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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나는 ‘스밀라와 아오마메’라는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글에도 썼듯 스밀라와 아오마메는 내가 사랑하는 여자들이다. 그런데 쿠미코와 뮤리엘을 나는 사랑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쿠미코와 뮤리엘을 보면 마치 나 자신의 어떤 면을, 또는 내가 뛰어넘어야 할 나 자신의 어떤 면을 보는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아릿해진다.
나는 일하는 여자다. 돈은 별로 못 벌지만 어쨌든 일은 하고 있다. 일을 하는데 남편도 있고 애도 둘이나 있다. 일을 하면서 남편도 있고 애도 둘이나 있다는 건, 인생이 무척 피곤하다는 뜻이다. 새벽에 작업실에 나와서 일하다가 해가 질 무렵에야 집으로 들어가서 배고프다며 보채는 아이들의 절규를 묵살하면서 미친 듯이 밥을 짓는다. 이렇게 밥을 10년쯤 짓다 보면 스피드 요리의 대가가 된다. 냉장고와 가스레인지와 칼과 도마만 주시라. 10분 안에 한 상 떡 벌어지게 차려드릴 수 있다. 물론 맛은 보장 못하지만.일찍 일어나기 때문에 밥을 하면서 계속 하품을 한다. 아이들에게 밥을 먹이고 씻기고 수학 문제집을 풀게 하고 잠자리에 들게 하는 몇 시간 동안 내 컨디션은 지속적으로 바닥으로 떨어져 밤 9시쯤이면 거의 살아있는 시체가 된다. 결국 아이들을 재우면서 10시도 되기 전에 잠이 들어버린다. 다음 날 새벽 5시에 일어나면 또 똑같은 하루의 반복.
그래서 영화 같은 건 볼 시간도 없다. 대체 이 사이클에서 영화 볼 짬을 어떻게 만들어낸단 말인가. 그리하여 나는 용단을 내렸다. 매주 목요일 저녁은 무조건 영화를 위해 비워두기로. 혼자 결심하면 분명히 안 지킬 테니까(나는 매우 평균적인 의지의 소유자) 동네방네 소문도 내고 같이 볼 사람은 같이 보자고 공지도 날린다. 그리하여 나는 매주 목요일 저녁 일곱시 반, 내 작업실에서 영화 볼 수 있는 시간을 겨우 마련하게 되었다.
일하는 유부녀의 삶은 쥐어짜는 것이다. 시간을 쥐어짜고 체력을 쥐어짜고 실력을 쥐어짜고 아이디어를 쥐어짠다. 이렇게 짜다 짜다 단물이 다 빠질 나이가 되어야 나는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그래봤자 무슨 소용인가. 이미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 있을 텐데. 무릎이 부실해서 돌아다니기도 힘들 텐데.
아무튼 목요 영화관의 첫 스타트는 <뮤리엘의 웨딩>으로 끊었다. 전에도 본 영화인데, 이 원고를 쓰느라 한 번 더 봤다. 내 작업실의 한쪽 벽은 그냥 하얀 벽이라 빔 프로젝터로 비추면 그럭저럭 영화관 느낌이 난다. 오디오 스피커도 썩 좋지는 않지만 있긴 있으니까 사운드도 나쁘지 않다. 무엇보다 이렇게 영화를 보는 것은 나에게 약간의 긴장감을 준다. 집에서 봤다면 분명 절반도 지나지 않아서 곯아떨어졌을 텐데 여기서는 그럴 수가 없다. 게다가 목요일 저녁의 자유를 쟁취했기에 가족들도 나를 찾지 않는다. 정말 좋다.
<뮤리엘의 웨딩>은 <로미오와 줄리엣>, <물랭 루즈>, <위대한 개츠비>를 만든 호주 출신 감독 바즈 루어만의 출세작이다. 못생기고 뚱뚱하고 촌스러운 뮤리엘이 꿈에 그리던 결혼에 골인한다는 줄거리인데, 그 결혼이 위장결혼이라는 게 문제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뮤리엘은 절친한 친구를 잃고, 엄마도 잃는다. 엄마를 착취하며 제멋대로 살아가던 남은 가족들도 살아갈 길을 잃는다.
