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NOT A PHOTOGRAPHER

암실에서 보낸 휴일

암실에서 보낸 휴일

I AM NOT A PHOTOGRAPHER

언제부터 요일을 쓰기 시작했을까. 조선 시대에도 주5일제가 있었을까. 그들도 토요일과 일요일은 주말이라 부르고, 나머지 요일은 평일이라 불렀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내게 휴일이란 개념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월화수목금토일이 아닌 토일토일토일토의 일상을 보낸다. ‘이번 휴일에 무엇을 할까.’보다는 ‘구멍 난 시간을 무엇으로 채우지.’를 고민하며 지내온 지가 꽤 되었다.

시간의 틈을 메우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오래 일을 쉬고 있다. 프리랜서로 지내고 있지만, 겨우내 일이 거의 없었으니 쉬었다고 말하는 게 맞을 거다. 회사에 다닐 때는 주말이 가장 좋았는데, 이제는 하루하루가 휴일 같고 그 사실이 조금은 막막하게 느껴진다. 주어진 시간의 빈틈을 어떻게 채워야 하는지를 배워본 적이 없다. 학생 때는 공부가 바빴고, 회사원일 때는 일로 분주했으니까.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그 구멍을 메워봤다. 여행을 떠났고, 밀린 잠을 잤고, 보고 싶던 드라마를 몰아서 보거나 가고 싶던 카페에 가서 하루를 보내보기도 했다. 몇 가지 움직임을 반복하고 멈추다 보니, 한 가지 방법이 유용하다는 걸 발견했다. ‘배우는 것.’ 뻔한 얘기일 수 있지만, 뭔가를 배우며 시간을 보내면 불안한 마음이 스스로 가야 할 자리를 찾아낼 때가 있다.

용기 내어
질문을 갖고 나오는 일

지난겨울에는 필름 현상 수업을 들었다. 긴 시간 즐겨온 취미 사진이기에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웬걸,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선생님이 설명해주는 용어 중 제대로 이해하는 게 없었고, 늘 보던 필름 패키지에 적힌 용어도 정확히 뜯어본 적이 없다는 걸 알았다. 전문가를 위한 수업이 아닌데도 이렇게까지 모르는 게 가득하다니. 안다고 생각하며 지나온 시간이 어쩐지 부끄러웠다.

내가 뭘 잘 몰랐다는 사실은 같이 수업을 듣는 이들을 통해 더 적나라해졌다. 한 아저씨는 카메라를 여러 대 꺼내놓고, 그간 찍은 필름을 보여주었다. 선생님이 뭔가를 이야기하면 설명을 덧붙이거나 질문을 던졌는데, 그때 쓰는 용어들이 전문적이었다.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이 수업은 기초반이었기에 전문가는 아녔을 거다. 물어보진 못했지만, 다른 일을 하는 분이라면 쉬는 시간을 온통 여기에 쏟지 않았을까. 퇴근하고, 황금 같은 주말에, 자신에게 남은 시간을 하나씩 꿰어 만든 일이겠지. 그렇게 시간을 보내도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를 용기 내서 이 자리로 갖고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겨우내 방에 틀어박혀서 ‘왜 일이 안 들어오지. 언제까지 이렇게 무료한 시간을 보내야 할까.’ 하며 게으름을 피우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우아한
사진

첫 수업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진가인 친구가 물었다. “암실 들어가 보니 어때?” 쭈뼛거리다가 “야한 기분이 들어.”라고 답했다. 친구는 크게 웃었다. “맞네. 대학 때 암실이 연애하기 참 좋은 곳이었지.” 전공자가 아닌 나는 사진학과를 다닌 학생들이 암실에서 뭘 했는지 잘 모르지만, 상상하다 보면 부러운 마음이 든다. 어둑하고 뻘건 조명이 있는 방. 음악이나 물소리가 작게 들리고 몸짓이 하나씩 조심스러워진다. 호텔 방에서 느끼는 야한 기분과는 아주 다른 류다. 뭐랄까. 인화지를 물에 헹구다가 손끝이 스칠 때의 떨림이, 소스라침에 가깝게 드러날 것 같다. 긴장해서 들숨과 날숨이 커지면 그것조차 숨길 수 없을 것 같고. 어둠 속에서 서로의 손짓이나 움직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사랑에 빠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아한 야함’ 정도로 표현할 수 있으려나. 처음 암실에 들어간 날을 뒤로하고, 그 후로도 몇 번이나 ‘우아한’이란 수식어를 붙여 단어를 만들었다. 선생님이 수업하는 소리를 들으며 ‘우아한 설명’, 인화지 박스를 보며 ‘우아한 도구’, 약품에 뭔가를 넣고 흔드는 ‘우아한 방식’, 암실의 빨간 시계의 초가 지나는 걸 보며 ‘우아한 시간’.

생각해보면 사진을 둘러싼 많은 일에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그땐 어떤 단어로 표현해야 할지 잘 몰랐다. 사진관에서 인화된 사진을 받았을 때, 사진집의 서문을 읽을 때, 책장에 꽂힌 사진집들을 하나씩 만져볼 때, 사진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며 그들의 말을 옮겨 적을 때…. 그때마다 비슷한 감정이 들었고, 그 마음이 좋아 사진을 좋아하게 되었다. 이번에 알았다. 그건 ‘우아함’이다. 사진을 이야기하는 사람이나 그것을 다루는 장비, 해석하는 태도 등이 모두 우아했다. 이유가 뭘까. 틈틈이 생각해보고 있는데 아직은 잘 모르겠다. 이번 수업을 듣다가 이 단어를 발견한 것처럼 계속 이 일에 시간을 들이다 보면, 언젠가 설명할 수 있을까.

