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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히 마음만 따라가는 그림
몇 해 전 뉴스에서 얼핏, 서점에서 얼핏 어린아이가 그린 듯한 서툰 그림들을 보았다. 그림마다 사연이 가득해 보여 누구의 작품인지 궁금증이 일었는데, 얼마 후 글과 그림을 모르던 할머님들이 글, 그림 수업을 통해 완성한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번에는 또 다른 질문이 생겼다. 그림을 가르쳐준 이는 누구일까? 어떤 사람이기에 먼 순천의 할머님들의 마음을 보듬고 일면식도 없는 나에게 온기를 전한 걸까?
<우리는 순천소녀시대> 전시에 대해 소개 부탁드려요.
순천평생학습관에서 운영하는 문해 교실에 다니면서 그림책도서관에서 그림을 그리는 학생들, 그러니까 할머님들의 글과 그림으로 꾸민 전시예요. 2018년에 서울에서 첫 전시를 열고,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라는 책도 내고 방송에도 많이 소개가 됐죠. 그리고 이번 전시는 2019년 작품들을 모아놓은 두 번째 전시예요.
전시 오픈 때 할머님들께서 오셨다고요.
네, 단체로 오셨어요. 한글을 몰라서 항상 위축되어 계시다가 작가라는 이름이 붙고, 사람들이 와서 사인해달라고 하니까 너무 좋아하세요. 그분들에게는 신기한 경험이죠. 자기 그림이 작품이 되어 갤러리 액자에 걸려 있고 사람들이 그림 좋다고 말해주고요(웃음).
할머님들의 그림 선생님이 바로 작가님이시죠.
맞아요. 생각지도 않은 기회여서 제안 받고 조금 머뭇거렸는데, 안 해보던 거 하는 걸 좋아해서 재미있겠지, 해봐야지, 하고 도전해본 거죠. 수업은 2017년부터 3년째 하고 있어요. 일주일에 한 번씩 네 달, 16주 과정이라서 수업이 있는 기간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순천에 왔다 갔다 하죠. KTX로 편도 세 시간 정도 걸려요.
그림을 배워본 적 없는 할머니들을 가르치는 일, 어렵지 않았나요?
처음에는 힘들었죠. 문해 교실에서 한글을 배우신 지는 좀 됐어도 그림은 또 새로운 분야잖아요. 수업 초반에는 무척 낯설어하셨어요. 나이가 들면 새로운 일을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은 면도 있고요. 친구분들이 하니까 억지로 따라오신 분들도 있었어요. 그래도 교실에 다 같이 모여 있으니까 하기 싫어도 다 하시더라고요. 그런 적응 기간을 거치고 각자 그림 그리고 나서는 마음의 변화들이 생겨났어요. 몸과 마음이 좋아지셨다고 해요. 그림이 마음속에 있는 걸 표현하는 일이잖아요. 그림의 재미를 아시고 난 다음부터는 자발적으로 오시죠.
커리큘럼은 어땠어요? 일반 수업과 달랐을 것 같아요.
처음에는 사물 다음에 인물을 그리는 일반적인 커리큘럼을 짜서 갔는데 할머님들이 고개를 절레절레하셨어요. 안 한다고, 못 한다고(웃음). 그래서 동그라미, 세모, 네모 같은 기본적인 도형들부터 시작했어요. 지금까지의 커리큘럼이 아무 의미가 없더라고요. 컴퓨터에 소 사진을 띄워서 보여드리거나 고향집, 마을길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린 시절 기억들을 떠올려 보시라고도 했죠. 이런 기본적인 이야기만 하면 다른 이야기들이 계속 나와요. 한글 선생님들도 많이 도와주셨어요. 할머님들이 한글, 산수 등 초등 과정을 배우실 때는 공부한 것을 자꾸 잊어버리시는데, 그림은 스트레스 안 받고 그리면 되니까 재미있어하세요. 한글 선생님이 이제 공부는 안 하고 그림만 그린다면서 푸념하실 정도로요.