첫 영화 상영에는 두 명의 유부녀가 함께했는데, 그녀들이 영화를 보면서 계속 중얼거린 말이 있다. “쟤는 왜 저렇게 결혼에 목을 맬까?” 그러게, 왜일까요. 여러분은 아마도 잊으신 거겠죠. 호강에 겨워 요강에 뭘 하는 것처럼, ‘이놈의 지긋지긋한 결혼!’, ‘다시 태어나면 결혼 따윈 죽어도 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하셨겠죠. 저도 가끔은 그러곤 한답니다. 결혼이란 사실 시작하면서부터 내리막길의 연속인 거니까요. 우리는 우리가 결혼한 남자를 껴안고 그 내리막길을 함께 뒹굴며 내려가고 있는 거니까요. 결국 결혼한 우리는 이걸 배워나가고 있는 것 같아요. 잘 올라가는 법이 아니라 잘 내려가는 법을 말이지요. 그건 깨달음과 충만함을 선사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울화통이 터지고 간담이 서늘해지고 하늘을 원망하게 되는 그런 것이지요.
그러면서도 저는 아직 잊지 못했습니다. 잊을 수가 없어요. 제가 뮤리엘이던 시절을 말이지요. 제가 뮤리엘일 때 말입니다, 매일 밤 불 꺼진 자취방으로 들어가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끔찍했어요. 서울에 있는 제 방의 어두컴컴한 창문을 올려다보다가 도저히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 경기도 평택의 부모님 집으로 간 적도 있었어요.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두 시간 삼십 분이나 걸려서요. 다음 날 새벽에 집을 나와 다시 서울의 직장으로 출근을 했지요.
저는 그때 너무 외로웠고 또 평생 이렇게 외로울 것이라는 확신에 너무나 두려웠어요. 그래봤자 스물일곱이었는데 말이지요. 저는 외로움을 많이 타는 타입일까요? 지나치게 비관적이라 항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하며 조바심치는 타입일까요? 네, 맞습니다. 이제 와서야 고백하지만 저는 누군가로부터 “나랑 결혼해 줄래?”라는 말이 정말 듣고 싶었어요. 뮤리엘처럼 말이지요. 그렇지만 저는 그 노래가 정말 싫어요. “나랑 결혼해줄래. 나랑 평생을 함께 살래. 우리 둘이 알콩달콩 서로 사랑하며 나 닮은 아이 하나 너 닮은 아이 하나 낳고 천년만년 아프지 말고 난 살고 싶은데.” 이 가사를 타이핑하다 보니 솔직히 치가 떨릴 정도네요.
하지만 실은 저는 그 말을 정말로 듣고 싶었어요. 한 남자에게서 그런 말을 듣는 것은, 누가 나를 같이 살고 싶을 정도로, 평생을 함께 하고 싶을 정도로 사랑해주고 좋아해준다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일이 아닌가요? 제가 너무 순진했던 건가요? 제가 너무 로맨틱한 건가요? 어차피 인생이 내리막길이라면, 혼자 그 내리막길을 구르는 것보다는 누군가를 껴안고 구르는 게 낫지 않나요?
