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글 쓰는 동지 두 명과 함께 떠날 기회가 생겼다. 3주 가까이 책방 문을 닫고 향한 곳은 태국의 치앙마이. 우리가 상상한 ‘치앙마이 3주 살이’는 요가, 카페, 야시장과 재즈 바 같은 단어로 가득했다. 하지만 ‘코로나 19’의 습격으로 여행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빠질 수 없는 핵심 단어는 마스크, 그리고 손 세정제.
두꺼운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시끄러운 대로변을 터덜터덜 걷던 우리는 빨갛고 아담한 건물 하나를 만났다. 그곳은 반갑게도 서점이었고, 그보다 더 반가운 건 한국어 입간판이었다. 거기엔 2층에 마련된 전시 공간에 한국 작가의 그림이 걸려 있다고 적혀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작가 I 님이 환한 웃음으로 우리를 반겨주었다. 그와 짧은 대화를 나눈 뒤 다시 만나 차 한잔을 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귀국 전날, 정말로 I 님을 만나 시원한 수박 주스를 함께 마셨다. 나는 타국에서 그림을 전시하는 그의 삶이 궁금해서 호구조사라도 하듯 질문을 쏟아냈다. 그는 음악을 전공한 후 해외를 누비다 미술로 업을 이어가는 아티스트다. 작년, 치앙마이의 작은 예술 마을 ‘반캉왓(Baan Kang Wat)’에 머무르다가 서점 주인과 예술가 친구들을 만났다고 한다. 그들과 한 달을 지내다 보니 이듬해에 멋진 전시까지 하게 되었다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정말이지, 아름다운 한 편의 영화 같았다.
I: 작년부터 내내,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 많았어요. 이렇게 해외에서 전시 제안도 받았고요.
나: 안 풀린다는 푸념은 여기저기서 늘 듣는데, 이런 이야기는 또 오랜만이네요.
I: 그게 걱정이라니까요.
나: 왜요?
I: 내가 운을 다 몰아서 쓰는 건 아닌가 싶어요. 내년부턴 재미있는 일이 없으면 어쩌죠?
얼굴을 찌푸리고 걱정을 토로하는 사람들과 달리, 그는 웃음을 한껏 머금고 투덜거렸다. “너무 좋은 것도 별로죠. 별 탈 없이 가는 게 최곤데!” 평화로운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에 그의 동선은 컸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이 도시와 저 도시를 가로지르며 I 님은 다채로운 풍경을 스케치북에 담았다. 그러나 자유로운 만큼 불안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 예술가의 숙명 아니겠는가. 반가운 소식은 왔지만, 기쁨이 지속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한국에 돌아가 클래스의 수강생을 모집하고, 그것으로 한 달 수입을 가늠하는 것이 그에게 근심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불안은 그의 삶에 오래오래,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을 것이다.
하염없이 밝기만 한 얼굴에 언뜻 불안으로부터 온 그늘이 비쳤다. 그렇지만 금방 푸른 얼굴을 되찾으며 그의 아버지 이야기를 시작했다. I 님의 아버지는 수십 년 동안 명상을 하며 육식을 멀리 하셨다고 한다. 아삭한 소리가 울리는 초록빛 식탁을 앞에 둔 아버지. 류시화와 틱낫한의 글을 읽으며, 하나뿐인 딸의 번민과 고뇌를 찬찬히 들어주는 그의 아버지 이야기를 우리는 오래오래 들었다.
I: 아빠는 심심할 때가 가장 좋다고 말씀하세요.
나: 이유가 뭔가요?
I: 심심하다는 건 모든 일이 편안하다는 거잖아요. 단지 재미만 조금 없을 뿐이죠.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심심함을 즐기는 방법을 잘 모르는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나: 저도 그런 것 같아요. 늘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고.
I: 전 아빠의 말을 듣고, 조금 심심해도 괜찮다고 자주 주문을 걸어요. 때론 그런 순간이 즐겁기도 하고요.
I 님은 때때로 자극과 영감을 얻기 위해 커다란 망치를 들고 삶의 균형을 깨야만 했다. 하지만 다행히 그는 조각나지 않은 삶의 심심한 맛 또한 알고 있었다. 이는 잔잔한 바다 같은 아버지 덕분이다.
나는 그가 스스로 찾은 답변을 음미하면서 시집이 꽂힌 자리를 매만지다가, 부녀가 좋아할 것 같은 제목의 시집 한 권을 꺼내어 봤다. 김사인 시인의 《가만히 좋아하는》. 시집을 훑으니 귀퉁이 접힌 곳이 기다렸다는 듯 제 몸을 펼쳐 보인다. <조용한 일>이라는 시는 나를 초가을로 데려가고, 선선한 오후에 할 일 없이 벤치에 앉아서 심심함을 만끽하던 날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사실 우리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심심함이 주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자음과 모음이 똑같이 균형을 맞추고 서 있는, ‘심심’은 어쩌면 늘 일과 개인적 삶의 점유율을 고민하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완벽한 밸런스가 선사하는 그 심심한 순간을 위해 사람들은 매일 고군분투하는지도 모르겠다. 뜨거운 타국에서 만난 한 예술가의 삶 곳곳에, 불안의 파도뿐만 아니라 아득한 심심함이 숨어있기를 빈다.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 김사인《가만히 좋아하는》중 <조용한 일>
We Around Project <한밤의 구석진 고민 의자>
권투 선수가 링 위에서 싸우다 잠시 쉬어가는 구석의 의자 ‘코너스툴(Corner stool)’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책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단어’로 된 고민을 가진 손님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떠오르는 ‘문장’이 있습니다. 그것을 다시 읽고 쓰며 작은 의자에 머물다 간 그들을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