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terpiece Story

화가, 패션을 기록하다

화가, 패션을 기록하다
제임스 티소 그리고 소니아 들로네

소니아 들로네, fashion-illustration, 작품 출처 wikiart.org

“인생이 재미있어지는 방법은 매일 자신이 입는 옷에 조금 더 신경을 써보는 거예요. 비싼 옷을 입으라는 게 아니라, 조금 더 섬세하게 나와 어울리는 멋을 부려보라는 거죠.”

내가 아는 옷에 관한 명언 중 가장 쉽고도 인상 깊은 명언은 이것이다. 아마도 가수 유희열이 삶이 무료하고 재미없다는 한 젊은 청년에게 건넨 위로를 방송에서 본 것 같다. 그날 이후 이 조언이 오랜 시간 동안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옷장 문을 열 때마다 ‘아! 오늘도 재미있어지려면 옷을 더 잘 입어봐야겠다.’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잘 그린 그림 한 점은 시대를 담는다.’라는 말을 맹신한다. 우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를 보며 그 시대 부유한 상인의 소망을 읽을 수 있고, 그 시대의 화가와 후원자의 관계를 예측할 수 있으며, 그 시대 상황의 스타일, 의복, 생산된 재료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과거의 그림은 본다는 표현보다 읽는다는 표현이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어떤 화가들은 마치 패션 디자이너처럼 그 시대의 복식을 담았고, 또 어떤 화가는 화가였으나 패션을 끝없이 연구해 패션 디자이너보다 위대한 일을 해냈다. 그들은 내 기준에 화가의 모습을 한 복식연구가였고, 화가의 모습을 한 종합예술가였다. 오늘은 그런 화가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모자 디자이너의 아들, 제임스 티소
영국 사교계의 패션을 담다

제임스 티소, Young Lady in a Boat, 1870, 캔버스에 유채

프랑스 출신인 제임스 티소James Tissot는 파리 코뮌에 참여한 뒤 1871년 무렵 영국으로 망명했고, 런던에서 에칭과 캐리커처, 초상화를 배워 영국에서 꽤 인기 많은 초상화가로 명성을 누렸다. 하지만 사랑만큼은 이론적으로 하지 못했다. 그는 두 명의 아이가 있는 이혼녀인 캐슬린을 사랑했다. 당시에 이혼은 사회적으로도 이슈였고, 캐슬린은 정략결혼을 하러 떠나는 길 배 안에서 선장과 사랑에 빠져 선장의 아이를 가지게 되어 이혼을 한 상황이었기에 평판이 나쁠 수밖에 없었다. 초상화가로 사교계 모임의 중심에 있던 제임스 티소에게 이혼녀와의 사랑은 세간의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고, 실제 그는 이혼녀 캐슬린과 그녀의 아이들과 자주 교류하고 동거한다는 이유로 구설에 올라 스스로 왕립아카데미 전시를 한동안 포기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이 그런 티소를 비난했지만 티소는 개의치 않고 오히려 캐슬린을 모델로 더 많은 그림을 남겼다. 1882년 28세의 나이에 캐슬린이 폐결핵으로 삶을 마칠 때까지 6년이라는 시간 동안 둘은 뜨겁게 사랑했으며 티소는 그녀가 떠난 후 함께 살던 집에서 도저히 지낼 수가 없어 친한 동료 화가에게 집을 팔고 황급히 파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강령술을 통해 그녀의 영혼을 만날 정도로 오랜 시간 캐슬린을 잊지 못했다.

제임스 티소, 공원 벤치, 1882, 캔버스에 유채, 99.1×142.3cm, 개인소장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제임스 티소의 그림은 나와 같은 여성들에게 인기다.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많은 여성들은 대부분 이렇게 대답한다.

“저 시대 여자들이 입는 옷은 너무 아름다워요. 그리고 이 화가는 여자를 정말 예쁘게 그려요!”

그렇다. 여자의 마음은 시대가 변해도 다 똑같다. 여자는 자신을 더욱 예쁘게 그려주는 화가를 좋아하고, 더욱 예쁘게 찍어주는 사진작가를 인정한다. 앞으로 몇 번의 시대가 바뀌어 미의 기준이 상대적으로 달라질지 몰라도 여성이 아름다워지고 싶은 그 욕망만큼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실제 저런 드레스를 입고 생활한다면 불편해 하루 만에 벗어 던지고 싶겠지만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여성들은 아름다움을 좇는 생명체임에 틀림없다. 특히나 모자 디자이너인 어머니 아래에서 자란 제임스 티소에게 귀족 여성들의 패션은 여자라면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였을 것이고, 그는 누구보다 여자들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법을 아는 화가였다.

