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구아에서 커피를 마셔본 적이 있나요?

Have You Ever Had Coffee In Antigua?

어떤 커피는 평생 잊지 못한다. 살면서 마신 수천 잔의 커피 중 딱 한 잔. 그 커피를 마신 지 벌써 몇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도 그 순간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여행의 막막한 면


반년 일정으로 남미 여행을 떠났다. 회사까지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떠난 여행. 평소 여행을 좋아하긴 했지만, 한 달이 넘는 장기 여행은 처음이었다, 50리터 배낭에 칫솔부터 옷, 카메라에 책, 핸드드립 도구까지 반년 동안 쓸 물건들을 넣었다. 배낭을 메고 서면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무거웠지만, 내가 쓰는 물건을 스스로 이고 지고 길을 떠날 걸 생각하니 몹시 신났다. 다시 못 할 값진 경험처럼 느껴졌다,온통 설레는 마음으로 15킬로그램이 훌쩍 넘는 무게의 배낭을 짊어지고 집 앞 버스정류장에서 공항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지금까지 한 번도 기대하지 않았던 감정이 몰려왔다. 나는 과연 낯선 땅 위에서 잘 지낼 수 있을까. 반년 동안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니, 집이 아닌 곳에서 먹고 자야 한다니,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막막해졌다. 아무도 여행의 막막함에 대해서는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여행 중에 느끼는 걱정은 설렘으로 포장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하지만 여행지에 도착하기만 하면 걱정과 막막함은 줄어들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아는 나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경유지인 미국에 도착하자 막막한 마음은 오히려 더 커졌다. 여행을 시작한 지 꽤 지난 것 같은데, 벌써 좀 피곤한 것 같은데, 이제 고작 일주일이 지났다니. 아직도 이 여행이 오 개월 삼 주나 남았다니. 남은 하루하루를 무사히 보내야 한다는 무게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반년이 훌쩍 지나 있고 안전하고 즐겁게 여행을 마친 상태였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쩌면 나는 긴 여행이 맞지 않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대체 어쩌자고 회사까지 그만둔 거지 싶었다. 집이 그리웠다. 누우면 푹신한 내 침대가 그립고, 익숙한 재료로 요리해 한상 푸짐하게 차려 먹던 주방이 그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물건들이 있어야 할 곳에 충분히 있던 풍경이 그리웠다.

안티구아에서 마시는 안티구아 커피


남미 여행의 첫 번째 도시 과테말라 안티구아에 도착했다. 어느 여행 관련 TV 프로그램에서 안티구아를 소개하며 과거 스페인 식민지 시절 수도였던 곳이라 가장 표준어에 가까운 스페인어를 쓰는 도시이며 그래서 어학원이 많은 곳이라고 했다. 우리도 이곳에서는 스페인어 학원을 다니며 조금 오래 머물 예정이었다. 그거 말고 다른 기대는 하지 않았다.

울퉁불퉁한 돌길을 걸어 알록달록 다채로운 색깔로 칠해진 집들을 지나 숙소를 찾아가는데 골목 모퉁이에 작은 카페가 하나 있었다.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주머니에 동전만 챙겨 넣고서 온 길을 다시 되짚어 그 카페로 갔다. 카페 이름은 페르난도Fernando’s Kaffee. 얼핏 작은 바 하나만 있는 것처럼 보이던 카페는 복도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 보니 꽤 넓었다. 과테말라 다른 집들처럼 건물 안쪽에 정원이 있고, 그 정원을 따라 화려한 테이블보가 깔린 테이블이 여럿 놓여 있다. 곳곳에 잘 가꾼 꽃들도 가득했다. 그리고 페르난도 씨로 보이는 사람이 ‘안티구아Antigua 생두’를 로스팅하고 있었다. 안티구아 커피라니! 

아직까진 얼떨떨한 기분으로 테이블 하나를 골라 앉아 ‘안티구아 커피’를 주문했다. 커피 한 잔에 천사백 원. 하얀 컵에 담겨 나온 진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순간, ‘아 내가 정말 지구 반대편에 있구나.’ 하는 걸 온 감각으로 실감했다. “안티구아라니, 원두 산지에서만 보던 지명, 그 안티구아에 내가 왔어!” 커피 한 잔이 주는 가장 강렬한 체험이었다. 그리고 커피는 기대보다도 훨씬 더 맛있었다. 아, 좋다.

