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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끌리는 서점들
구태의연한 이야기지만 가을은 책과 잘 어울린다. 책에 크게 취미가 없는 사람도 한 번쯤 책장을 뒤적거리게 되는 계절.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 했으니 든든하게 곳간을 채워놓기 위해서라도 다양한 방식으로 흥미를 끌어올리는 시도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그중에서도 책을 처음 만나게 되는 곳, 서점은 꽤 근사한 만남을 기대해도 좋을 만한 통로이다. 독특한 색깔을 갖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읽는다는 것
타향살이를 하다 보면 이따금 느껴지는 공백이 있다. 하지만 그 ‘비어있음’이 마음에 방해가 되는 일은 많지 않다. 그런데 유독 읽는 행위에서만큼은 언제나 그리움에 애가 닳았다. 한국에서 보내오는 책 선물이 마음 한 켠에 빈 자리를 메워주긴 하지만, 아끼고 아껴 전부 읽고 나면 또 다시 아쉬운 마음뿐. 내 나라 언어가 주는 위로는 그리 가벼이 넘길 것이 아닌 탓이다. 현지에 잘 적응하며 살다가도 한국 사람을 만나면 어쩔 수 없이 수다쟁이가 되고 마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그렇다고 언제 받아볼 수 있을지 모르는 책 소포만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는 일. 허전한 마음을 달래고자 서점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고불고불 알 수 없는 글씨가 가득하니 한숨만 나왔다. 그래서 글이 아닌 것들을 읽었다. 패션 화보 속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델의 표정을 읽고, 멋진 풍경 사진의 장엄함도 읽었다. 그러다 이곳의 말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글 사이사이 아는 단어가 보였다. 그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어느덧 내용을 유추할 만큼 말이 늘었고, 그럴 때마다 나는 서점으로 향했다. 그림 하나 없는 책의 단락 나눔까지 눈에 들어왔다. 굳이 사지 않아도, 내용 전부를 이해하지 못해도, 이리저리 책을 뒤적이며 마음의 위로를 얻었다. 아직 잉크냄새가 다 날아가지 못한 새 책을 만지면서 나는 공백이 작아지는 걸 느꼈다.
사실 네덜란드에도 대형 서점 체인이 시장을 장악한 지 오래다. 요즘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는 개탄의 목소리도 점점 늘어가고 있다. 그래도 외국인이 보기에 이곳 사정은 좀 나은 듯하다. 아직도 젊은 친구들에게 책은 꽤 의미 있는 선물로 여겨지고, 곳곳에 크고 작은 북 마켓이 열릴 때마다 사람들이 모여든다. 출판업계에서도 자체적으로 최소인쇄부수를 정해 무분별한 주제 선정으로 쉽게 출판하는 일을 막고 양질의 책 보급에 힘쓰고 있다. 모두 책의 가치를 알기에 하는 노력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자기만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시장 활성화에 앞장서는 매력적인 서점들이 있다.
01.
세상의 모든 작가들을 위하여
부키우키BoekieWoekie
요르단 지구Jordaan의 나인 스트리트Nine Street를 구경하다 우연히 발견한 곳. 부키우키는 밖에서 보기에 서점인지 인식하기 힘들 정도로 그 흔한 간판도, 표식도 없다. 유리창에 붙어있는 독특한 엽서가 눈에 들어와 잠시 걸음을 멈췄는데, 무슨 공간인지 알기까지 한참을 들여다봐야 했다. 가게 안을 빽빽하게 채운 책 박스 더미가 흥미로웠다. 창밖을 기웃대는 나를 보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는 주인아저씨. 설레는 마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잭팟이 터진 느낌이었다. 독립출판물을 취급하는 서점이었다. 총 인쇄부수가 10권, 혹은 단 한 권짜리 희귀본부터 유명작가의 아트북까지 손에 잡히는 모든 책이 예술 그 자체였다. 1986년 6명의 작가가 150권의 책을 가지고 문을 연 서점은 두 명 이상 들어갈 수 없는 작은 아파트에서 시작했다.
작가들의 아트북을 선보이며 조금씩 규모를 키워갔는데, 1990년에 이르러 새로운 주인과 파트너를 영입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고. 당시 8천여 권의 서적과 전시를 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마련하며 본격적인 독립출판 서점으로서의 출발을 알렸다. 본래 취지는 일부 아티스트의 책만을 다루는 것이었지만 ‘무엇이 아트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부딪히면서 책을 출판하는 모든 이에게 기회를 주고자 했단다. 특히 가난한 작가들에 대한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고. 그 결과 이제는 양질의 출판물을 찾아다니지 않아도 세계 각국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의 독립출판물이 쇄도하고 있다. 변변한 홍보 시스템도, 이윤창출모델도 없지만 오로지 아티스트들의 열정 하나로 움직이는 곳. 시장논리에서 완벽하게 벗어난 이 작은 서점의 다음 행보가 기대된다.
A. Berenstraat 16, 1016GH Amsterdam
T. (31)020 6390507
02.
