 애착》을 오랫동안 찔끔찔끔 읽었다. 오랫동안 과부로 살아온 엄마와 이혼녀가 된 딸은 종종 만나서 뉴욕 거리를 함께 걷는다. 다른 듯 똑같은 모녀의 산책은 다정함이나 친밀함 같은 단어들과는 거리가 멀다. 엄마는 딸이 자기를 미워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고, 딸은 그런 엄마 때문에 돌아버릴 지경이다.

이제 60대 중반을 넘어 70대가 다 되어가는 170센티미터의 우리 엄마는 예전에도 그랬지만 요즘도 내 언니 정도로 보인다. 엄마는 어쩐지 날이 갈수록 더 멋쟁이가 되어간다. 나는 멋 부리는 엄마가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다. 어느 날 갑자기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학교를 그만두고 가장이 되어야 했던 엄마. 그게 너무 힘들어 도망치듯 아빠에게로 온 엄마. 나는 그런 엄마가 평생 답답했다. 엄마는 왜 (아빠처럼) 검정고시를 보지 않았을까? 엄마는 왜 (아빠처럼) 방송통신대학에라도 가지 않았을까? 엄마는 왜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을 두려워할까? 엄마는 왜 멋 부리는 것 말고는 관심이 없을까? 엄마는 왜? 타인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지나칠 정도로 많이 던지는 나의 근본에는, 어쩌면 나의 영원한 미스터리, 엄마에 대한 ‘왜?’가 있을 것이다.

나는 엄마로 뒤덮여 있었다. 엄마는 어디에나 있다. 내 위아래에 있고 내 바깥에 있고 나를 뒤집어봐도 있다. 엄마의 영향력은 마치 피부조직의 막처럼 내 콧구멍에, 내 눈꺼풀에, 내 입술에 들러붙어 있다. 숨을 쉴 때마다 엄마를 내 안에 들였다. 나는 엄마라는 마취제를 들이마시고 취했고 풍요로우면서도 밀실처럼 사람을 숨 막히게 하는 엄마의 존재감, 엄마라는 실체, 숨통을 틀어쥐는 고통받는 여성성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 《사나운 애착》 중에서

지난해 가장 즐겁게 본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2021)의 주인공은 중국에서 온 이민 여성 에블린이다. 다정하지만 무능한 남편 웨이먼드와 세탁소를 꾸리는 에블린은 일하랴 가족을 건사하랴 미소 지을 여유조차 없다. 가뜩이나 세무 조사 때문에 골치가 아픈 데다 몸이 불편한 아버지까지 돌봐야 하고 남편은 이혼 서류를 들이미는데 딸 조이가 레즈비언이라며 커밍아웃을 하자, 에블린은 거의 혼이 나갈 지경이다.

헤어날 수 없는 중년 여성의 위기에 처한 에블린 앞에 느닷없이 다른 우주에서 온 다른 버전의 웨이먼드가 나타난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웨이먼드가 아닌, 액션 배우처럼 날렵하고 명민한 웨이먼드다. 어안이 벙벙한 에블린에게 그는 이 우주는 사실 무수히 많은 평행우주 중의 하나에 불과하며, 지금껏 에블린이 살아오면서 내린 작은 결정들이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수많은 갈림길이 생겼다고 설명한다. 그리하여 다른 우주에서의 에블린은 생활에 찌든 지금의 에블린과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 액션 배우가 된 에블린, 가수가 된 에블린, 요리사가 된 에블린, 소시지 손가락을 가진 레즈비언이 된 에블린, 피자 가게 광고판을 앞뒤로 매달고 거리에 선 에블린.

그리고 조부 투파키라는, 딸 조이의 모습을 한 괴물이 모든 우주의 에블린을 하나씩 없애고 다닌다. 조이가 이렇게 변한 것은 알파버스의 에블린이 딸의 능력을 한계까지 몰아붙였기 때문이다. 이제 에블린은 자신이 망친 딸을 구해야 한다. 허무에 빠진 딸이 베이글 모양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걸 막기 위해 모든 우주를 통틀어 가장 실패한 이 우주의 에블린이 딸을 구해야 한다. 그런데 그에게 과연 그럴 만한 당위가 있을까? 딸에게 이 인생이 허무하지 않다는 사실을 설득할 수 있을까? 이 에블린이?

황당하고 산만하며 유쾌한 이 멀티버스 코미디를 보며 많은 중년 여성들이 나처럼 눈물을 찔끔거렸으리라. 어느 순간 내가 낳아서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손을 잡고 다니며 키웠던 그 아이가 맞나 싶은 다 큰 딸이 우리 집 한구석을 어둠의 기운으로 물들이고 있다. 가끔 거실이나 부엌에서 그 애와 마주칠 때마다 흠칫 놀라곤 한다. 저 애는 대체 누구지? 내 인생에 끼어든 저 커다란 사람은? 문제는 저 애를 만든 이가 바로 나라는 사실이다.

