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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지점紙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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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지점紙店
시작은 영화, <국화꽃 향기>였다. 영화 속 여주인공 희재는 바람과 햇빛 그리고 시간이 쌓은 온기를 머금은 종이인 한지로 동화책을 만들었다. 그녀는 어깨를 잔뜩 구부린 채 바닥에 앉아 나무를 오리고 달을 오렸다. 나는 그 모습을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
좋아서 하는 일
그래서였을까, 붓을 든 나는 늘 종이 곁을 헤맸다. 무엇이든 그릴 수 있고 쓸 수 있고 접을 수 있는 종이가 좋았다. 고백할 수 있고, 숨길 수 있고, 어디든 가져갈 수 있는 부드럽고 작은 종이가 무척이나 좋았다. 이십 대의 대부분을 한지를 만들고, 자연에서 얻은 재료로 염색을 하고, 그것들을 다시 실로 엮어 책을 완성하는 작업을 하며 보냈다. 종이의 앞면과 뒷면을 엄지와 검지의 촉감으로 구분하고, 손바닥 위에 올려 무게를 가늠한 뒤 결에 맞추어 재단하는 게 나의 일이자 기쁨이었다. 그저 좋았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종이를 찬찬히 쓸어 내리면이름 모를 선한 얼굴이 만져지는 듯, 코로 한 숨 깊이 들이쉬면 특유의 향이 무어라 말하는 것만 같았다.
가끔 여행을 가면 종이 가게부터 찾았다. 도서관과 서점, 종이를 다루는 곳들의 주소가 적힌 수첩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무작정 걷는 것이 내가 정의한 ‘여행’이었다. 아무 말 없이 상점 내부를 구경하고 그곳의 종이로 만든 노트나 모빌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방인으로서 겪는 피로와 불안은 익숙한 종이 냄새와 온도에 의해 증발되곤 했다. 신기하게도 상점 주인들은 어디를 가도 대체로 비슷했는데, 자분자분한 말씨와 손님이 편하게 둘러볼 수 있도록 부러 거리를 둔 발걸음, 왠지 행복한 표정이 그러했다. 그들은 손으로 작업하는 행위의 가치를 높게 여기고 종이가 가진 물성을 존중하는 듯했다. 작은 수첩 하나를 포장해도 마지막까지 정성스러운 손길로 대했고, 가벼운 질문에도 귀하게 답했다. 수많은 나라의 다양한 종이 가게 문을 밀고 나오며 늘 같은 질문을 하곤 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곳이 있던가?’ 서울이 나의 여행지가 된다면 내 수첩엔 어떤 이름이 적혀 있을까.
그곳에 종이가 있었다
도쿄에 가면 100년 넘게 대를 이어 종이를 만드는 ‘이세타츠ISETATSU’에 제일 먼저 간다. 나무를 조각한 판에 한 장씩 찍어내는 종이는 그 자체로 작품이다. 여기선 다양한 형태의 모빌을 판매하기도 하는데, 수작업인 것에 비해 가격이 비싸지 않아 오히려 속상할 정도다. 그 다음으로는 스케치북부터 그림을 그리기 위한 모든 도구를 만드는 ‘겟코소GEKKOSO’ 화방에 간다. 화려한 긴자의 거리에 이렇게 작은 화방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곳은 없는 것 없는 미술 재료가 가득하고, 갤러리에서 기획 전시가 열리기도 한다. 그리고 ‘타케오 페이퍼TAKEO PAPER SHOP’은 우리나라의 ‘두성종이’를 연상케 하는 곳으로, 각종 지류가 질서 정연하게 나열된 1층과 종이와 제본에 관련된 책과 도구를 판매하는 2층이 있다.
파리에 가면 제본 도구 상점에 들른다. 유럽에서는 오래된 책을 보수하고 다시 엮어내는 작업인 예술 제본이 대중화되어 있다.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동화책이나 겉장이 헤진 성경책, 엄마가 아이에게 물려주는 육아 일기장 등은 일련의 과정을 거친다. 그러면 오래 두고 볼 수 있는 튼튼한 표지와 깔끔한 내지, 가죽으로 여민 책등을 가지게 된다
이 모든 재료를 구매할 수 있는 곳이 ‘헬마RELMA’다. 파리 4구에 있는 ‘파피에PAPIER+’에서 북 바인딩 종이를 사고, 6구 소르본대학 앞 문구점에서 갱지로 된 메모지와 대학노트를 사는 것도 빼놓지 않는다. 피렌체에서는 ‘일 파피로IL PAPIRO’에 간다. 이곳은 이탈리아 여러 도시에 상점을 가지고 있을 만큼 공급과 수요가 큰 종이 가게다. 매일 아침 공방에서 전문가들이 마블지를 만들고, 이를 사용해 여러 문구용품을 만든다. 어느 영화 속 주인공이 자주 가는 가게로 유명해진 ‘재키ZECCHI’ 화방에선 이탈리아어만큼이나 일본어가 잘 들려 왔지만, 이곳에서만큼은 그 지역 작가의 이름이 각인된 수제 종이를 사야 한다. 기회가 닿아 뉴욕에 가게 된다면 ‘굿즈포더스터디GOODS FOR THE STUDY’ 한 곳으로 충분하다.
고유의 역사와 문화가 담긴 상점들은 저마다 분명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종이가 있기에 방문 자체가 목표이자 결말이 된다. 다시금 나의 질문을 반문해본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 작은 가게 하나를 그린다. 그리고 서울을 찾은 이방인에게도 우리 종이를 접하게 해줄 수 있는 공간에 대해 생각한다. 조금 더 알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공간. 화선지와 먹으로 그림을 그리고 한지 위에 편지를 쓰고 아름다운 언어 한글을 필사할 수 있는 곳. 능화무늬가 그려진 포장지로 선물을 할 수 있는 작은 곳. 그곳이 바로 우리가 만나는 지점紙店이 아닐까.
에디터 오혜진
글 ·사진 차민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