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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오랜 여행 가이드를 소개합니다
삽화가 장자크 상페
여행 계획을 세운다. 오늘은 뉴욕, 내일은 파리. 계획 없이 뉴욕과 파리를 넘나드는 건 내 오랜 취미다. 선선한 바람이 불던 어느 밤엔 퐁뇌프 다리 위를 거닐었고, 햇살이 따사롭던 어떤 날엔 뉴욕 한가운데서 핫도그를 사 먹었다. 여행이 가고 싶을 땐 돈과 시간을 확인하는 대신 장자크 상페를 찾는다. 그가 그린 도시들은, 언제든 방문할 수 있는 최고의 여행지다.
혹독한 추위와 찌는 듯한 더위가 길어질 때마다 여행 생각이 난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면 더 좋은 곳에 가고 싶고, 향긋한 꽃 냄새를 맡으면 어디라도 떠나고 싶다. 이 계절이 또 다른 계절로 물들어 올 무렵 책장 앞에 선다. 떠날 채비를 하고 상페를 부르면, 어느덧 뉴욕이다. 1932년 프랑스 보르도에서 태어난 장자크 상페Jean Jacques Sempe는 1965년 뉴욕에 발을 디디고 첫눈에 이 도시와 사랑에 빠진다. 상페가 본 뉴욕은 삶으로 가득한 도시였다. 그가 안내하는 뉴욕은 숨 막힐 듯 아름다운 대자연도, 네모진 건물이 빼곡한 갑갑함도 아니다. 당장이라도 옆집에서 일어나고 있을 것만 같은 사소한 생활의 집합이다. “뉴욕은 굉장히 원색적인 도시예요. 사방에 색이 가득하지요. 정말로 색깔투성이 도시예요! 집이 빨간색, 초록색, 노란색이에요.1” 길거리 음식을 먹으며 그릇 가게 쇼윈도를 멍하니 바라보는 중년 남자, 주인 없는 방 안을 기웃거리는 까만 고양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피아노를 배우는 자그마한 소년, 커피를 들고 창밖을 바라보는 말쑥한 차림의 여자…. 뉴욕행 비행기표를 끊었다면 굳이 보려 하지 않았을 장면들로 상페는 나를 이끈다. 어떤 날엔 그를 따라 파티에 갔고 엄청나게 많은 명함을 받기도 했다. 상페가 일러준 대로 옮기자면, 뉴욕 사람들은 연락이 끊어지지 않게 할 줄 아는 것을 삶의 방법이라 생각하는데 그 방편으로 명함을 나누어준다고 한다. 어느새 보이지 않는 명함이 주머니에 뚱뚱하게 쌓였다.
“한번은 역을 그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의 역을 그렸던 거예요. 그랬더니 《뉴요커The New Yorker》 사람들 말이, 독자들이 이해를 할 수 없을 거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재작업을 해야 했고요…. 창문을 그리려면, 미국식 창문을 그려야 했습니다. 가로등도 미국식이어야 했고요. 그런 사소한 것들이 모두 작업상의 제약으로 작용했지요. 내가 무심히 지나치던 사소한 것들이 가끔은 어마어마한 실수로 이어지더라고요.2” 상페가 뉴욕의 집요한 관찰자가 된 데는 《뉴요커》의 역할이 컸다. 1978년부터 《뉴요커》와 공동 작업을 시작한 상페는 영어를 할 줄 모르는 프랑스의 그림 작가였다. 그는 뉴욕의 생활상을 담는 이 유수의 주간지와 일하기 위해 진땀을 흘려가며 떠듬떠듬 영어를 구사했고, 뉴욕의 모습을 그림에 녹이기 위해 도로의 신호등부터 창틀의 모양까지 쉬지 않고 관찰했다. 상페는 실제 사람과 공간을 넘어 그 속에 깃든 사건과 행동을 유심히 바라본다. 상페가 안내하는 여행은 다큐멘터리를 닮았다. 나는 여전히 상페와 함께 곧잘 뉴욕에 간다. 쏟아지는 소나기를 흠뻑 맞고 우산 장수에게서 우산을 사기도 하고, 이른 아침 시장에서 산 싱싱한 멜론을 부엌 창틀에 올려두기도 한다. “영어를 배운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못해요. 나이가 들어서 새로 언어를 배운다는 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가이드와 나는 영어를 포기한다. 그렇게 영원히 뉴욕의 관찰자로, 말을 아끼고 눈으로 풍경을 좇는 이 행복한 여행을 계속하기로 한다.