아주 오래전 유치원에 다니던 딸이 내게 생일 카드를 그려준 적이 있다. 그림 속에는 여왕처럼 차려입은 내가 가운데에 서 있었다. 딸은 나에게서 조금 떨어져 수수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공주가 아니라 하녀처럼. 막 한글을 배운 딸은 삐뚤빼뚤한 글씨로 그림 위에 이렇게 썼다. “엄마 사랑해요. 내가 커서 엄마처럼 될 거예요.” 나는 당황했다. 왜 나를 여왕처럼 그렸을까? 자신이 아니라 나를? 나처럼 되고 싶다고? 진심일까?

나는 엄마 같은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딸을 낳은 후 가장 집착했던 일은 엄마 같은 엄마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완벽한 엄마가 되고 싶었다. 우리 엄마처럼 자기 멋대로 딸을 꾸미려는 엄마가 아니라. 그러나 그건 쉽지 않았고, 나는 자주 절망했다. 결국 내 아이는 그 시절의 나처럼 우울한 얼굴의 무기력한 소녀가 되어버렸다.

사람은 그냥 아빠가 되고 그냥 엄마가 되지 않는다. 자신의 모든 문제를 안고 아빠가 되고 엄마가 된다. 절망한 나에게 친구가 말했다. “그냥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너를 엄마로 만난 것도 그 애들 운이니까.” 

한참 서로를 꼬챙이로 찔러대다가 엄마가 이렇게 말할 때도 있다. “이게 네 복이다. 너도 더 좋은 엄마 밑에서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세상천지 하나밖에 없는 엄마가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오랜만에 맞는 말 하셨네.” 우리는 동시에 웃기 시작한다. 누가 됐든 우리 둘 다 악의적인 말은 피차 한 문자 이상 내뱉지 않기로 약속이라도 한 것 같다. 내 생각엔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상대에게 무엇을 원하는지에 골몰하는 대신 더도 덜도 말고 딱 1분이라도 그저 이 세상에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게 됐을 정도로 그 긴긴 세월을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우리 두 사람 다 감격하는 듯하다.

— 《사나운 애착》 중에서

엄마와 나는 더 이상 싸우지 않는다. 이제 내 인생의 주도권은 완전히 나에게 있다. 엄마가 내 인생에서 물러나자 나도 엄마를 더는 미워하지 않게 됐다. 엄마도 나처럼 자신의 문제를 안고 엄마가 되었을 뿐이다. 지금 우리는 비비언 고닉이 쓴 것처럼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상대에게 무엇을 원하는지에 골몰하는 대신 더도 덜도 말고 딱 일 분이라도 그저 이 세상에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게 됐을 정도로 그 긴긴 세월을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감격하고 있다.

10대 후반에 접어든 딸이 어느 날 나에게 물었다. “엄마, 나한텐 어떤 스타일이 어울릴까?” 나는 그 질문이 신기하고 반가웠다. 딸은 나에게 질문을 많이 하지 않는다. 그 애한테는 비밀이 많다. 조용히 관찰하고 아무도 모르게 판단을 내린 후 내색하지 않는 타입이다. 나와는 완전히 다르다. 그 애의 외할머니와 내가 다른 것처럼.

나는 딸에게 어떤 스타일이 어울릴지 고민해 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고민은 딸의 몫으로 남겨두기로 한다. 대신 가벼운 조언 정도는 해준다. “일단 옷가게에 한번 가봐. 그리고 이 옷 저 옷 입어봐. 그러면서 네 스타일을 찾아 나가는 거야.” 이 세 마디가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그럼에도 우리는 뉴욕의 온갖 거리를 걷고 걷고 또 걷는다. 엄마와 나는 둘 다 로어맨해튼에, 서로 1.5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걸어서 오갈 수 있는 거리에 산다. 엄마는 뼛속 깊이 도시 여자이고 나는 그 엄마의 딸이다. 우리에게 도시는 고갈되지 않는 천연자원과도 같다. 우리는 버스 운전기사, 여자 노숙인, 검표원, 거리의 광인 들에게서 매일의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며 산다. 걷기는 우리 안에서 가장 좋은 것을 끌어낸다. 나는 마흔다섯, 엄마는 일흔일곱이다. 엄마는 아직 건강하고 기운이 팔팔하다. 맨해튼이라는 섬의 끝에서 끝까지 사순의 딸과 너끈히 횡단할 수 있다. 산책을 하며 서로에게 다시금 애정을 느끼기는커녕 서로 할퀴고 물어뜯기 일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도시 어딘가를 항상 같이 걷고 있다.

— 《사나운 애착》 중에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에블린은 결국 딸을 구하는 데 성공한다. 조부 투파키가 허무의 베이글 속으로 몸을 던지지 않게 막아낸다. 에블린이 끝내 찾아낸 비장의 무기는 바로 이것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함께 있어주는 것. 함께 있어주겠다는 다짐. 가장 쉬워 보이지만 가장 어려운 일. 엄마가 딸에게, 부모가 자식에게, 인간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것.

“이 모든 것들이 무의미하다 해도, 어디에서 무엇이든 될 수 있다 해도, 난 너와 함께 있고 싶어.”

Book—《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 글항아리

Movie—다니엘 콴, 다니엘 쉐이너트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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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한수희

일러스트 규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