색감이 정말 화려하고, 기법도 자유로워 보여요.
우리는 잘 안 쓰는 색이죠. 보색을 같이 팍팍 쓰시고요. 저는 수업할 때 학생들에게 연필 스케치 과정 없이 그리게 해요. 연필로 그리고 나면 지우고 다시 그리게 되고, 그림도 지저분해지고 모든 게 엉터리가 되는 것 같아서요. 그러면서 자신감이 없어지더라고요. 아주 정밀하게 그려야 하는 그림 아니면 웬만하면 느낀 것 그대로 그리게 해요. 제일 좋은 게, 한 분 한 분이 자기 그림을 그린다는 거예요. 누구 한 명 따라 한 것 같지가 않잖아요. 동료 작가들이 전시를 보고 많이 자극을 받아 가요. 우리는 순수성이 사라지고 있는데 할머님들 그림에는 그런 게 잘 드러나 있으니까요.
할머님들이 서툴게 자신을 표현하는 모습을 보며 어떤 마음이 들던가요?
그림 그리는 건 무척 개인적인 일이에요. 혼자서 하는 일이고요. 그런 그림이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다른 역할을 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표현하게 만드는 걸 보고 무척 기뻤어요. 제가 그림을 가르치는 일로 그런 결과를 낳은 거니까요.
애틋한 마음도 들었을 것 같은데요.
연세가 있으시니까 한 해 한 해가 힘이 달려 보이는 분들도 있고 남편이 아파서 수업에 잘 못 오시는 분들도 있는데, 그러면 제가 가족처럼 신경이 쓰여요. 할머님들이 때마다 매실액, 김치 같은 거 보내주시고 선생님 잘 계시냐고 카톡도 한 번씩 오는데, 그분들한테는 그게 저한테 할 수 있는 최선의 애정 표현이라는 걸 아니까 참 감사해요. 이번 전시 오셔서도 제 손 잡고 고맙다면서 좋아해주셨어요. 이분들이 순천에서는 부러움의 대상이 됐어요. 이런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돼서 방송에도 나오고 유명해지니까 다른 분들이 어떻게 하면 그 반에 들어갈 수 있냐고 물으세요. 무슨 엘리트 반처럼요(웃음). 늘 본인들이 운이 좋다고 말씀하세요.
작가님과 할머님들과의 관계는 일반적인 사제 간의 관계와 다를 것 같아요.
할머님들은 저와 한글 선생님을 자식 대하듯 하지 않고 무척 깍듯하세요. 늘 선생님이라고 부르시고요. 아무래도 뭔가를 가르쳐주는 사람이니까 예의를 갖춰 주시는 거겠죠. 저희들도 꼭 학생들이라고 불러요. 할머님들이 떠들거나 집중 못 하실 때는 가끔 한글 선생님이 혼을 내기도 하는데, 그때는 정말 초등학생들처럼 얼어 계세요. “학생이 이래서 되겠느냐.”고 말하면 학생이라는 말을 그렇게 좋아하시더라고요.
초등학교 미술 과외, 고등학교 입시미술 교사, 대학교 시간 강사 등 미술 수업을 꾸준히 해오셨다고 들었어요. 누군가에게 그림 가르치는 일을 이렇게 꾸준히 하시는 이유가 궁금해요.
저희 어머님은 제가 선생님이 되기를 원하셨어요. 그 길을 가지는 못했지만 누군가를, 무엇을 가르치는 일이 재미있더라고요. 수업하면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요. 저는 가르치는 게 무엇을 주는 거라고는 생각 안 해요. 기술 몇 개 알려주고 그다음은 본인들이 알아서 하는 거죠. 그 과정에서 스스로 나아갈 수 있게 분위기를 만들어주고 방향을 잡아주는 게 다예요. 간섭하거나 세세하게 얘기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요. 수업할 때도 자세한 이야기는 안 해요. 그러면 어른이든 아이든 오히려 마음을 편하게 먹는 것 같더라고요.