결국 나는 결혼을 하면 이 두려운 세상에 대한 안전한 보호막이 생길 거라 믿었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가 나를 선택했다는 사실, 나와 평생을 함께 살고 싶어 한다는 사실, 알콩달콩 서로 사랑하며 나 닮은 아이 하나 너 닮은 아이 하나 낳고 천년만년 아프지 말고 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 그 사실이 내가 이 인생의 패배자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줄 거라 믿었는지도 모르겠다. 웨딩드레스도 입고 싶지 않았고 성대한 결혼식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결국 나는 뮤리엘처럼 한 남자로부터 선택받는 여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쿠미코, 더 트레저 헌터>의 쿠미코는 도쿄의 작은 회사에서 일하는 노처녀다. 술 한 잔 마시지 않고도 늘 어젯밤 과음한 인상에 어둠의 포스를 나프탈렌 냄새처럼 풍길 수 있는 그녀에게는 친구도 애인도 없다. 쿠미코는 도쿄의 어둡고 비좁은 방에서 결혼하지 않을 거면 당장 고향으로 내려오라는 엄마의 전화에 시달리며 토끼 한 마리를 벗 삼아 살고 있다. 늙다리 사장은 그녀에게 “결혼은 언제 할 거냐?”, “레즈비언이냐?”고 묻는다. 쿠미코가 그에게 할 수 있는 복수는 소심하게 “각자의 길이 있지 않습니까?”라고 대꾸하거나 그의 찻잔에 침을 뱉어주는 것뿐이다. 동료 여사원들은 늘 모여 앉아 속눈썹 연장술 얘기나 하는데, 쿠미코는 그런 데 끼고 싶지도 않다. 길에서 만난 결혼한 고교 동창은 과하게 친한 척을 하며 만나자고 들러붙는다.
결혼과 임신 말고는 중요한 일이 대체 뭐가 있냐는 이 질식할 것 같은 세상에서 쿠미코의 마지막 희망은 미국 미네소타 주 파고라는 도시의 눈 덮인 벌판에 묻힌 돈가방을 찾는 것이다. 바닷가 동굴에서 코엔 형제의 영화 <파고>의 비디오를 발견해 틀어보고는 이 영화를 실제라고 믿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쿠미코는 주인공들이 묻어둔 돈가방 역시 실재할 거라 믿어버린다. 그녀는 돈가방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를 만들어서는 어느 날 사장의 신용카드를 들고 아무 말 없이 미국으로 떠나버린다.
미국 사람들은 파고에 간다는 그녀에게 거길 왜 가느냐며, 거긴 아무것도 볼 게 없는 곳이라며 의아해한다. 쿠미코를 차에 태워준 할머니는 혼자 사는 집으로 그녀를 데려가서는 옛날이야기를 실컷 늘어놓고 지금은 연락도 하지 않는 배은망덕한 아들의 방에 재워주면서 이렇게 말한다. “거긴 춥고 할 것도 없어. 쇼핑몰에나 데리고 가줄게. 혼자 여행하면 무슨 재미람? 고독? 그냥 외롭다는 걸 근사하게 포장한 것뿐이지 뭐.”
누구도 쿠미코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에게 친절을 베푼 미국 경찰관은 막상 그녀가 마음을 열고 키스를 하자 진저리를 치며 몸을 뺀다. “나는 애가 둘이나 있는 유부남이에요.” 쿠미코는 상처를 받는다. 그녀는 “그건 가짜예요! 영화일 뿐이라고요!”라고 외치는 그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눈길을 달려 돈가방을 찾으러 간다.
쿠미코처럼 나 역시 보통의 여자애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속눈썹 연장술이나 성형 같은 데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다. 그래서 보통의 여자애들이 하는 이야기가 하나도 재미없었다. 화장실에 손을 잡고 함께 들어가는 여자애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 애들이 부러웠다. 그 애들의 안전한 무리 속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 안에서는 보호받는 느낌이 들 테니까. 나만 혼자 다른 길로,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두려움과 불안감에 휩싸일 필요가 없을 테니까. 속상한 일이 있으면 그 애들에게 위로를 받고 미운 사람이 있으면 그 애들과 함께 욕해줄 수 있을 테니까.
