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ROUND
CLUB ONLY
SERIES
MEET AROUND
SUBSCRIBE
SHOP
어느 노래 제목처럼, 사랑해 그리고 기억해
‘사랑하다(LOVE)’와 ‘살아가다(LIVE)’의 어원은 같다고 한다. 그리하여 입 밖으로 조심스레 소리를 낼 적에 그 어감조차 비슷한가 보다. 이건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데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필수불가결한지를 증명해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다지도 치명적인 사랑의 뒤안길은 어떤 모습일까 알아보기로 했다. 당신과 당신의 반려동물의 속절없는 이별에 대해서 말이다.
내가 열아홉 살이었던 가을, 8년을 함께한 우리 집 강아지 ‘피키’는 많이 아팠다. 워낙 노견이었던 탓에 자궁적출수술을 받고, 피부염에 시달리는 과정에서 온 이빨이 빠졌다. 낮은 소파 위로도 뛰어오르지 못하는 순간이 왔고, 가족 모두가 그 애에게 집중했다. 그즈음 엄마는 동물 병원에 다니느라 바빠져 한동안 보기 힘들어졌다. 나는 점점 빈 거실에, 누워만 있던 엄마의 모습에, 그리고 표현할 길 없던 아득한 적막에 익숙해져 갔다. 그리고 어느 저녁, 수학 학원에서 수업을 받던 와중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울음이 꽉 찬 목소리로 언니가 말했다. “피키, 오늘 하늘나라 갔대.”
나는 죽음의 실재를 가늠하기에 어린 나이였지만,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었다. 죽음을 맞이한 이와 이별한 사람들은 도저히 형언하기 어려운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혹 ‘결국 그것이 표정 아니냐’고 물을 수 있겠다. 하지만 표정이라 하면, 속내가 낯빛으로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인데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단순한 근육의 움직임이 아니라, 눈동자의 흔들림, 목 안에 성겨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목소리, 그리고 어떤 말을 꺼낼 때 입술 위의 옅은 주름 같은 것을 말한다. 그것은 정녕 ‘얼굴’이다.
피키를 당신 손으로 직접 데려와 정이 각별히 깊었던 엄마는 한동안 하던 일을 못 하고 그의 부재를 인정하느라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는 차를 타고 가다가 코스모스밭이 보이면 힘없는 갈지자걸음으로 휘적휘적 걸어가 코스모스를 꺾었다. 그리고 하늘 높이 내지르듯 울며 말했다. “우리 피키 가져다줄 거야. 우리 피키 꽃 줄 거야.”
온전한 ‘처음’이었기 때문에 이런 공허함을 어떻게 메워야 하는지 알 길이 없던 나는 다른 가족들을 달래고 위로하는 데 바빴다. 다음에는 수긍하는 데 애를 썼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그가 떠난 빈자리에 못 다 준 사랑을 어찌 표할 수 있을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 이별이 모여드는 곳으로 떠났다. 지금까지는 익숙해질 듯 하면서도 절대 익숙해지지 않은 설익은 감정들을 부러 피하곤 했지만, 그 갈증을 해갈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은 어떤 얼굴을 하고 그들을 떠나 보낼지 궁금했다. 슬픔哀과 슬픔悼 사이, 애도에 대하여 말이다.
햇살이 아롱거리던 아침, 경기도 광주로 향했다. 반려동물을 위한 장례식장으로 들어가자 이미 몇몇 가족들은 이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나는 그들의 곁에서 모든 장례 과정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들과 같은 시선, 그러나 다른 받아들임이 있던 자리였다. 장의사는 예를 갖춰 반려동물을 깨끗하게 염을 하고 정갈한 수의를 입혔다. 모든 이들은 마른 눈물을 애써 삼키고, 붉은 눈동자를 띄고 있었다. 사실 이러한 반려동물 장례의 절차가 지금같이 자리 잡은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그전에는 오로지 화장만이 진행되었었다. 하지만 화장비용을 지급하자마자 일사불란하게 화장이 시작되고 끝나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조금 더 애틋한 안녕을 원했다. 슬픔을 슬픔답게 표하며 제대로 이별할 수 있는 ‘의식’을 치르길 바란 것이다.
