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rt To Heart

사랑을 쓰려거든 가계부에 쓰세요
엄마 강신숙

그녀의 기록에서 가족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소개로 시작해 볼까요?

소개…? 뭐라고 해야 할까요? 누구한테 저를 소개할 일이 잘 없었는데.

 

이참에 한번 해보세요.

참 어렵네요. 초상화를 그리고 화실을 운영하다가 지금은 집에서 수채화를 그리는 주부… 배가 따끔따끔하네, 요 며칠 배가 불편한 사람이에요.

 

이번 호 주제는 ‘기록’이에요. 책장 세 칸을 꽉 채운 30년 치 가계부가 이번 호 주제 자체라고 생각했어요. 언제부터 쓰기 시작한 거예요?

올해가 결혼 34년 차인데, 결혼하고부터 쭉 썼어요. 보관할 생각을 안 해서 앞에 몇 년 치는 없어요. 어디 보자, 1988년부터 1989년까지 2년 치가 없네요. 그땐 가계부를 보관할 생각도, 보관해야 한다는 생각도 없었어요. 근데 기록하다 보니까 이전 일들을 들춰보는 일이 좀 있더라고요. ‘작년 제사땐 물가가 어땠지?’, ‘어머니 칠순 때 뭐 했지?’ 하고 지난 기록을 찾아보는 거죠. 그런 일이 생기면서부터 안 버리고 모으기 시작했어요.

 

가족 행사를 일기장이 아니라 가계부에 적어 놓은 거예요?

그렇죠. 저는 맏며느리여서 집안 행사를 도맡으면서 얼굴도 모르는 조상의 제사도 다 챙기고 있거든요. 그런 걸 가계부에 기록하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나서 어떻게 했는지 잊어버리면 가계부를 들춰서 지난 기억을 떠올리는 거죠. 

 

결혼 전에는 가계부를 안 썼어요?

전혀요. 저 어릴 때는 용돈이란 개념도 없어서 따로 기록할 것도 없었어요.

 

일기도 안 썼고요?

노트에 대충 끼적이는 정도였는데, 그걸 일기라고 부를 순 없을 것 같아요. 기록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요. 모을 생각도 없었고 노트를 다 쓰면 버리곤 했죠. 기록이라는 게 저에겐 결혼하고부터 시작된 일 같아요.

 

(가계부를 펼치며) 이건 1993년도 가계부인데 병원 진료비가 이천 원밖에 안 했네요? 막걸리 오백 원, 과자 이백 원….

시대가 변하면서 물가도 많이 변했어요. 채솟값이 어찌나 많이 올랐는지. 아무래도 제가 기록하는 건 대개 음식 재료니까, 재료비를 이야기하게 되는데요. 명절이 되면 채솟값이 무섭게 오르거든요. 근데 두부만큼은 명절에도 안 올라요. 지금도 얼마 오르지 않았고요. 두부가 참 좋아요. 요리에도 좋고, 영양학적으로도 좋고, 저렴하고….

 

근데 가계부 귀퉁이에 적은 이건 뭐예요? “주연이 침 흘리네.”

1989년도에 딸이 태어났는데 처음 시작하는 것들이 제 눈에 참 신기하더라고요. 본격적으로 기록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적은 건 아니고 신통한 행동을 할 때마다 적어둔 것 같아요. 재밌는 게, “주연이 침 흘리네.”라든지 “주연이는 사람 많은 데 가면 꼭 운다.” 같은 건 있는데 걸음마를 언제 했고 말을 언제 시작했는지 같은 기록은 없어요(웃음). 제 눈엔 그런 게 훨씬 더 특이했나 봐요.

 

메모가 거의 가족 얘기네요.

저를 이루는 80-90퍼센트는 가족이에요. 평생 가족 얘기만 적으면서 살아온 거 같아요. 최근엔 기록하는 내용이 조금 바뀌기도 했는데요. 제 몸에 관심이 생겨서 노화하면서 변하는 몸에 대한 이야기도 조금씩 쓰고 있어요. 이가 아프다거나 허리가 쑤신다거나 배가 따끔거린다거나 하는 거요.

1990년대에 쓴 가계부는 다 여성지 부록이네요? 잡지를 즐겨 읽었어요?

아니요. 미용실에서 한두 권 들춰보는 정도였어요. 서점에서 우연히 연말에 가계부가 잡지 부록으로 나온다는 걸 알게 됐고, 그때부터 연말이면 여성지를 사러 서점에 갔죠. 부록을 위해 잡지를 샀어요(웃음). 근데 쓰다 보니까 제가 가계부 디자인대로 기록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때 가계부를 사지 않고 제가 만들어도 되겠단 생각이 들었죠. 딸이 쓰다 만 노트가 한 트럭이라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턴 마음에 드는 노트를 골라서 직접 가계부를 만들었어요.

 

달력도 그리고요?