손끝에 걸린
작은 느낌과 같은

암실은 어둡다. 처음 암실에 들어가면 지나치게 어두워서 당황스럽다. 이 어둠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지, 싶은데 신기하게도 잠시 머무르다 보면 눈이 밝아진다. 시간이 흐를수록 어두운 틈에 어떤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천천히 작업할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빛이 있을 때처럼 자연스럽게 할 수는 없다. 선생님이 어느 자리에 인화지를 끼우라고 했지만,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 못 찾겠어요.” 그녀는 확대기를 만지고 더듬거리더니 그쪽에 내 손을 붙여줬다. “보이진 않지만 촉감으로 느낄 수가 있어요. 손끝으로 잘 만지다 보면 여기에 뭔가 느껴질 거예요. 잘 한번 찾아보세요.” 뭐가 느껴지지, 하며 더듬거리니 정말 손끝에 아주 작은 부분이 튀어나온 것이 느껴졌다. 어둠 속에 있어서 그런지 촉감이 더 선명했다. 필름을 현상하고 인화하는 과정에는 생각보다 더 많은 감각이 필요했고, 암실에 머무는 내내 나는 발바닥이 간지러웠다.

함께 수업을 들은 할아버지는 내내 선생님을 찾았다. 불이 켜져 있을 때도 장비 숫자가 보이지 않아 옆 사람의 도움을 구했고, 인화지를 약품에 넣고 기다리는 시간을 빠르게 계산하지 못해 불안해했다. 단순히 좋은 시선으로 사진을 찍는 것만이 사진의 전부가 아니란 생각에 조금 서글퍼졌다. 이건 사진에만 해당하는 일은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할아버지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는 부끄러움 없이 질문했고, 부지런히 움직였고, 주변 친구들에게 자랑한다며 암실 앞에서 씩씩하게 사진도 찍었다. 그 모습을 떠올리며 다시 한번, 내게 주어진 요일들을 떠올려봤다.

“그리하여 저는 배웠습니다, 여러분, 아, 배워야 한다면 배우는 법, 출구를 원한다면 배웁니다, 앞뒤 가리지 않고 배우는 법입니다. 회초리로 스스로를 감독하고, 지극히 조그만 저항이 있어도 제 살을 짓찧었습니다. 원숭이 본성은 둘둘 뭉쳐져 데굴데굴 쏜살같이 제게서 빠져나가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저의 첫 스승 자신이 그것으로 하여 거의 원숭이처럼 되어버려, 곧 수업을 포기하고 정신병원으로 보내져야 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곧 회복되었습니다만.

그런데 저는 많은 스승을 동원했습니다. 네, 심지어 동시에 몇몇 스승을요. 제가 자신의 능력을 어느덧 확신하게 되어, 대중이 저의 진보를 지켜보고, 저의 미래가 빛나기 시작했을 때는 제가 직접 선생들을 초청해서 그들을 나란히 붙어 있는 다섯 개의 방에 눌러앉아 있게 하고는 저는 끊임없이 한 방에서 다른 방으로 뛰어듦으로써 모두에게서 동시에 배웠습니다.

이 진보! 앎의 빛이 온 사방에서부터 깨이는 두뇌 속으로 뚫고 들어옴!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이 저를 행복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또한 고백하자면, 저는 그것을 과대평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도 이미 그랬고, 오늘날은 훨씬 더 그렇습니다. 지금껏 지상에서 되풀이된 바 없는 긴장된 노력을 통하여 저는 유럽인의 평균치 교양에 도달했습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는 별것도 아닐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우리를 벗어나도록 도와주고 저에게 이 특별한 출구, 이 인간 출구를 마련해 준 한에서는, 그래도 상당합니다. 슬쩍 달아난다는 탁월한 독일어 표현이 있는데, 그걸 제가 했습니다. 저는 슬쩍 달아났습니다. 제게는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자유란 선택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언제나 전제로 하고요.” 

– 프란츠 카프카, 《변신·시골의사》 중에서

KT&G 상상마당 아카데미의 SAC 프로그램

SAC은 Sangsangmadang Art Club의 줄임말로 사진과 문화, 예술 분야의 수업을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을 의미한다. KT&G 상상마당에서 운영하는 이 프로그램은 ‘일상 속에서 예술을 즐길 수 있음’을 목적으로 두고 있어 예술에 문외한인 사람도 부담 없이 참여할 수 있다. 사진의 경우에는 필름이나 암실 교육을 하는데, 모노필름 현상이나 인화, 필름카메라, 클래식프린트 등으로 수업 종류가 다양하고 세분화 되어 있다. 취미로 사진을 배우고 싶은 이들이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암실이 드문데, 상상마당에서는 수업을 듣는 동안 자유롭게 암실을 체험하고 이용할 수 있다. 전문가를 위한 과정은 아니지만, 단계적이고 체계적인 교육 과정을 통해 누구든 자신이 배우고 싶은 분야를 차근차근 배워나갈 수 있으니, 나에게 주어진 ‘휴일’을 제대로 보내보자.

H. sangsangmadang.com/lec/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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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박선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