그렇게 지금의 장례식이 만들어졌다. 입관식이 끝나면 추모관으로 이동하여 마지막으로 사랑의 말을 전한다. 사람들은 단어 하나하나까지 그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소중하고 간곡하게 말했다. 고마웠어, 행복했어. 과거형의 말들. 잘 가, 편히 쉬어야 해. 미래형의 말들. 그리고 사랑해. 유일하게 현재형인 말까지. 만지고, 이름을 부르고, 기억하면서 사랑이라는 것이 결코 거창하지도, 먼 곳에 있지도 않다는 것을 다시 깨닫는다.
시간이 흘러 또 다른 반려동물이 들어왔다. 굵은 부츠를 신은 부부는 빗질을 받는 강아지를 바라보며 ‘우리 애기 빗질은 처음 하는 것 같아’라며 말갛게 웃었다. 마음의 근육이 튼튼할 수 있을 만큼 그들은 얼마나 많은 상상과 가정과 그리고 인정이 있었을지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웃으며 이별하는 이들도 있다. 어쩌면 이별은, 또 한 번의 ‘인사’를 위해 지어진 시간의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화장을 하면 납골당에 안치를 하거나, 혹은 유골을 순간적인 열로 녹였다 굳혀 어여쁜 스톤으로 만들어 곁에 영원히 보관하기도 한다. 반려동물의 종, 건강 상태, 나이 등의 차이로 모든 스톤의 색깔은 동물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이 세계에 하나밖에 없던 이는 여전히 하나밖에 없는 존재로 남는 것이다. 출구 근처 구석에는 장난감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새것 아닌 사용했던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들이었다. 꽃 한 송이 피지 않은 외로운 겨울이라 생각했는데, 되레 뜨겁게 사랑을 확인했다.
무던히 이별에 애를 쓰고도 결국 찾아오는 혼자인 시간에는 상실감의 수문이 열려 그대로 잠식될 때가 있다. 작은 웅덩인 줄 알았던 것이 실은 깊은 바다였다. 아니, 늪이었을지도. 반려동물 장례식에서 다양한 형태의 이별을 보았다. 그 누구보다 서럽거나, 혹은 미소 지으며 덤덤한 각자의 이별을 말이다. 그러나 눈물을 보인다고 해서 슬픔을 못 버티는 것이 아니고, 웃어 보인다고 해서 절망감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다. 표현의 방법과는 별개로 마음 한구석에서 나도 몰래 어둡고 축축하게 자라나는 곰팡이가 조용히 슬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반려동물의 빈자리를 견디지 못하고 우울증, 무기력증 등 심리적으로 불안정기를 겪게 되는 것을 펫로스Pet Loss라고 일컫는다. 아마 당시의 우리 엄마도 펫로스를 겪었던 듯싶다. 상실감이란 감정은 애도의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주위 사람들과 슬픔을 나누는 과정을 갖는다면 자연스럽게 회복할 수 있다. 현실을 실감하는 데에 그만큼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누군가와 나누면 기쁨은 배가되고 슬픔은 반이 된다는, 진부한 줄로만 알았던 말은 그렇게 진리가 되어왔다. 하지만 반려동물의 죽음은 타인에게 공감을 받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 눈에 보이지 않는 벽에서부터 우울증세가 뿌리를 내린다.
어느 만화의 명대사처럼 기억에서 잊히지 않으니까 영원히 우리 곁에 있을 거란 말만으로는 위로하기가 어렵다. 맞다. 슬픈 건 슬픈 거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사랑했기 때문에 슬퍼한다는 인과관계가 슬그머니 숨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은 누군가 떠난 빈자리를 슬퍼하는 것만으로도 감히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는 없어도, 그와 주고받은 사랑의 총량이 이를 증명해준다. 모순적이게 ‘애’와 ‘도’ 사이에 사랑이 있음을 그제야 눈치챘다.
나는 모든 존재의 손이 좋다. 손은 사실 입을 대변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것을 만지고 쓰다듬었을 때, 그런 마음이 온전하게 전해졌을 것이다. 이제 쓰다듬을 수 없다면, 나는 다시 나의 손으로 마음에 드는 편지지에 편지를 써야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날이 짧아진 탓인지 일찍이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주황빛 노을 뒤로 구름이 얼기설기 모여 있었다. 곱게 빚어진 무지개 구름다리처럼.
에디터 이자연
포토그래퍼 오린지 자문 이예슬, 박성종(맘튼튼의원), 조규웅(러브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