한 권의 책을 하나의 작품으로
멘도Mendo
부키우키에서 길 건너를 바라보면 정반대 느낌의 서점이 있다. 그것도 잘생긴 세 명의 그래픽디자이너가 운영하는 아트북 서점. 그들의 멀끔한 외모만큼이나 가게 역시 인상적이다. 서점에 들어서면 검은색 정장을 맞춰 입은 듯 깔끔한 인테리어 디자인이 압도적이다. 부키우키가 숨겨진 보석이라면, 멘도는 ‘난 이렇게 특별해’라고 검증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다이아반지쯤으로 비교할 수 있겠다. 이곳의 뛰어난 감각은 이미 정평이 나 있다. 더치 디자인 어워드Dutch Design Award에서 우승한 바 있는 블랙 서가에는 패션, 사진, 건축, 인테리어, 여행, 음식, 그래픽 디자인을 아우르는 각종 아트북들이 전시되어 있다.
사실 책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작품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세련된 분위기를 뽐낸다. 그래서인지 방문할 때마다 마치 쇼핑할 때처럼 충동구매를 억누르는 데 온 기운을 쏟곤 한다. 읽히는 그림들을 소유하고 싶다는 욕심은 아무리 노력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비슷한 고민에 빠진 사람들 중 누군가가 아마 저 아름다운 책들을 사가겠지. 언젠가 가장 마음에 드는 아트북 한 권을 사겠노라 다짐하고 주변을 지날 때마다 꼭 들리는 멋진 서점, 멘도로 향하는 발걸음은 언제나 설렌다.
A. Berenstraat 11, 1016GG Amsterdam
T. (31)020 6121216
03.
건축가의 건축을 위한 공간
아키텍추라 앤 나추라Architectura&Natura
고풍스러운 정취가 묻어나는 건물, 75년 동안 꿋꿋이 자리를 지킨 서점의 역사. 이 두 가지 정보만으로도 아키텍추라 앤 나추라에 갈 이유는 충분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건축에 대한 서적이 주를 이루는 이곳은 실제로 어느 건축가가 만든 공간이다. 내부로 들어서면 2층 서가까지 꽉 들어찬 책들이 건축에 대한 그의 애정을 증명하고 있다. 사실 가장 인상 깊은 건 서점 관리자의 태도다. 하릴없이 곳곳을 구경하며 꽤 오랜 시간을 머물렀던 탓인지 그는 내 곁으로 와 묻지도 않은 서점의 숨겨진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건축에 관심이 있는지, 왜 이곳이 특별한지, 네덜란드 건축에 대한 인상이 어떤지 등 꽤 많은 대화를 주고 받았던 것 같다.
건축에 문외한인 나조차 ‘아, 건축이 이렇게 매력 있는 학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깊게 몰두한 사람만이 나눌 수 있는 지식의 힘이었다. 알고 보니 이곳은 건축의 거장 렘 쿨하스Rem Koolhaas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서적을 뒤적이러 들리기도 하고, 그 명성이 자자해 외국에서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을 만큼 유명한 서점이었다. 꼭 관심 있는 분야가 아니더라도 ‘알아서 남 주나’ 싶은 마음이 든다면 이 서점에 들러보자. 분명히 누군가 다가와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려줄 테니.
A. Leliegracht 22-H, 1015DG Amsterdam
T. (31)020 6236186
04.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셀렉시즈 도미니카넨Selexyz Dominicanen
나는 네덜란드 남쪽도시 마스트리흐트Maastricht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다. 암스테르담에서 기차로 2시간 거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건이 될 때마다 방문하곤 했는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에 이름을 올린 셀렉시즈 도미니카넨을 보기 위한 마음이 가장 컸다. 네덜란드의 서점을 소개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곳은 1294년에 지어진 성당 건물 안에 마련되어 있다. 1794년 본래의 역할을 상실하고 한동안 비어있다가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군사적 목적으로 다시 이 건물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후 창고로 쓰이기도 하고 시민들의 자전거 보관소로 이용되기도 했는데, 2005년에야 비로소 건물의 아름다움을 간직할 수 있는 프로젝트가 이뤄졌다고. 바로 천장 벽화 복원을 조건으로 대형 서점을 만드는 일이었다. 하지만 서가 설치부터 만만하지 않았다. 최소 1200평방미터의 서가공간이 확보되어야 했는데, 실제로 측정해보니 750평방미터 밖에 가능하지 않았던 것.
작업자들은 최대한 고유의 아름다움과 기품에 흠집내지않기 위해 고민하다 결국 커다란 빔을 이용해 건물 중앙에 수직으로 층층 서가를 올리기로 했다. 신기하게도 이 모던한 서가의 모습이 성당의 분위기에 잘 녹아들어 묘한 조화를 이뤄내고 있다. 십자가 모양으로 제작된 북카페의 테이블이나 중세 휘장처럼 천장에서 길쭉하게 떨어지는 배너 디자인까지 하나하나 섬세하게 설치되었다는 사실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아름다운 서점에는 매년 70만 명에 이르는 관광객이 다녀간다고 한다. 과연 전통과 혁신이 결합한 정답이라 하겠다. 네덜란드에 올 계획이 있는 여행자라면 이곳에 꼭 한번 들러보길. 혹시 복원 작업에 몰두한 사다리 위의 복원사들을 볼 수 있는 행운이 주어질지도 모르니 말이다.
A. Dominicanenkerkstraat 1, Maastricht
T. (31)43 3210825
에디터 오혜진
글·사진 지은주