혼자 집중해서 그리다 보면 스트레스 해소도 될 것 같아요. 작가님도 그림책 이외에 다른 그림을 그리기도 하세요?
감정을 표현하기에 그림은 정말 좋은 매체예요. 그런데 직업으로 삼고 나서 그러기가 어려워진 것 같아요. 동료 작가들에게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그림을 너무 재미있어한다고 하면 신기해해요. “그리는 게 재미있대? 우리는 일로 하니까 별로 재미없어졌잖아.” 하고요. 그림 그리는 즐거움을 다시 찾고 싶은 마음은 항상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에 주문을 받지 않고 내 마음대로 그린 것들을 모아 책을 내려고 해요.
ⓒ 김정자
ⓒ 황지심
반가운 소식이네요. 어떤 책인가요?
《그리니까 좋다》라는 그림 에세이예요. 괴물이나 동물, 제가 그리고 싶은 그림들을 제멋대로 막 그렸어요. 예전에 괴물 그림을 의뢰받았었는데 종이 쪼가리에다가 끄적끄적 그린 걸 편집자가 보더니 재미있다고, 이걸로 책을 만들어보자고 해서 열심히 그렸죠. 이걸 그릴 때 내가 어떤 기법을 썼는지, 마음이 어땠는지 짧게 덧붙였고요.
전작 《나오니까 좋다》의 고릴라와 고슴도치도 그렇고, 이번 책도 그렇고 동물 그림이 많아요. 그림으로 동물을 표현하는 걸 좋아하시나 봐요.
대학교 때는 추상화만 그려서 그런지 사람 그리는 게 너무 어려웠어요. 그런데 동물로 뭔가를 표현하니까 더 쉽고, 잘 맞더라고요. 지금도 사람 그림은 좀 어색한데 동물은 편해요. 뭔가 사람을 다른 생명체로 만든달까요?
또 그리기 좋아하는 게 있다면요?
풍경화도 좋아해요. 얼마 전에 데이비드 호크니를 보고 다시 풍경화를 그려보리라는 욕망이 꿈틀대더라고요.
100여 권이 넘는 책에 삽화를 그렸다고 알고 있어요. 글 작가와 합을 맞추어 그림을 그려내는 것은 그 일만의 즐거움이 있을 것 같아요.
회사를 다니다가 우연히 삽화를 그리게 되었는데, 그때쯤 《아빠가 보고 싶어》가 공모전에 당선이 됐어요. 그 이후에 그림책 작가로 쭉 갔으면 좋았을 텐데 생활을 해야 하니까 그렇게 못 했죠. 아무래도 삽화는 빨리 작업하고 돈을 벌 수 있으니까 삽화가로 오래 활동했어요. 동화책도 많이 그리고요. 원고를 보고 그림을 그릴 때는 제가 배우가 된 것 같아요. 시나리오를 읽고 장면을 연출해서 캐릭터를 만들고, 때마다 무슨 기법으로 그릴지 연구하는 게 참 재미있어요. 그런데 아쉬운 것도 있죠. 제가 온전히 다 작업한 책을 한번 내보고 싶었어요. 그림만 그리는 것도 좋은데, 그건 딱 반 정도만 한 거잖아요. 영화감독이 시나리오부터 연출까지 다 하고 싶은 마음처럼 제 얘기를 담고 싶었어요.
그래서 나오게 된 책이 《나오니까 좋다》죠. 책이 세상에 나온 지 1년 반이 된 지금까지도 여기저기서 원화전이나 책 관련 행사를 하고 계신 걸로 알아요. 책에 대한 애정이 그만큼 깊다는 뜻일까요?
《아빠가 보고 싶어》 이후로 10년 넘게 책이 못 나왔어요. 몇 번 엎어졌거든요. 처음에 그림책을 내기로 계약하고 나서 계속 돈 버는 일을 하면서 작업을 미뤘어요. 출판사에서 더는 못 기다리겠다고 해서 엎어지고, 또 다른 출판사와 작업을 다시 시작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일본에 제 책과 거의 비슷한 책이 있어서 다시 엎어지고요. 마지막에 캠핑 이야기로 결정하고 난 뒤에도 3년 정도 더 걸렸죠. 책이 그렇게 나오니까 애정도 있고, 그 책을 통해서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었기 때문에 그 뒤의 활동도 많이 할 수 있었어요.