제임스 티소의 그림 속에서 당시 상류층 여성과 아이들의 패션을 관찰하는 일이 즐겁다. 다소 무거워 보이는 모자일지라도 그 화려함에 감탄하게 되고, 현대에 존재해도 세련될 법한 스트라이프 무늬나 플로랄 무늬의 드레스는 디자이너가 누군지 의뢰하고 싶을 정도다. 거기에 빼어난 미모의 캐슬린이 모델이었으니, 그야말로 유럽식 미인도다. 실제 ‘공원 벤치’라는 작품은 제임스 티소에게는 소중한 그림이다. 티소는 캐슬린이 세상을 떠난 후 파리로 돌아가 이 작품을 완성했다. 그림 속에는 캐슬린과 아이들의 행복한 한때가 담겨 있다. 그는 이 작품을 전시는 했지만 팔지 않았다. 아마 캐슬린과 아이들과 함께한 시간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꽤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우리가 그가 그린 과거의 패션을 그리워하고 간직하는 것처럼.

아들의 이불을 만드는 것을 시작으로 패션 사업을 시작한 화가
소니아 들로네

소니아 들로네, 일렉트릭 프리즘, 1914, 250x250cm, 파리국립근대미술관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소니아 들로네Sonia Delaunay는 어린 시절 자식이 없던 외삼촌에게 입양되어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간다. 그 후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 각지에서 좋은 예술 교육을 받고 훗날 프랑스에서 평생의 예술적 동지이자 반려자인 로베르 들로네Robert Delaunay를 만나 꾸준히 예술 활동을 하게 된다. 

‘말이 아닌 색으로 시를 쓰는 시인을 만났다.’

소니아 들로네가 남편 로베르 들로네를 만난 후 했던 말이다. 색으로 시를 쓰는 시인이라.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은 이 느낌을 이해할까? 더듬더듬 그녀가 되어 그림으로 그 느낌을 이해하려고 해보자.

소니아 들로네와 로베르 들로네, 두 사람은 오르피즘orphism이라는 화파를 탄생시키는데, 오르피즘은 오르페우스(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인물로 노래와 리라 연주에 능했다)의 음악적 공명과 같이 음악을 닮은 순수 회화를 지향한다고 해서 당시 초현실주의 시인이던 기욤 아폴리네르가 붙여준 이름이다. 소니아 들로네의 오르피즘 작품을 보면 이 정의가 어렵지 않게 마음으로 이해가 된다. 빛의 색이 지닌 수많은 스펙트럼을 화면으로 끌어들여 시적인 화풍을 추구하는 그녀의 작품은 언뜻 보기에는 분할된 화면 때문에 입체파 같지만, 입체파의 그림보다 다정다감한 느낌이다. 마치 무지개가 내려앉은 듯하다고 해야 할까? 작품 전체가 서정적이다. 소니아 들로네가 1914년에 제작한 작품인 ‘일렉트릭 프리즘’은 깊이 있는 운동감을 부여하는 빛과 리드미컬한 원들의 움직임과 색채가 강조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율동감을 느끼게 한다.

소니아 들로네, 이불 퀼트

하지만 소니아 들로네의 업적은 보다 다른 각도에 있다. 현대 미술의 경우 아티스트와 브랜드 간의 협업은 이미 식상해졌지만, 소니아 들로네는 1920~30년대 여성 예술가로서는 최초로 패션 사업과 순수 예술을 접목했고, 이를 사업으로 이끌어 토탈아트를 추구했다. 여성 예술가들의 창조는 대부분 가정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은데 소니아 들로네도 마찬가지다. 소니아는 아들의 이불을 만들려고 색색의 천 조각을 이어 붙여 콜라주 작품을 만든다.

폴 고갱과 야수파의 영향을 받아 원색에 매료되었던 그녀는 늘 색이 주는 이미지와 힘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남편 로베르 들로네와 함께 꾸준히 책, 의상 등을 디자인했다. 그녀의 이런 능동적인 종합적 예술 활동은 1차 대전을 피해 스페인에 머무는 동안 패션 분야까지 확대되어 마침내 1924년에는 파리에 패션 스튜디오를 열고, 1964년 생존 여류 화가로는 처음으로 루브르 미술관에서 회고전을 가진다.

소니아 들로네가 그린 패션 일러스트를 바라보고 있으면 나는 어린 시절 동네에 있던 ‘미미 의상실’이 떠오른다. 친구 어머니가 운영하던 그 의상실에는 마네킹이 두 개 있었고, 우리 동네 아주머니들은 멋을 내고 싶은 날이면 ‘미미 의상실’에 가서 여러 가지 천을 보고 주인 아주머니와 디자인을 고민했다. 그리고 마침내 옷이 제작되는 날, 신데렐라가 무도회로 출발하는 것처럼 멋지게 차려입고 어디론가 떠났다. 아주 작은 동네에도 소니아 들로네 같은 토탈 아티스트가 함께 살고 있던 것이다. 그녀들 역시 소니아 들로네처럼 자녀들의 옷을 만들고 이불 조각을 꿰매어주던 누군가의 어머니였고, 아내였으며, 며느리였다. 그런데도 그녀들은 시간을 쪼개 불평하지 않고 창작 활동에 임했다. 나는 그래서 세상의 모든 토탈 아티스트를 사랑한다. 심지어 그 토탈 아티스트가 할머니가 될 때까지 예술혼을 불태웠다면 숱하게 지나간 그녀의 많은 시간에 존경을 표한다. 가장 아름다운 창작은 가정에서 시작되고 어머니의 손에서 시작한다. 소니아 들로네의 패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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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다은

글 이소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