진하고 묵직한 맛의 커피를 좋아하는 편이라 안티구아 커피는 평소 가장 좋아하는 커피 중 하나였다. 안티구아산 원두를 로스팅해보기도 했고, 핸드드립으로 직접 내려 먹은 건 더 자주 있는 일이었다. 원두를 고를 수 있는 카페에 가면 주로 안티구아커피를 주문했다. ‘안티구아 커피’의 ‘안티구아’가 지명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거기가 어디인지 어떤 나라인지 그것까지는 꼼꼼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다만 남미의 어느 지역이고, 그 머나먼 곳에선 우리나라에서는 크기 힘든 커피나무가 자라고 있구나,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 안티구아 커피를 안티구아에서 마시고 있다니, 내가 정말 여행을 하고 있다는 실감이 났다. 이후 남미를 여행하며 마추픽추를 마주하기도 하고, 우유니 소금 사막 위를 걷기도 했으며, 산처럼 높은 빙하 앞에 서서 감탄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행을 실감했던 순간, 가장 비일상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언제나 안티구아 커피를 마시던 순간을 첫 번째로 꼽는다.

카페 페르난도가 나에게 준 것


스페인어를 배우겠다는 핑계로 안티구아에서 오래 머물렀다. 그리고 안티구아 커피를 한 잔이라도 더 마시겠다며 하루에도 여러 번 ‘페르난도’에 들렀다. 주문을 받는 소년은 이제 내 얼굴을 기억한다. 동네를 걸으며 만난 사람들을 카페에서도 다시 만나고 아는 척을 한다. 과테말라의 작은 도시 안티구아에 단골 카페가 생긴 것이다! 친숙한 공간이 하나만 있으면 그 도시는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그 공간은 숙소일 수도 혹은 공원이나 시장, 식당일 수도 있다. 나에겐 주로 카페였다. 

안티구아 커피를 마시며 내가 지구 반대편에 와 있는 여행자라는 사실에 천천히 익숙해졌다. 아침이면 스페인어 학원에 갔다가 집에 돌아와(숙소를 ‘집’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점심을 먹고 스페인어 교재와 가이드북을 들고 ‘페르난도’로 갔다. 커피를 마시며 스페인어 단어를 외우고, 숫자도 외웠다. 이다음에는 어느 도시에 갈지, 미리 예약할 것은 없는지 여행 계획도 세웠다. 언제나 능숙한 솜씨로 주문을 받는, 눈빛이 선명한 소년과 대화를 나누고, 카페에 사는 고양이 미샤와 친해지는 동안, 스페인어가 조금씩 늘었고, 남미 지도가 머릿속에 훤히 그려졌다. 걱정은 설렘으로 천천히 바뀌었다. 막막함도 줄었다. 그리고 이 여행에서 내가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았다.

이후의 여행은 ‘페르난도’의 다른 모습일 뿐이었다. 힘들게 챙겨간 핸드드립 세트는 배낭 저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어디에나 카페는 있고, 아이들도 있고, 고양이도 있었다. 다음 도시에선 어떤 아이들을 만날까. 어떤 고양이와 인사를 하고, 어떤 커피를 마실까. 나는 그거면 되는 사람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여행은 그런 여행이었다. ‘페르난도’가 알려준 것이다. 그곳에서 마신 ‘안티구아 커피’ 덕분에 알게 된 것이다. 

남미를 여행하며 수십 군데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수십 명의 아이들 이름을 외우고, 백 마리도 넘는 고양이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반년 후 한국행 비행기를 타러 공항으로 가는 길, 나는 집에 가기 싫어서 엉엉 울었다.

안티구아 커피 한잔 마시면

 

여행에서 돌아온 지 한참이 지난 지금, 그때의 여행이 그리울 때면 안티구아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려 마신다. 그럴 때면 언제나 ‘페르난도’가 떠오르고, 그곳의 작고 다정한 고양이 미샤가 그리워진다. 종종 버릇처럼 인터넷을 통해 그곳의 안부를 확인하곤 한다. ‘페르난도’는 여전히 골목 모퉁이에 같은 모습으로 있다. 페르난도 씨는 한결같이 안티구아 커피를 로스팅하고 있으며, 고양이 미샤는 꽃이 가득한 정원에서 여전히 느긋하게 잘 지내고 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안티구아 커피를 두 잔째 마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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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다운

사진 박두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