그림책 한 권 완성하는 데 그만큼 오랜 시간이 걸리는 거죠?
그렇죠. 일단 서사의 방향을 결정해야 하고, 캐릭터를 자기화해야 하고, 기법도 연구해야 하고요. 여러 가지 실험을 해보고 본인에게 맞는 것들을 찾는 거예요. 한번 완성해놓고 6개월 뒀다가 보면 미흡한 게 보여요. 그럼 또 고치고 하는 거예요. 그림책이 나오는 데 되게 간단해 보이잖아요. 모르시는 분들이 보면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지만 그만큼 힘든 작업이죠.
예술가라는 호칭은 좀 부담스러우시다고요.
예술가라는 이미지가 학교 다닐 때 너무 안 좋았나 봐요. 왜, 옛날 작가들 있잖아요. 예술가라는 핑계로 방탕하게 생활하고…. 그런 게 싫어서 그 호칭도 별로 안 좋아했어요. 에세이에도 썼지만, 저는 그림책 작가라기엔 애매하고 삽화가이기도 하며 전시 기획자로도 불리는…(웃음) 모호한 사람이에요. 되게 많은 걸 하는 것 같은데 결국은 다 그림과 관련된 일이에요. 저는 그냥 계속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글도 만들고, 그림도 만들고, 어떻게 보면 이렇게 가르치는 일도 제가 만든 일이잖아요. 함께 만든 일이고요.
정말 모두 만드는 일이네요. 말이 나온 김에 전시 기획자로서의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어요.
2013년 파주어린이책잔치에서 처음 전시 기획을 하게 됐어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는데 관계자분이 저에게 기획을 맡기셨죠. 그때도 재미있을 것 같아서 덜컥 하기로 했어요. 그 이후에 잠잠하다가 2016년에 같은 행사의 전시 기획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죠. 저는 전시에 어울릴 만한 작가들을 수배해서 그분들이 잘할 수 있게 전체 틀만 잡아주었어요. 그전에는 그림책 전시라고 하면 도서관에서 이젤에 원화 놓고 하는 게 다였는데, 점점 그림책을 입체로 보여주고 인형도 만들고 새롭게 체험하게 하는 전시가 생기고 있는 것 같아요.
시간이 날 때는 뭐 하세요?
딱히 하는 게 없어서 문제예요(웃음). 집에도 잘 안 있고, 영화도 잘 안 보고, 술·담배도 안 해요. 하여튼 일을 너무 많이 한 것 같아요. 예전에는 멍 때리는 거 정말 좋아했는데…. 요즘 그게 좀 필요해요.
올해 계획하시는 일이 있다면요?
제 작품을 굿즈로 만들어볼까 해요. 최근에 제 그림으로 전시할 때 제가 거기 가서 티셔츠, 에코백에 그림을 그리고 경매로 팔았거든요. 재미있더라고요. 새 책은 지금 마무리 단계예요. 참, 책이 나오면 여기 ‘갤러리 우물’에서 원화전도 계획 중이에요.
작가님에게 그림 그리는 일은 어떤 의미인가요?
그림 그리는 일이요? 음…. 사실 한 10년 넘게 그림을 안 그리면서 별로 그림 그리고 싶단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정말 우연히 그림을 다시 그리게 된 거라서요. 그림은 그냥 때 되면 그리고, 재미있는 일 있으면 다른 일도 하다가 또 닥치면 하는 거죠. 최근에도 안 그린 지 한참 됐는데, 그리면 또 그리겠지, 하고 있어요(웃음).
ⓒ 김중석, 2019, 종이에 복합 재료
에디터 이다은
포토그래퍼 Hae R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