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의 단어

리셋

리셋

 

데이터를 처리하는 기구 전체나 일부를 초기 상태로 되돌리는 일

 

고지서나 간간히 꽂히던 우체통이 모처럼 묵직해진 어느 날, 모르는 사이 시간이 또 흘렀음을 깨달았다. 구독하는 계간지들이 우체통의 작은 구멍에 우겨넣은 몸을 겨우 지탱하고 있는 광경은 내가 좋아하는 것 중 하나이다. 어떤 시간이 무사히 지나갔다는 사실과, 부지런한 사람들이 쌓은 노고가 마무리되었다는 사실까지 단번에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계간지를 받을 때면 계절마다 비슷한 일을 반복하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글 쓰는 사람, 인터뷰하는 사람, 사진 찍는 사람, 교정하는 사람, 디자인하는 사람…. 어쩜 그들은 같은 일을 계속하면서도 잘 사는지 놀랍다. 나는 요즘 자꾸만 지금과 다르게 살고 싶어진다. 틈만 나면 딴생각에 잠겨 먼 세계에 다녀온다.

요즘 부쩍 책방을 찾는 G 씨는 나보다 훨씬 더 ‘딴생각’이 많아 보였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고, 대신 집에서 꽤 먼 대학원에 합격했으며, 진지하게 만나던 연인과도 헤어졌다. 굵직한 변화가 쏟아지는 연말을 보내느라 머리가 어지간히 복잡했을 터. G 씨가 입 밖으로 가장 많이 꺼낸 단어는 단연 ‘리셋’이다.

 

G: 열심히 살았고, 얻은 것도 분명히 있는데 이상하단 말이죠. 올해는 뭔가 좀 허무해요.

나: 그 마음, 어느 정도는 알 것 같아요.

G: 그냥 전부 다 깨끗하게 리셋하고 싶다니까요.

나: 리셋은 어떻게 하는 거예요?

G: 어디론가 확 떠나는 거? 음, 그거 말고 다른 방법은 없으려나?

 

기껏 고생해서 쌓은 한 해를 모조리 없애 버리고 싶은 마음은 뭘까. G 씨는 요즘 인간이라는 종 자체가 싫다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그는 올해, 살면서 가장 많은 사람을 만났고 그들을 웃으며 맞이하는 임무를 착실하게 수행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그가 어리다는 이유로 함부로 대하거나 과한 요구를 했고, 상사는 그를 무시하기 일쑤였다. 상사와 단둘이 워크숍에 다녀오는 길에 G 씨는 자신에게 한 마디도 걸지 않는 그를 보며 더 이상 이 자리에 앉아있을 수 없다고 확신했다. 그러는 사이에 갑자기 이별을 고한 남자친구는 올해의 완벽한 피날레를 장식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최근에 다시 본 영화 <이터널 선샤인>이 떠올랐다. 주인공 조엘은 기억을 지워준다는 ‘라쿠나사’를 찾아가 전 연인인 클레멘타인과의 기억을 지워 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기억을 지우다 말고 그는 클레멘타인과의 행복했던 추억을 완전히 없애고 싶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그렇게 모든 걸 잊고 싶었던 그는 점차 사라지는 기억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쓰며 도망 다닌다. 그가 그렇게 원하던 ‘리셋’을 피하겠다고.

우리 동네에 ‘라쿠나사’가 있다면 G 씨는 제일 먼저 그곳으로 달려갈 것이다. 완벽히 다르게 살아보겠다고 신이 나 소리를 지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그에게도, 끝까지 남겨두고 싶은 아름다운 장면이 하나 정도는 있지 않을까. 그러니 우리가 비슷한 노동을 반복하면서도 계절이 네 번이나 바뀌는 내내 두 발로 잘 서 있던 건 아니었을까.

 

나: 좋은 기억은 없었어요?

G: 잘 생각해보면 분명 있겠죠? 매 순간이 다 나빴던 건 아닐 테니까.

나: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올해의 좋은 순간은 언제예요?

G: 할머니들과 같이 일했던 프로젝트가 있는데, 마지막 설문 조사지에 ‘칠십 평생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라고 쓰여 있었어요. 지치고 힘든 와중에 뭉클하고 뿌듯했어요.

나: 좋다. 또 있어요?

G: 대학원 합격한 거요! 좋아서 엄청나게 울었거든요.

 

‘좋다’와 ‘나쁘다’는 늘 교묘하게 섞여 있다. 누런 모래밭을 돋보기로 들여다보면 은빛 모래알과 살굿빛 모래알이 한데 섞여 있는 것처럼. 인생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핀셋으로 좋은 일과 나쁜 일을 세세히 분류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이 교묘함에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다. 누구의 전략도, 의도도 담기지 않은 그래서 자꾸 ‘좋음과 나쁨의 혼합물’이 그 자체로 우리의 시간이라는 걸 자꾸만 잊는다. 괴롭고, 동시에 아름다웠던 인생의 마디와 마디를 통째로 왜곡하면서 말이다.

책 배가 까맣게 낡은 올해의 다이어리를 천천히 넘겨보았다. 불안과 고뇌가 빼곡한 글자로 적혀 있지만, 그 가운데 애인과 함께 간 근사한 레스토랑의 이름이나 멋진 작가님을 만나 나눈 대화, 줄곧 읽고 싶었던 문장이 담긴 시집이 확실하게 존재한다는 걸 다시금 생각했다. 나의 혼합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육아를 위해 고안된 ‘스물네 살의 안드로이드 베이비시터’, 대니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윤이형 작가의 소설에서 대니는 딸 대신 손녀를 키우느라 진이 빠져버린 일흔두 살 할머니인 ‘나’와 놀이터에서 처음 만나 서서히 가까워진다. 감정적 불안정도, 발버둥도, 오류도 없는 로봇 대니는 어느 날 할머니의 흉터를 본다. 생선을 튀기다 생긴 화상, 등산하다 빠진 발톱 같은 것을. 그에 비해 너무나 매끄럽고 깨끗한 자신의 몸과 함께 말이다.

행복하지만 견디는 시간, 견디지만 행복한 시간이 우리에게 있었다. 견디기만, 혹은 행복하기만 했다고 말하는 건 자기기만이라고. 연말마다 색색의 볼펜 자국으로 어지러워지는 다이어리 속 달력은 가만히 보여준다.

 

 

대니: 음, 네. 저에게는 매 순간이, 말하자면 사람들이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과 같아요. 농구공을 골대에 넣는 것과 같죠. 나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가 있고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요. 그게 저의 기쁨이에요. 그다음은 없어요. 기쁘지만, 없어요. (중략) 그런데 할머니는 그렇지 않았어요. 할머니의 어떤 어려움은 없어지지 않는 것 같았어요. 견디는 거죠, 그런 건? 같이 시간을 보내는 동안 알게 된 거예요. 다른 게 또 있어요. 할머니는 행복한 순간에도 견딜 때가 있었고, 견디는 순간에도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 같은 표정일 때가 있었어요. 저에게는 그게 의미가 있었어요.

– 윤이형 《대니》

We Around Project

<한밤의 구석진 고민 의자>

 

권투 선수가 링 위에서 싸우다 잠시 쉬어가는 구석의 의자 ‘코너스툴(Corner stool)’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책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단어’로 된 고민을 가진 손님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떠오르는 ‘문장’이 있습니다. 그것을 다시 읽고 쓰며 작은 의자에 머물다 간 그들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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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김성은 크리에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