그럼요. 제일 먼저 연간 달력을 그리고 가족 생일이랑 제사 같은 행사를 적었죠. 그다음엔 월별 달력, 그리고 구입 내역, 수입, 지출 칸을 연필로 만들었어요. 사서 쓰는 게 편하긴 하지만 직접 만들어서 기록하는 게 더 좋았어요. 개성도 있고요.

 

그렇게 쌓인 가계부가 어마어마하네요. 보관하길 잘했다 싶은 순간도 있을 것 같아요.

나이가 들면서 이젠 많은 걸 깜빡깜빡해요. 단어도 그렇고, 지나온 일도 그렇고. ‘내가 그걸 언제 했더라.’ 싶을 때가 있는데, 가계부에 그 내용이 적혀 있으면 너무 좋아요. 딸 피아노를 몇 살 때 사주었는지, 유치원에 언제 입학했는지 같은 걸 찾아야 할 때도 가계부를 펴요.

 

긴 시간 기록해 오면서 기록 패턴도 변했을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글씨 잘 쓴다는 이야길 많이 들어서 글씨를 정성들여 쓰곤 했거든요. 그래서 젊을 땐 정자로 반듯하게 가계부를 썼는데, 시력이 점점 안 좋아지다 보니까 지금은 글자 크기가 많이 커졌어요. 그리고 왜인지 모르겠는데 점점 사선으로 쓰게 되더라고요. 좀 휘갈겨 쓰게 되기도 했고요.

 

책 필사도 자주 하는 것 같은데, 떠오르는 문장을 하나 이야기해 본다면요?

아휴, 너무 많죠. 근데 이제 머리가 굳어서 가계부를 펼쳐봐야해요. 잠깐만요. (가계부를 편다.) 음… 좋았던 문장은 이런 거예요. “나는 사랑보다 센 권력을 알지 못한다.”

 

좋네요. 이 가계부에도 권력보다 강한 사랑이 가득한 것 같아요. 30년이나 남겨둘 가치가 있네요.

이건 저한테 정말 소중한 거예요. 제가 여태 걸어온 길이거든요. 처음부터 가계부가 좋은 자산이 될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에요. 나이를 먹어가면서 차츰차츰 느끼게 된 거죠. 이건 아마 앞으로도 절대 못 버릴 거예요. 얼마 전엔 남편이 책장 정리를 하면서 “가계부들 다 버릴까?” 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아니… 이걸 왜 버려요?

 

그러게요(웃음). 가계부만큼 앨범도 켜켜이 쌓여 있네요. 처음 필름 사진을 찍던 순간 기억해요?

고등학생 때 오빠들 카메라를 빌려서 몇 번 찍어봤어요. 워낙 귀한 물건이다 보니까 잘 빌려주지 않더라고요. 20대가 돼서야 제 카메라를 가지게 됐지만 부지런히 찍은 건 역시 결혼하고부터인 것 같아요. 딸 크는 모습을 기록하고 싶어서 남겨줘야겠다는 마음으로 찍었어요.

사진 기록도 결혼한 이후에 부쩍 많이 모인 거군요?

그렇죠. 저는 제 기쁨보다 우리 식구가 즐거워하는 걸 보는게 좋아요. 물론 이 사진들은 저에게도 기쁨이고요. 지금도 이렇게 펼쳐보면 마냥 좋기만 해요. 옛날엔 필름 사진을 인화하려고 딸이랑 현상소에 가는 게 일상이었어요. 지금도 앨범을 자주 들춰보는데, 언젠가부터 우리 사진이 다 핸드폰에만 있는 게 좀 아쉬워요. 그렇다고 필름 사진을 다시 찍을 생각은 없지만요.

 

왜요?

이젠 그럴 만큼 딸이 제 것이 아니거든요. 다 컸으니까요. 저랑 남편도 서로 포즈를 취하고 예쁜 척하고… 그러긴 쑥스러워요. 이젠 가족 구성원이 다 성장해 버린 거죠.

 

…앨범을 펼쳐보니 어때요?

좋아요. 그냥 너무 좋아요. 옛날 모습 보는 게 참 좋네요. 어릴 땐 딸이 이런 옷을 입었지, 내가 이런 옷이 있었지. 젊음을 확인하는 기분이에요.

 

우리는 왜 기록을 하면서 살아가는 걸까요?

기쁨이든 슬픔이든 감당이 안 되는 걸 풀어내려고요.

 

지금까지 해온 이 숱한 기록에 이름을 붙여 줄래요?

내가 지나온 길.

 

엄마, 나를 기록해 줘서 고마워요. 앞으로도 계속 기록해 주세요.

더는 못 해도 여태 한 만큼은 해 나갈 거야. 주연이 이야기도 계속 쓸게.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잘한 일은 엄마·아빠 딸로 태어난 거야. 사랑해,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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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포토그래퍼 이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