뉴욕 여행을 마치고 곧장 파리로 갈 계획을 세웠다. 다시 책장 앞에 섰고, 맨 위 칸에 손을 뻗었다. 이렇게나 금세, 파리다. 파리를 여행하는 날이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파리의 거리를 멍하니 바라보며 시간을 보낸다. 가끔 새벽이 될 때도 있다. 절대 뚫리지 않을 것처럼 꽉 막힌 도로, 차와 차 사이에 고여 있는 사람들, 그 주변을 감싼 푸른 가로수, 그리고 풍경처럼 자리한 카페 드 플로르café de Flore. 카뮈와 장 폴 사르트르가 드나들던 그곳으로 상페는 나를 안내하지 않는다. 다만, 시야 어딘가에 계속 걸리게 두고 저기가 카페 드 플로르라는 것을 눈짓으로 알려줄 뿐이다. 그 맞은편에는 브라스리 리프Brasserie LIPP도 있다. 상페는 뉴욕보다 파리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하는데, 맥주와 카페 메뉴를 판매하는 브라스리 리프엔 정치와 패션계의 유명인사가 드나들었다고 알려주는 식이다. 헤밍웨이가 <무기여 잘 있거라>를 탈고한 장소라지만, 우리는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 나무 아래서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남성을 멀찍이서 바라보는 것으로 여정을 끝낸다. “나는 풍자화와 재즈가 늘 가깝다고 생각해왔습니다. 풍자화는 사실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재즈의 경우처럼 그림도 뭔가를 넌지시 권하는 것이지요. 멋지지 않습니까? 뭐든 부풀리는 우리 세태와는 정반대되는 것이지요. 풍자화도 재즈처럼 앞에 나서지 않는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3”
종종 파리에서 깜짝 놀랄 일을 겪는다.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기도 전에 맨 앞 사람이 걸어나갔고, 그 뒤에 선 모두가 우르르 길을 건너는 아찔하고도 우스운 사건. 코너를 돌던 버스 두 대가 머리를 부딪고 승객들이 모두 내려 서로에게 삿대질을 하는 사건. 당장에라도 치고받을 듯한 구도로 서서 침 튀기며 삿대질을 해대는 무시무시한 현장을 가만히 보고 있는데, 나의 가이드는 시선을 옮겨 소동 바깥을 응시한다. 나는 그의 안내를 따라 눈길을 돌렸고 버스 광고판에 비키니를 입고 길게 늘어진 모델을 본다. 위험천만한 상황을 앞에 두고 눈치 없이 자꾸 터져 나오는 웃음에 문득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다. 상페는 자주 나에게 그런 것을 보여준다. 저길 좀 보라고 재촉하는 것은 아닌데, 내 시선은 어느덧 그의 시선과 나란히 있다. 가만 보면 이 가이드, 여행자를 행복하게 만들 줄 안다. “나는 항상 끊임없이 놀라고 또 놀랍니다. 조금 아까 창으로 비행기 한 대가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늘에 수많은 사람들이 떠 있는 것이지요. 전속력으로 날아가는 그 기계 속에, 어디론가 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 있는 거예요. 나에게는 그런 생각들이 정말로 재미있고 매력적이랍니다. 정말 놀랍잖아요. 궁금한 것들이 마구 생겨나지요. ‘빌뇌브 생조르주에 사는 모자 쓴 저 남자는 왜 뉴기니 섬에 가는 걸까? 뉴기니 섬에 도착해도 여전히 모자를 쓰고 있겠지!’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림을 그리는 거랍니다.4” 상페가 파리에서 데려간 장소 중 제일 좋았던 건 ‘작은 공원’이었다. 도로와 도로가 만나면서 생기는 틈새 공간에 울타리를 둘러 공원으로 조성한 파리의 숨은 안식처다. 나는 거기서 곱슬머리에 통통한, 둥근 안경과 빵모자를 쓴 아저씨를 여러 번 만났다. 언제나 턱에 손을 괴고 무언가에 골몰하는데, 한 번쯤은 말을 걸어보고 싶지만 이내 고개를 젓는다. “불어를 배운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못해요. 나이가 어려도 새로 언어를 배운다는 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나는 뉴욕의 상페처럼 불어를 포기한다. 그렇게 영원한 관찰자로, 믿음직한 가이드를 옆에 두고 기묘한 여행을 계속하기로 한다.
1~4: 《텔레라마Telerama》 전 편집장 마르크 르카르팡티에와의 인터뷰 중
뉴욕의 상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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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주연
자료 제공 열린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