속눈썹 연장술을 받았더라면, 쿠미코의 인생도 달라졌을까. 살을 빼고 스타일을 바꾸고 소름 끼치는 잇몸 미소를 짓지 않았더라면, 뮤리엘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내가 쿠미코였을 때, 내가 뮤리엘이었을 때, 회사 상사가 내게 물었다. 넌 왜 그렇게 칙칙하냐고. 어찌나 황당했던지 십수 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그 질문을 기억하고 있다. 내가 그걸 알면 그렇게 칙칙했겠습니까만은, 칙칙하고 싶어서 칙칙한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만은, 그건 아마 그때 내가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거다. 아마 무척 외로웠기 때문일 거다. 고독? 결국 그건 외로움을 근사하게 포장한 단어일 뿐인지도 모른다. 모든 건 위장이고 거짓이고 가짜일지도 모른다.
결혼한 나는 결혼하지 않은 여자들이 인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사실 결혼한 여자로서 인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 힌트는 어쩌면 우리를 둘러싼 속세를 대하는 태도에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세상이 아니라, 속세 말이다. 여자에게 결혼과 임신만큼 중요한 일이 또 어디에 있냐고 묻는 속세. 너는 왜 다른 여자애들과 다르냐고 다그치는 속세. 못생긴 얼굴과 저주받은 몸매로는 도무지 대적할 자신이 없어 그냥 집구석에 처박혀 담배나 태우며 잊어버리고 싶은 속세.
쿠미코는 스스로 속세에 등을 돌리고 뮤리엘은 자꾸만 속세에 왕따를 당한다. 그 속세의 진짜 모습은 남편의 이혼 요구에 충격을 받고 게으름뱅이 자식들을 혼자 키워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한 뮤리엘의 엄마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 불태워버려 잿더미만 남은 뒤뜰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결국 그 속세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되었을 때, 그것이 결국 위장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불 한번 시원하게 질러버리면 활활 타서 재만 남아버릴 것이라는 걸 알아차렸을 때, 그리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속세를 왕따시킬 수 있게 되었을 때 여자들은 진정으로 성장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쿠미코는 눈 덮인 벌판에 묻힌 돈가방이라는 희망을 향해 달려가고, 뮤리엘은 결혼 계약을 파기한 채 불구가 된 친구 론다를 태운 차를 몰고 새로운 삶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그러니까요, 저의 사랑스러운 유부녀 친구분들. 우리의 인생 역시 위장이고 거짓일 뿐인지도 모르겠어요. 우리가 실제라고 믿었던 것들이 어느 날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지도 몰라요. 천년만년 아프지 말고 평생 함께하자던 약속은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질지도 몰라요. 우리 자식들은 우리를 미워하고 더불어 귀찮아하겠지요. 오랜 시간 동안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것, 누군가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에 익숙해진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혼자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겠지요. 그때 우리는 쿠미코가 버린 토끼의 꼴을 하고 있겠지요. 우리 앞에 무한한 자유가 주어졌지만 겁먹고 당황해서 어디로도 가지 못한 채 제자리만 맴도는 불쌍한 토끼 말이에요. 나는 말이죠, 우리가 그것을 잊고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뮤리엘의 웨딩 Muriel’s Wedding
P.J. 호건ㅣ코미디ㅣ호주ㅣ105분
주변 사람들로부터 한심하다는 취급을 받는 뮤리엘. 언제나 멋진 결혼을 해 주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상상에 빠진다. 그런 그녀는 우연히 시드니에 정착하여 새로운 삶을 꿈꾸게 된다. 결혼의 진정한 기쁨과 행복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며 그녀는 새로운 행복을 찾아 나간다.
쿠미코, 더 트레저 헌터 Kumiko, the Treasure Hunter
데이비드 젤너ㅣ드라마ㅣ미국ㅣ104분
많은 이들이 북적이는 대도시 도쿄에서 쿠미코는 무거운 외로움을 느낀다. 하지만 현실은 온통 그녀를 괴롭히는 것들뿐. 어느 날 동굴 속에서 발견한 비디오 테이프에서 영화 속 한 남자가 눈밭에 돈가방을 묻는 것을 보고 그게 실재한다고 확신한다. 그녀의 보물찾기는 어떻게 끝이 날까.
글 한수희
일러스트 이영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